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0화 (9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0화

“미쳤냐, 내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 테이블에서는 밥 안 먹지.”

디엘은 몸을 부르르 떨며 혼자 막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리체의 막사에 들어온 그는 이제 곧 세르이어스 영지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자작님 어쩌나.”

그는 혼잣말을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젠 금발의 녹안이라는 단서 조차 없어졌네. 전국의 열여덟 또래를 다 뒤질 수는 없으니 이 제 갈 길을 잃었다고 봐야지.”

세이린이 그 말을 전할 때에 절 대로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이렇게 잡일 을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챙겨 왔던 주 사기를 꺼냈다. 아르가의 E형 피가 들어 있었다.

“E형이라니. 혈액형도 참 본인 처럼 희귀하고 까탈스럽네.”

누군가에게 쇼크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폐기하면 안 되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커를 하나 꺼냈다. 일단 아무 약물이 있는 비커에 넣어 희석한 뒤 버려야 했다.

“저기, 디엘님?”

막 비커에 피를 쏟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막사 밖에서 말을 걸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리체 님이 도시락이라도 보내겠다고……”

“아, 네. 그럼 제 막사로 보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디엘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소고기보다는 양고기면 더 좋겠네요. 바짝 익혀 주세요. 그리고 샐러드는 반드시 세 개 이상의 채소를 섞어……. 으악!”

식사 메뉴를 생각하느라, 비커 에 혈액을 넣던 디엘은 커다란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다.

책상 에 놓인 다른 비커에 아르가의 피를 넣어 버리고 만 것이다.

“어, 어쩌지?”

약물이 비슷하게 들어 있는 비커라 순간 햇갈려 버렸다.

“이거, 용의 발톱이 들어가서 비싸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햇갈린 비커는 리체가 아르가에게 보여 준다고 조금 덜어 놓은 친자 검사 시약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아르가의 피는 친자 검사 시약에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디엘은 초조해져서 혼잣말을 했 다.

“실수했다고 싹싹 빌면 이 정도 야 괜찮겠지?”

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하던 디엘의 표정이 점차 묘하게 바뀌 었다.

“……음, 잠깐만.”

분홍색이었던 시약은 아르가의 피와 섞여 푸른색으로 이미 바뀌어 있었다.

디엘은 재빠르게 기억을 뒤졌다.

옛날에, 한스와 리체가 각각 자신의 피를 넣었을 때 보았던 색 이었다.

리체의 피를 넣은 시약이 푸른색으로 바뀌던 그 순간이 그대로 기억이 났다.

“서, 설마!”

디엘은 양손을 입에 가져다 대 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르가와 여러모로 비슷한 성격과 지능, 아르가와 똑같은 갈색 머리, 시오니와 똑같은 초록색 눈, 나이는 열여덟 근방…….

“아니야…… 서, 설마……”

디엘은 이제 다른 의미로 안절 부절못하게 되었다.

“어설픈 희망이 사람에게는 가장 고문인 법이야. 내가 겪어 봐서 알아. ”

리체의 말에 따르면, 이 시약은 마력 검사만 대신할 수 있었다.

같은 색깔이면 친자일 가능성이

70% 이상이라고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아닐 확률이 30%인 셈이었다.

‘게다가…… 푸른색이라고 해도,  시간차가 있고 정확한 계량도 못 했어.’

디엘은 쿵광거리는 심장을 스스 로 다독이며 생각했다.

‘바로 비교를 못했으니까 완전 히 같다고는 장담할 수도 없고.’

명도나 채도가 좀 다를 수도 있 는 문제였다.

디엘은 괜히 나섰다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올 때 둘 다 너무 낙 심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시간도 꽤 많이 걸리는 데, 그동안 둘 다 어설픈 희망 고문으로 괴로울 것 같기도 했 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겨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디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푸른색으 로 변한 시약을 재빨리 땅에다가 버리고 흙으로 묻었다.

‘어쩔 수 없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그는 리체의 침대에 다가가 베개를 엎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일으키느니 내가 좀 고생해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체의 길고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몇 가닥 모을 수 있게 되었다.

***

“어쨌든 리체의 생일 파티 말인데.”

세이린 경은 식사를 하는 둥 마 는 둥 하며 에르안에게 말했다.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주관하고 싶습니다.”

“……대체 왜죠?”

“아르가 놈이 리체의 대부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이 저희 아니겠습니까?”

“그 기간이 얼마나 된다고.”

에르안은 피식 웃으며 논할 가치도 없다는 둣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리체의 성년을 화려하게 축하해 주시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계셨습니다.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은 아주 따뜻한 ‘생일 파티’에 관한 것이었는데, 둘의 눈빛에는 이미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검을 다루는 사람들이라 그런 듯했다.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는 너무 성대한 파티는 애초에 원하지 않았어요. 다투실 필요 없어요.”

