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9화
잠시 정적이 흐르고, 하엘던 황자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러 고는 거의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페렐르만 자작에게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사과하겠습니 다.”
옆에서 페렐르만 자작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개인 사정으로 연구진에서 나갔지만 실력이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뿌듯한 얼굴로 페렐르만 자작을 올려다보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18 년간 꾸준히 의사로서 명예가 추락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 없었다.
“……제가 서운함에 뒤에서 좀 말이 과했군요.”
하엘던 황자가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내가 다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가만히 있다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뭐, 책임감 없이 나간 건 맞으니까요. 하지만 연구진의 실력이 저보다 낮은 것도 사실이었죠.”
‘아까 에르안에게 사회생활 못 한다며 툴툴댔던 사람이 누구더라.’
나는 얕은 한숨을 쉬었지만 나름 뿌듯해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하엘던 황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이만.”
디엘과 에시언이 급히 단상에서 내려가고, 나와 페렐르만 자작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단상을 다 내려가고 난 뒤에 페렐르만 자작이 조용히 말했다.
“리체.”
“네.”
“네 요구가…… 하엘던 황자가 내게 사과하는 거였나?”
“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걸로 욕하는 건 이해해 도, 실력으로 욕하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어서요.”
“……뭐.”
그가 머쓱한 둣 한동안 망설이다가 중얼거렸다.
“고맙다.”
“당연하죠.”
얼핏 페렐르만 자작을 올려다보니, 볼이 씰룩씰룩하면서 입꼬리 가 올라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 고 있었다.
‘이따가 세이린 경이 딸 얘기를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곧 처참하게 무너질 그의 얼굴 을 상상하니 마냥 기쁘지도 않았다.
“정말 고마우시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뭔데?”
페렐르만 자작은 퉁명스러운 어조와 반갑다는 얼굴을 놀랍도록 조화시키며 물었다.
“일단 다 말해 봐.”
“저 곧 성년이에요.”
“알고 있다.”
“그때 파티를 열고 싶어요. 꼭 참석해 주세요.”
“그래? 건국제랑 일정이 어떻게 겹칠지 알아봐야겠군.”
“네?”
“축제 허가는 적어도 보름 전에 받아야 하거든. 건국제 때문에 좀 빠듯하긴 하지만……
“아, 아뇨!”
나는 미친 둣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축제라뇨!”
“리체 탄신일 축제 정도는 되어 야 적당한 파티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정색하자, 페렐르만 자작 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축제가 싫다면……”
그러고는 아주 걱정되는 말을 중얼거렸다.
“마님과 의논해 봐야겠군.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할 수 있을까?”
“감사합니다.”
에시언은 고개를 푹 숙이며 내 게 거듭 감사를 표했었다.
“르웰리치 영애가 아니라, 리체 양이 저를 맡아 준 것은 제 인생에 가장 운이 좋은 일이었습니 다.”
“그건 그렇죠.”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은혜를 갚을 일이 생기 면 잊지 말고 갚으시던가요.”
내 실력으로 감사 인사를 받는 것은 언제나 뿌듯한 일이었다.
폐회식이 끝나고, 우리는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돌아가기 전 에 마지막 야외 만찬을 가졌다.
에르안, 페렐르만 자작, 세이린 경, 나 이렇게 넷이 같은 테이블 에 앉았다.
디엘은 우리를 얼핏 보더니, 멤 버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뒷정리를 하겠다며 먼저 사라졌다.
“웨데릭 님을 어쩌실 생각입니까.”
공교롭게도 우리는 아까의 현장 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었다.
호 아킨 경은 몰래 웨데릭과 아론을 데리고 먼저 떠났으니, 남은 목격자는 우리뿐이었다.
“죽이시게요?”
페렐르만 자작의 질문에 나 역 시 궁금해서 에르안을 바라보았 다.
에르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죽이는 건 쉽죠.”
무심하게 식사를 하며 에르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고.”
나는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마 그동안 일어났던 여러 가 지 사건에 개입되어 있으실 거예요. 충동적인 암살 시도가 아닐 거고요.”
“그렇겠지.”
에르안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중에 네 가짜 양부모 사건도 끼어 있잖아.”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그냥 곱게 죽이고 끝내겠어?”
그래도 어릴 적 친하게 지냈던 혈연이라고 고자질을 망설였던 나 자신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 다.
“지금 공작성에는 이시더 남작 님도 계시잖아요. 둘 다 심문하시게요?”
아무래도 공작성에 돌아가면 피 바람이 불 것 같았다.
“웨데릭 혼자서 모든 일을 기획 했을 리가 없지.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인데. 외숙부가 안 끼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해.”
그 말에 페렐르만 자작이 끼어 들었다.
“이시더 남작도?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었나……”
아직까지 이시더 남작은 페렐르만 자작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조산에 딸을 받아 주고, 산후 조리를 해 주었으 며 아이의 정보도 가르쳐 주었 다.
게다가 공작성에서 마주칠 때마 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시오니를 더 보살펴 줄 걸 그랬다며 침울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시더 남작과는 어릴 때부터 봐 왔어. 그럴 배포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텐 데……”
그 중얼거림에 세이린 경이 광, 하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죽 였다.
