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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1화 (9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1 화

페렐르만 자작은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오기 전에, 세이린 경과 함께 페렐르만 자작저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오랜만에 펠릭스 어르신을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세이린 경 몰래 그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에나베 관절염이 조금 더 진행되셨어요.”

그래?”

“주치의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하시길래 제가 몇 달 전부터 적절한 처방을 해서 약을 보내 드리고 있어요.”

“리체.”

페렐르만 자작이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정말 고맙다.”

어떻게 감정을 추슬렀는지, 아니면 추스른 척하는 건지, 이제 더 이상 그의 눈에 광기는 없었 다.

대신 무언가 놓아 버린 것 같은 공허함이 얼굴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불효하는구나, 내가.”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늦었지만 대신 처방해 드렸으니 너무 자책 마세요.”

페렐르만 자작은 거칠해진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아무래도 딸의 소식 이후 그는 하루 만에 몇 년이 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를 내 조수로 받은 건 내 끔찍했던 삶에 단 하나, 운이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었어.”

“마찬가지죠, 뭐.”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작님께서 대륙 각지의 의학책이나 약초 등을 가져오셔서 저 도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자작님 아니었으면 공작님도, 황태자 님도 고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내가 이렇게 급히 온 건……”

페렐르만 자작은 내 눈을 마주치며 서글프게 웃었다.

“네게 가짜 부모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해 주고 싶어서 였거든.”

“한참 전 일인데요, 뭐.”

“그래도 그 마음은 겪어 본 사람만 알지.”

우리 주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디엘이 홈칫 놀라는 것이 보였 다.

“드디어 찾았구나 싶어서 몇 날 며칠을 밤새우고…… 아닐 거라 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갖 것이 손에 안 잡히 지.”

“……맞아요.”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랜 시간이 걸려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그 허탈함이 말도 못해.”

“전 머리카락 검사가 다 통과했을 때의 그 터질 듯한 두근거림이 아직도 종종 생각나요.”

잠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쨌든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것만으로도 위로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분홍색 시약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거, 용의 발톱을 넣은 친자 검사 시약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마력 검사는 아예 뛰어 넘어도 돼요. 보고서도 여기 있으니까 읽어 보시고요.”

페렐르만 자작은 똑똑하니까,  아마 마차에서 보고서만 읽어도 모든 기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원래 시범을 보여 드리려고 어 젯밤 비커에 조금 덜어 두었는 데, 디엘이 청소하다가 엎었대요.”

“월급에서 까도록 하지.”

디엘이 페렐르만 자작의 뒤에서 억울하다는 둣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킬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이 었으니까 봐주세요.”

“뭐, 그렇다면…… 아!”

페렐르만 자작이 시약을 받아 들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디엘이 바들바들 떨며 숨을 몰 아쉬고 있었다.

“뭐냐?”

“아…… 새, 새치가…… 새치가 있으셔서요.”

“하나 뽑은 것 같지가 않은데?”

디엘이 페렐르만 자작의 머리카락을 뽑은 듯했다.

목숨을 걸고 뽑았는지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 지금, 월급에서 깐다고 시 위 하는 거냐?”

페렐르만 자작이 씩씩대며 화를 냈다.

“내가 새치가 어디 있어? 심지어 몇 가닥이나 뽑힌 것 같은데!”

“그, 그러네요.”

디엘은 덜덜 떨면서도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햇빛에 비쳐서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페렐르만 자작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사라졌다.

“따님은…… 계속 찾으실 거죠?”

디엘도 살려 줄 겸, 나는 조심 스럽게 물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가 중얼거렸다.

“……그래야지. 길을 잃었다고 해서 걷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조금은 쉬어야겠다. 나도 지치는구나.”

그러니 그동안 찾지 않았던 펠릭스 어르신도 보겠다는 결정을 한 것 같았다.

18년 세월이 무상해졌으니 당연 히 우울감과 무력감에 빠질 만도 했다.

“잠시 쉬고, 주변 사람들을 살 피는 것도 좋은 결정인 것 같아요.”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따님도 그 정도는 기다려 주실거예요. 펠릭스 어르신께 안부 전해 주세요.”

“그래. 늦어도 네 성년 생일 파티에는 꼭 도착할 수 있도록 하 마.”