“그래, 리체.”

세이린 경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의견을 따르마. 장소는 어디가 좋겠니?”

나는 그 눈을 애써 피했다.

에르안의 말마따나, 이사벨 마님은 내 성년을 성대하게 축하해 주겠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다.

오죽하면 귀족 영애들처럼 데뷔 탕트를 열어 주겠다며 양녀 이야 기를 꺼냈을까.

가짜 부모 사건이 일어났던 날 내 옆에서 밤을 같이 지새워 주신 이사벨 마님의 바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이린 경과 펠릭스 어르신이 마음에 걸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은 이사벨 마님이었다.

“죄송해요.”

에르안의 얼굴에 환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세르이어스 공작 성에서 오래 지냈으니까……. 하 지만 정말 너무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공작님. 마님을 잘 말려 주세요.”

세이린 경이 힘없이 스푼을 떨 어트렸다.

“대신, 손님들은 받게 해 주실 거죠? 세이린 경도, 펠릭스 어르신도 초청하고 싶어요.”

“네 성년을 축하하고 싶은 사람 이라면 누구나 다 올 수 있게 해 줄게.”

에르안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물론 그중 가장 기쁜 사람은 나겠지만.”

“뭐……”

나는 세이린 경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더 초청할 사람도 없긴 해요. 보육원 선생님 정도?”

그때 였다.

“어? 나도 갈게, 리체 양!”

거리낌 없이 대화에 끼어들며 신나서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나도 리체 양의 성년을 축하하고 싶거든. 리체 양은 날 좋아하니 당연히 환영하겠지?”

여전히 호위라고는 전혀 붙이지 않고 발랄하게 이동 중인 제이드 황태자였다.

거기다 대고 황태자님이 딱히 좋은 건 아니라고 대답할 만한 배짱은 없었다.

나이프를 쥔 에르안의 손이 떨 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케인즈 경도 가고 싶어 할 거야. 아까부터 리체 양을 찬양하느라 입을 못 다물고 있어.”

“죄송합니다.”

에르안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공작성은 황족을 모시기에는 너무 누추합니다.”

“그래? 영지가 많이 어려운 모양이군.”

제이드 황태자가 혀를 끌끌 차 며 에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크다니 존경스러워, 공작. 그런 걸 헝그리 정신이라고 하던가? 그렇지?”

“.............”

“겉보기보다 사정이 안 좋은 모양인데, 리체 양의 성년 생일 파티에 필요한 돈은 내가 축하금으 로 따로 편성해 주도록 하지.”

“필요 없습니다.”

“겸양 떨지 않아도 돼. 공작의 충성심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라 서.”

이를 갈고 있는 에르안에게서 해맑게 고개를 돌린 제이드 황태 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난 리체 양이 이길 줄 알았다니까.”

“네, 저도 잘 알고 있었어요.”

“내 응원 들었어?”

에르안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그 하둥 쓸데도 없는 응원 들어서 뭐합니까?”

나는 에르안에게 경고의 눈빛을 한번 날리고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형이 좀 예민하고 음침한 데다 이기적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게 나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에르안은 툴툴대며 빈정거렸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모르고 의료진에 리체 양을 추천한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건 멍청하다는 뜻이고.”

나는 결국 테이블 아래로 에르안의 허벅지를 툭 쳐야만 했다.

다행히 제이드 황태자는 나를 바라보느라 에르안의 말은 한 귀로 홀리는 듯했다.

“리체 양, 기분 상했다면 용서 해 주길 바라.”

“제가 황족을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나요. 그런 말씀 마세요.”

“어쨌든 리체 양도 나를 봐서 좋았겠지만, 나도 사냥 대회에서 리체 양올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제이드 황태자는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상하게 에르안이 웃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순수하고 청명한 어린 애가 아무런 계산 없이 웃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머리를 쓰는 걸 싫어해서 그런가… 똑똑한 사람을 보면 너무 멋있지 뭐야.”

그의 은발 머리가 햇빛에 반짝거리며 빛났다.

“리체 양도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황궁에 와. 리체 양이 부탁한 뒤에 황궁의 모든 경비병들 에게 리체 에스텔이 오면 곧바로 내게 알리라고 전해 두었거든.”

“네.”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도 잡았으니 굳이 이제 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구질구질하게 취소하는 것도 좀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별일 없으면, 성년 생일파티 때 보도록 하지. 그땐……”

그가 내 손을 붙잡아 손등에 입 을 살짝 맞추었다.

“또 다시 둘만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

에르안이 냅킨을 무참하게 구기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제이드 황태자는 홀연히 왔던 것처럼 또 발랄하게 제멋대로 사라져 버렸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