“나쁜 사람이야.”
“뭐?”
“엄청 나쁜 사람이라고.”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에 에르안 마저 어리둥절하며 두 오누이를 바라보았다.
“네놈이 북부를 헤매고 있을 동 안 나와 리체가 알아낸 것들이 있어.”
“뭔데?”
“우리 조카…… 금발에 녹안이 아니래.”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가가 들고 있던 포크가 떨어졌다.
“태어나자마자 보내서 시오니조차 모른대. 게다가 생일은 6월 9 일이래. 이시더 남작이 알려 준 날보다 훨씬 늦어.”
“그, 그걸 어떻게……”
“리체가 시오니와 함께 발견된 그 책의 암호를 풀었어.”
나는 차마 페렐르만 자작의 표 정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말도, 말도 안 돼……”
“모르겠어? 이시더 남작은 우리 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시오니 는 이시더 남작의 영지에서 아이 를 낳지 않았어. 아이를 받은 사 람도 이시더 남작이 아니고.”
“대체 왜? 왜 그런 거짓말을........”
정적이 흘렀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세르이어스 공작령이 탐나서가 아닐까요.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계속 주치의로 있으면 어떻게든 공작님과 마님을 살려 내셨을 테니까요.”
페렐르만 자작의 숨소리가 거칠 어졌다.
이 상황을 천천히 받아 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고통스러워 하는 듯했다.
나 역시 그의 간절함을 알고 있 었기에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그, 그런데…… 제가 그때 샀던 용의 발톱을 이용해서 쉬운 친자 검사 방법을 알아냈거든요? 다른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그가 벌떡 일어섰다.
“세르이어스 성에 가야겠어.”
“네?”
“이시더 남작을 내 손으로 죽여야겠어. 그놈도 죽이고 나도 죽겠어.”
“진정해, 오빠!”
세이린 경이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호칭으로 그를 부르며 팔을 붙잡았다.
나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지만 예상대로 가슴이 저릿했다.
“일단 정신 좀 차리고, 찬찬 히……”
“지금 찬찬히라는 얘기가 나 와?”
페렐르만 자작의 눈이 희번덕거 렸다.
에르안이 한숨을 쉬며 그 를 뻔히 바라보았다.
“이시더 남작을 죽이면 딸이 나온답니까?”
“뭐?”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죽이는 건 쉽다고.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다들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그 딸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리체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너무 마음 아파서.”
에르안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태연히 물을 마셨다.
“어떻게든 족쳐서 단서 하나라 도 내뱉게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네가 어떻게 알아.”
아르가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자식을 잃어버린 심정을, 찾고 찾아도 나오지 않는 그 참담하고 괴로운 심정을 네가 어떻게 알고 그딴 소리를 해?”
“당연히 전 모릅니다.”
에르안이 당당히 대답했다.
“하지만 이시더 남작이 똑같이 겪게 할 수는 있겠죠.”
디엘이 이 테이블에 앉지 않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
아마 이 자리에 디엘이 있었더 라면 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숨 도 못 쉬고 있었을 것이다.
“웨데릭이 우리 손아귀에 있지 않습니까.”
그가 음산하게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사라져 버리면 대단히 비열하신 우리 외숙부께서도 미치지 않을까요?”
세이린 경과 페렐르만 자작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고통에 물들어 바닥까지 추락시킨 후에 죽이더라도 죽이셔야죠. 오래도록 지속되는 고 통올 맛봐야지, 그냥 죽이면 너무 싱거운 형벌 아닙니까?”
“어, 어떻게 하시려고……”
내가 에르안을 향해 고개를 돌 리자, 그가 눈을 접어 보이며 예 쁘게 웃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리체.”
이 분위기에 웃는 것조차 좀 무 서워 보였다.
“그런 지저분하고, 나쁘고, 꿈자리 뒤숭숭한 일은 내가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물러났다.
“제가 마음이 여리고 심성이 고와서 그런 건 잘 못하니까요.”
“그럼, 그럼. 너 신경 쓰지 않게 네 대부의 원수는 내가 잘 조져 줄게. 어차피 그 사람이 세르이어스의 적이기도 하니까.”
에르안은 태연하게 고기를 썰어 내 앞에 덜어 주었다.
그래도 외숙부인데 세르이어스 의 적이라고 판단하자 조금의 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먼저 혈육의 정을 배신한 것은 그쪽이니까.
“넌…… 무사히 성년만 되면 돼.”
세이린 경이 그제야 페렐르만 자작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설마 대부가 되어서, 리체의 성년 생일도 안 보고 죽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
“리체는 대부를 위해서 하엘던 황자와의 말도 안 되는 내기에서도 이겨 줬는데?”
페렐르만 자작은 한숨을 쉬고, 그대로 세이린 경의 손을 떼어 낸 뒤 휘적휘적 걸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세이린 경이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안 죽을 거야.”
“정말요?”
“옹, 표정 보면 알아. 대신 미친 놈처럼 소리 지르면서 숲속을 뛰어다닐 순 있겠지.”
“그러다 위험해지면 어떡해요?”
“내가 끌고 올 테니 네가 치료 해.”
음식은 맛있었고 여름날은 화창 했지만, 어쨌든 침울한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