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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3화 (9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3 화

“자세로 보자면…… 제게 무게를 안 실으려고 노력 중이신 공 작님?”

“글쎄. 아주 다른 의미로 힘들 긴 한데……”

그는 이를 악물고 내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가 놓았다.

그러 고는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으로 비켜 누웠다.

벌떡 일어나야 정상이었지만, 왠지 몸에 힘이 풀려서 나는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졸지에 나란히 누운 우리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에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돌 려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리체.”

“네.”

“네 말이 맞아. 이제 우린 어린 시절하고 달라.”

“그럼요.”

“네 성년이 지난 후에, 내가 드디어 당당하게 내 마음을 말하고 나서도 그런 눈으로 날 보면 진 짜 안 참을 거야.”

“안 참는다뇨?”

“네가 큰일 난다는 소리야.”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 라서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에르안이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때?”

“……뭐가요?”

“유혹당할 것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까지 다 알면서 의도 적인 유혹을 해댄 것이란 말인가.

“지금 뭐…… 연습한 거예요?”

내가 따지듯이 물었다. 그가 나 를 빤히 바라보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대답해 줘. 이러면 좀 내가 남자로 보이기는 해?”

“그럼 공작님이 여자겠어요?”

“다행이네. 효과가 있는 것 같 아.”

씩씩거리기 시작한 나를 보며, 에르안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뭔가 말린 듯한 느낌이 들어 나 는 그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 다.

“수면제 두고 갈 테니까 드세 요. 손은 안 잡아 드릴 거예요.”

“왜?”

“대체 왜 이렇게 난봉꾼으로 크셨어요?”

“난봉꾼이 라니?”

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주먹 으로 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내 주먹만 아플 것이다.

“생명의 은인인 저를 놓고 싶지 않아 하시는 마음이야 이해하지 만, 이런 짓은 정말로 좋아하는 여자한테나 하라고 했잖아요. 저 한테 이러시면 정말 당혹스럽다 고요.”

“음, 리체.”

그가 몸을 일으키고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살짝 잡았다.

“어차피 나도 너에 대해서는 준 법정신이 투철해서, 둘이 이렇게 있는 건 너무 힘드니까…… 네 방으로 돌아가는 건 좋은데.”

에르안의 붉은 입술이 낮게 속 삭였다.

“돌아가서 네 말이라면 모두 잘 듣는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 좋은 머리로 제발 잘 좀 생각해 봐.”

***

도대체 에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세우고 있던 가 설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유능한 주치의를 놓치기 싫어서 자신도 모르게 유혹하는 중이었으나 내게 혼났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알면서도 이런 식 으로 나온다는 건…….

‘진짜로 나를 여자로 보고 계시 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에르안은 분명 준법정신 이 투철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 다. 그래서 둘이 있는 게 힘들다 고까지 했다.

평민과 귀족의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토록 따랐던 웨데릭에게도 한순간에 돌아서는 사람인데 평민하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설마 나를 하룻밤 상대로 여기 고 있다면 배신감이 너무 클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그를 위해 줬는데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 라면…….

‘아냐, 혹시 모르지.’

나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둥순둥한 디엘도 어딘가에서 사고를 치고 온걸 보면……’

모른 척해 주고는 있지만, 디엘 은 친자 검사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뻘쯤한 태도로 돌려, 돌려 말하며 내게 빌려 가는 시약이 다 머리카락 검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 눈을 못 마주치 는 것이 아주 수상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어느 쪽이든 별로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이유만 으로 피가 섞인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에게도 저렇게 잔인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마 시각에 약한 나를 유혹해 서 어떻게든 곁에 두려고?’

왜 이사벨 마님이 자꾸만 에르 안은 배은망덕한 놈이라며 욕하 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사냥 대회 이후 공작 성에 돌아온 뒤, 에르안의 태도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리체, 뭐해?”

“햇빛 쐬고 있어요.”

“그래?”

에르안은 나를 우연히 마주치면 지나치지를 못했다.

정원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 도 꼭 옆에 앉아서 하녀들에게 간식을 내오라 시키곤 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모든 사용인 들이 힐끔거릴 정도로 환히 웃으 며 기함할 만한 말들을 내뱉었다.

