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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2화 (9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2화

그 순간, 저 멀리서 에르안이 다가왔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지?”

“……화가 아닙니다. 제 목청을 시험해 본 것뿐입니다.”

디엘이 즉시 고개를 숙이고 내게 빌린 책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에르안은 약간 지친 눈으로 웃으며 내게 다가왔 다.

“리체, 혹시 수면제 처방 좀 가능할까. 열도 좀 있는 것 같고.”

“수면제요? 열이요?”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고 살짝 놀랐다.

확실히 미열이 있었다.

“잠시 방에 가 계세요. 제가 약 좀 챙겨서 바로 갈게요.”

적당한 약을 들고 그의 방에 갔 을 때에는 그가 얇은 가운만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공작님, 저건?”

나는 그의 침대맡에 있는 화려한 세공의 유리 상자를 보며 잠시 당황했다.

찢겨진 셔츠와 함께 다 쓴 일회 용 반지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응, 소중한 거라서 잘 보관해 둔 거야.”

“일회용이라 또 못 쓰는데요?”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기억이 있지.”

“소중하다뇨?”

“반지를 나눠 꼈잖아.”

설마 나중에 저걸 통째로 갖다 버리려는 용도인가 싶기도 했다.

화려한 세공의 유리 상자 안에 찢긴 셔츠와 다 쓴 일회용 아이 템 두 개…….

마치 몹시 귀중한 쓰레기통이 놓여 있는 것 같은 인테리어였 다.

나는 더 이상 그 화려한 유리 상자에 시선을 두지 않으며 그가 누워 있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의 손을 잠시 잡고 마력의 흐름을 보니 약한 감기였다.

“초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 는데……”

별로 심각한 중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해열제 를 건넸다.

“계속 잘 못 주무시는 상태인데 무리하셔서 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디 추운 데에 오래 계셨어요?”

“음”

에르안은 해열제를 먹고 나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하 감옥에 좀 오래 있었 “어.”

“거기 추워요?”

“지내기에 좋지는 않지. 고문할 때 쓸 수 있는 빙결 마법이 걸려 있거든.”

“웨데릭 님은……”

“묻지 마.”

그가 씩 웃으며 붉은 해열제가 묻은 입술을 천천히 닦았다.

“넌 착하고 여려서 그런 거 들 으면 심란해할 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죠.”

“내가 감기 기운이 생길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만 알려 줄게.”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에서 가장 건강한 에르안 이 해열제를 먹어야 할 정도면 그 고문 상대였던 웨데릭의 상태 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근데 리체.”

“네?”

“그냥 나한테 웨데릭이 수상하다고 했으면 될 걸, 왜 이렇게 크게 일올 벌인 거야?”

“그건…… 아무래도 증거가 없으니까요.”

나는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어릴 때부터 이상한 과자를 먹 인 것부터 이상한데 그것만으로 감히 공작님의 사촌분을 고발할 수는 없잖아요. 확실한 중거를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머리를 쓴 거죠.”

“음…… 이해는 하지만 앞으로 는 그러지 마.”

에르안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 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뭐든 내게 말하면 다 믿어 줄 테니까.”

“그 과자 성분만 밝혀냈어도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나는 백 번이나 한 생각을 다시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시더 남작이 내가 모를 정도의 엄청난 발견을 해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필 과자 성분이랑 합쳐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살살이풀 하나만 더 있어도 성분 분리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요.”

“이제 안 밝혀내도 되잖아?”

“그건 아니죠. 이건 이제 학문적 호기심과 제 자존심을 위한 거예요.”

“그럼 살살이풀을 하나 더 구해 줄게. 이르비아의 지인에게 말하 면 되지.”

“저도 디엘을 통해 알아봤는데,  요새 살살이풀 개량 작업 때문에 아무리 웃돈을 줘도 사기가 어렵대요. 하지만 개량 작업만 끝나 면 운반이 훨씬 더 쉬워진다니까 기다려 야죠.”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잠을 설 치셨으면 진작 수면제를 달라고 하시지……”

“수면제가 없어서 잠이 못 드는 게 아니야.”

에르안이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해열제를 살짝 할으며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그럼요?”