그렇게 세이린 경과 페렐르만 자작은 떠났다.

더운 여름, 내 성년이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8. 성년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남 일’로 발칵 뒤집어졌다.

“응? 널 부른 적은 없는데?”

이사벨 마님이 급히 부른다고 하여 사냥 대회에서 온 이시더 남작이 어리둥절해질 새도 없이,  웨데릭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웨데릭뿐만이 아니라, 아론까지도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에 이시더 남작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 다.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이냐? 사냥 대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사냥 대회에서 돌아온 에르안에게 미친둣이 매달렸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글쎄요.”

에르안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때 황태자님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반란군이 주제도 모르고 날뛴 모양이던데.”

나는 에르안의 검은 눈동자가 경멸로 번득이는 것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누가 고작 남작 영식의 행방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복도는 공기마저도 싸했다.

하녀들이 슬슬 고개를 돌리며 재빠르게 흩어졌다.

“숲속에서 무슨 독버섯이라도 처먹고 뒈졌는지도 모르니 직접 가 보시든지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웨데릭과 아론은 바로 이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지하 감옥에 있었다.

나는 굳이 에르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이시더 남작이 후다닥 떠나고 나서야 성은 좀 조용해졌다.

“다 컸는데 별일이야 있겠니.”

이사밸 마님 역시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 찔렸지만, 에 르안이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 물고 있어야 했다.

이제 공작성의 주인은 이사벨 마님이 아니라 에르안이었다.

“웨데릭은 은근히 겁이 많아서 늘 호위를 데리고 다니잖아. 길 이라도 잃었나 보지.”

그녀에게는 행방불명된 다 큰 조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바로 내 성년 생일 파티 였다.

“곧 성년이니,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자꾸나. 주치의의 조수가 아니라, 주치의가 되어야지.”

성년이 되면 이제 정식으로 귀족가의 주치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이사벨 마님과 에르안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성년이 된 그 날부터 정식으로 에르안 일리아드 세르이어스의 주치의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에르안이 종종 언급하던 종신 계약은 아니었고 표준 계약 서에 따라 언제든 사표를 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무기력함에 페렐르만 자작저에 틀어박혀 있는 페렐르만 자작을 배려한 결정이었다.

언제까지 저 상태일지 모르는 데, 나라도 주치의의 자격으로 공작성에 머물러야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에르안이 돌아오고 나서 딱 하 나 정말 마음에 드는 일을 해냈구나.”

내 생일 파티는 페렐르만 자작 저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세이린 경의 의견을 에르안이 반대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사벨 마님은 처음으로 아들에게 활짝 웃어 보 였다.

“리체가 우리를 선택해 준 만큼 최선을 다해야지.”

“서, 선택이라뇨”

나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사벨 마님은 그날부터 공작 성 여기저기를 손보기 시작했다.

에르안의 취임식 때문에 온갖 가신들을 초청할 때보다 훨씬 더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또 분주한 사람 이 한 명 더 있었다.

디엘이 었다.

“저기, 리체……”

“응?”

“책 좀 빌릴게.”

디엘이 내게 빌리겠다고 가져간 책은 「친자 검사의 기본」이었다.

“네가 이걸 왜?”

페렐르만 상단의 사람이니 약초 나 시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의학에 대해서는 별 관 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굉장히 의외였다.

“그, 그냥.”

디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내 눈을 피했다.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갑자기?”

“응. 뭐, 그럴 만한 일이 생겼어……”

“나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아냐, 너한테까지 갈 일은 아니고.”

끝까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 는 디엘을 요리조리 살피던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입올 떡 벌렸다.

“디엘 몰레킨.”

“응?”

“……혹시 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고 쳤니?”

“뭐?”

“친자 검사가 필요할 만한 일이 생긴 거야?”

나는 디엘의 손을 덤석 잡았다.

“그러면 안 돼, 디엘.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지를 말았어야지.”

친구를 아끼는 마음으로, 나는 한숨을 쉬며 조곤조곤 말을 시작 했다.

“물론 네가 성년이 한참 지났다는 건 알아. 나는 여러 가지 형 태의 삶을 다 인정하는 사람이지 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무작정 사고를……”

“리체 에스텔.”

디엘이 씩씩거리며 짜증을 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네가 하룻밤 실수라도 했다면……”

“야!”

그가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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