“리체, 공작성 좋지 않아? 넓고 예쁘잖아.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곳이라도 있어?”

“없는데요. 왜요?”

“무조건 고치려고 했지.”

“저는 여기서 제 방이나 연구실 정도밖에 안 쓰는데 대체 왜 제 의견을……”

“네가 평생 머물렀으면 하는 곳 이니까.”

슬슬 무더워지는 여름, 그가 직 접 부채질까지 살랑살랑 해 주면 서 눈웃음을 칠 때마다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눈 빛으로 에르안을 째려보자, 그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심장이 뛰어.”

“네?”

“공작성에 돌아온 이후, 너랑 눈만 마주치면 두근두근한다고. 그래서 미칠 것 같아.”

“……부정맥이신가 봐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약 좀 처방해 드릴게요.”

분명히 예지몽에서 봤다.

나는 토끼 같은 아이들을 가진 엄마가 된다.

내 미래는 여기서 에르안의 숨겨진 여자 겸 주치의로 평생 사 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철벽을 쳐야 했다.

“원래부터 너만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아주 심각한 시력 이상인데…. 제가 눈앞에 없는 5년동안은 어떡하셨어요?”

“숨 쉴 때마다 생각했지.”

“강박중 검사를 다시 해 봐야겠어요. 살살이풀 부작용인가……”

그의 부드러운 부채질에 내 머 리카락이 하늘하늘 날렸다.

예쁜 여름의 정원 속에서 그가 작정한 듯 나른하게 속삭였다.

“리체, 왜 자꾸 내 눈을 피하고 그래?”

“불편하니까 그러죠.”

나는 툴툴거리 며 대답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들이대시는 거예요? 옛날하고 좀 다르잖아요.”

“갑자기 라니.”

에르안은 고개를 살짝 비틀며 눈꼬리를 휘었다.

“난 한 번도 달라진 적 없는 데.”

그가 조금 더 내 옆으로 다가오며 느릿하게 덧붙였다.

“언제나 네 말이라면 엄청 잘 듣고.”

내가 뭐라고 하려던 찰나, 하녀들이 우리 앞에 간식을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온갖 과일과 달콤한 것들을 예쁘게 모아 놓은 테이블이 순식간 에 완성되었다.

잠시 정신이 팔린 내가 대답을 못하는 사이, 에르안이 말을 이 었다.

“넌 우리 사이가 뭐 달라진 것 같아?”

“이게 안 달라진 걸로 보이세요?”

“난 똑같으니까, 네가 달라진거네.”

에르안의 검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드디어 내가 남자로 보이는 거야?”

이런 플러팅은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나중에 지겔을 마주치면 힘껏 노려봐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그게 아니고.”

나는 살짝 당황해서 결국 버벅 거리며 대답해 버렸다.

“저, 저는 그냥…… 음, 옛날의 에르안 님과 지냈던 그때가 더 좋았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 였어요.”

내가 말하면서도 완전히 말렸다 는 걸 알고 있었다.

옛날의 에르안은 이렇게 커다란 몸집도 아니었고 짐승 같은 눈빛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쪽에서 배워 온 건 검술뿐만이 아니라 요망함까지 포함인 것 같았다.

“아…… 뭐, 어릴 때 말하는 거야?”

그가 내 손을 잡아 딸기를 하나 쥐여 주었다.

“그럼 먹여 줘.”

“……네?”

“늘 내게 음식을 먹여 주었잖아.”

“그건 아이일 때……”

“나 그때랑 별로 변한 거 없는 데.”

그의 손에서 부채가 툭, 하고 천천히 떨어졌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멈추어서 그런지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그가 느릿하게 내 손목을 잡아 들어 고개를 숙인 뒤 내 손에 있 는 딸기를 물었다.

그의 입술이 손가락에 닿자 귀 에 열이 올랐다.

“또…… 언제나 손도 잡고 있었는데. 기억 안 나?”

나머지 한쪽 손으로 천천히 깍 지를 끼며 그가 선득하게 웃었다.

“안 날 리가 없는데, 우리 똑똑한 리체가.”

붉은 입술이 내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부드러운 혀의 감촉과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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