“늘 말하지 않았나. 여기서는 너랑 같이 잤던 기억이 나서 잠이 안 온다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무슨 오해?”

“그냥, 불순한 생각을 하는 사 람들이 하는 오해가 있어요.”

물론 그 불순한 생각을 하는 사 람들 중 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침대에 다시 눕히며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오늘은 푹 주무시게 해 드릴게 요.”

손을 잡고 마력을 섬세하게 주 입하면 수면제보다 훨씬 더 즉각적인 수면 효과가 있었다.

비록 내가 집중을 많이 해야 해 서 굳이 자주 하지는 않지만 오늘 밤은 감기 기운도 있고 하니 잠이 드는 걸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 자, 에르안이 천천히 내 손을 끌어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공작님?”

“왜?”

그가 내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눈웃음을 쳐 보였다.

“황태자가 할 땐 가만히 있었잖아.”

“그건 인사였고요.”

“그 인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

“그래도 황태자님은 공작님을 정말 충신으로 생각하시던 걸요”

“그 돌대가리는……”

에르안의 눈에 불꽃이 번쩍 튀었다.

“뇌가 너무 맑으니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뭘 알아들어야 말이 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나는 푸홉, 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도 백치미가 있으시잖아요.”

“그런 게 취향이야?”

“글쎄요. 그런 건 별로 안 중요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대체 왜 자꾸 그 자식이 네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헛소리 를 하고 다니는 거지?”

“황태자님은 누구나 자신을 좋 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공작님을 최고의 충신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걸 보면요.”

“……그런가. 역시 가장 읽기 힘든 건 백지야.”

“일단 좀 놔주세요. 자꾸 제 손등에 대고 말씀하시니까 숨결이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 에요. 마력을 집어넣으려면 집중 해야 하는데.”

“집중 못해야 여기 오래 있지.”

그가 내 손등을 자신의 입술에 더 꽉 늘렸다.

“의사 자주 봐서 뭐해요. 별로 좋은 건 아니에요.”

그의 몽롱한 검은 눈을 보고 있 자니 내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것 같아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제 저희는 어린 시절하고 달라요. 만일 다른 주치의를 맞으셨을 때 이러시면……”

“다른 주치의? 그게 무슨 말이 야?”

에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이런 게 뭔데?”

“어…… 음…… 그러니까 사용인과 고용인 간에 지나친 밀착?”

“에이, 이 정도가 무슨 지나친 밀착이야.”

그가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손을 잡아당겼다.

무방비로 앉아 있던 나는 순식 간에 그의 몸에 엎어졌다.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가 내 몸을 안아서 한 바퀴 굴렀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순식간에 내 위에 올라탄 형상이 된 그를 올 려다보았다.

한쪽 손은 여전히 잡혀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화, 확실히 이건 좀 그러네요.”

귓가가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치의는 남자로 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왜?”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식이면 상대가 불순한 생각을 한다고 요.”

“ 너도?”

“.............”

“너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한다며.”

“죄송해요. 저는 시각에 너무 약하고, 공작님은 너무 잘생기셔서. 하지만 저는 주제를 잘 아니 까 선은 안 넘어요. 걱정 마세 요.”

에르안이 새초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주치의의 경우에 는 딱 오해하기가 좋은……”

“내 인생에 다른 주치의 같은 건 없어, 리체.”

그가 몸을 더 밀착시키며 나른 하게 말했다.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지?”

“뭐, 뭘요?”

“네가 내 주변 사람 중 가장 영리하고 올곧고…… 나를 유일하 게 위하는 사람이라고.”

예전에 내가 그렇게 말한 기억은 있었다.

“내가 봐도 네 말은 항상 옳았어.”

그의 새까만 눈이 나를 뚫어져 라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리가 얽혀 있었고, 그 가 유혹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내가 너를 놓을 수 있겠어? 바보도 아니고 말이야.”

“어, 어쨌든 이런 방식은 정상 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눈이 몽롱해진 걸 봐서 어느 정도 통하는 것 같은데.”

“놔주세요. 힘들어요.”

“……흠, 리체.”

그가 한숨을 쉬며 내 얼굴 옆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더운 숨이 어깨로 쏟아졌다.

“지금 우리 중에 더 힘든 사람 이 누구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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