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8 화
분명 이 부상자는 내가 그때 상 태를 교차 점검한 그 환자가 맞았다.
절대로 토마소 중후군이 아니었 고, 나탈리가 말한 것처럼 처방했다면 히리카 마력 치료를 할 때부터 각혈이 더 심해졌을 것이 다.
처방 자체를 계속할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완벽히 회복 시켰는지 모를 일이었다.
‘환자를 바꿔치기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케인즈 경과 군의관들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탈리의 부상자는 자신의 건강을 뽐내둣 근육을 자랑하며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 보였다.
[너는 질 수밖에 없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 나탈리 이르타 르웰리치가 귀족다운 자비 를 베풀었구나 싶어 눈물이 날 거다. ]
나는 질 수밖에 없다던 그 말이 떠올라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도 의학을 대하는 사람인데 의료 연구진의 탈을 쓰고 속임수 를 쓸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수상하여 내가 끼어들 려던 찰나였다.
“잠시만.”
저 멀리서 페렐르만 자작이 천 천히 일어났다.
“히리카 마력 치료를 했다고?”
술렁이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 며 말했다.
“그럼 나탈리 영애의 말대로 혈액 중화가 되었을 거고……”
나는 멍하니 단상에 올라온 그 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 람들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페렐르만 자작을 숨죽이며 쳐다 보고 있었다.
“주사기 하나와 알코올 솜을 좀 부탁하지.”
페렐르만 자작은 군의관 중 하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재빨리 알코올 솜과 주사기를 내밀었다.
나는 페렐르만 자작이 자신의 피를 스스로 뽑는 것을 보며 입을 벌렸다.
‘설마!’
“일시적 혈액 중화가 되었다면 지금은 아무 혈액이나 집어넣어도 멀쩡하겠지, 나탈리 영애?”
나탈리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케인즈 경이었다.
“그렇죠.”
“그럼 내 피를 집어넣어도 멀쩡하겠군. 참고로 나는 E형이야.”
E형이라니, 극도로 드문 혈액형 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을 봤지만 나도 E형은 처음 보았다.
E형은 심지어 다른 혈액과의 상성도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의사들 사이에서 E형은 ‘피가 아니라 독’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E형이 아닌 사람이 E형의 피를 받으면, 미량일 경우 죽지는 않았지만 일시적인 쇼크 증상이 나 타났다.
“집어넣어 보자고. 그럼 진짜 히리카 마력 치료를 했는지 알 수 있잖아.”
“그, 그게…… 그게……”
나탈리가 망설이며 하엘던 황자 를 흘끗 보았다.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어 이제 흥미진진할 지경이었다.
물론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저, 저기……”
자신의 피가 든 주사기를 들고 다가오는 페렐르만 자작을 보며, 나탈리의 환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히리카 마력 치료를 안 했는데 E형의 피를 받으면 어떻 게 됩니까?”
페렐르만 자작은 태연하게 말했다.
“쇼크 증상이 나타나, 최악의 경우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뇌사가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다.
그래도 ‘최악의 경우’는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군의관들도 모두 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됩니다!”
환자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 며 외쳤다.
“절대 안 됩니다! 히, 히리카 마력 치료는 하지 않았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둣이 조용한 정 적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울렸다.
“죄송합니다, 영애. 하지만 제가 뇌사 상태에 빠질 수는 없지 않 습니까.”
나는 흘끗 하엘던 황자의 얼굴을 살폈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 는 것이 느껴졌다.
울상이 된 나탈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안색이 새파래져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보라색 시약을 드셨나요?”
“네, 네! 보라색 시약을 수시로.........”
“……역시 그랬군요. 안타깝지 만 조만간 몸에 이상이 생기실 거예요……”
나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한숨 을 쉬었다.
[뭐, 필요하다면 다른 처방으로 일시적인 효과를 낼 수는 있겠으 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구적인 장기 훼손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일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보라색의 피치 시약을 사용하면 두꺼비의 독을 일시적으로 짓늘러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어서, 몇 주 지나면 짓늘렸던 독이 더 몸 안에서 미쳐 날뛰게 되는 것이었다.
아마 나탈리는 처음엔 히리카 마력 치료를 시도해 보았을 것이 다.
그러다가 이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노선을 변경한 것이 틀림 없었다.
영구적인 장기 손상이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이런 식의 치료를 강행한 것을 보면 의료인의 양심 같은 건 없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든 폐회식만 넘기고 다른 방식으로 환자를 없애거나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피치 시약을 사용했군, 딱 보니”
나탈리는 이제 불쌍할 정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폐 한쪽은 날아갈 것 같은데.”
“뭐, 뭐라고요?”
나탈리의 환자가 사색이 되어 나탈리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 사기꾼 같은 여자가!”
하엘던 황자가 손짓을 하자, 그 의 곁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환 자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환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탈리.”
하엘던 황자는 차갑게 말했다.
“사실이냐?”
나탈리는 숨을 몰아쉬다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네.”
나는 하엘던 황자를 빤히 바라 보았다.
나탈리 혼자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물중이 없었다.
“제가…… 이기고 싶다는…… 그런 욕망에 눈이 멀어서…… 독단적으로…… 죄송합니다.”
“그 행동이 지금 우리 연구진에게 상당한 민폐를 끼쳤다는 건 알고 있나?”
“송구스럽습니다.”
모든 게 잘 짜인 연극 같았다.
나는 나탈리가 스스로 꼬리를 잘라 내는 것을 보며 왠지 씁쓸 해졌다.
“책임지고 사퇴하겠습니다.”
“그래.”
하엘던 황자가 냉정하게 말했다.
“괜히 자비를 베풀어 또래를 붙여 주겠다고, 가장 실력이 낮은 영애를 선택한 내 잘못도 있다.”
‘구질구질하게 핑계 대기는.’
나는 못마땅하게 한숨을 쉬었지만, 어쨌든 가만히 기다렸다.
하엘던 황자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냉담하게 선언했다.
“이번 대결은 리체 에스텔이 승리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음산한지, 사람들이 모두 떨떠름하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제이드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리체 양! 잘했어! 난 리체 양이 이길 줄 알았다고. 계속 응원도 했다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제이드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커다란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예의를 갖춰 사람들 앞에서 인사했다.
페렐르만 자작은 혀를 한번 차고, 자신의 피를 뽑은 주사기를 디엘에게 건넸다.
“폐기해.”
“예? 예……”
디엘이 엉거주춤 그의 주사기를 받아 들자, 페렐르만 자작은 그 대로 단상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왜?”
“들으셔야 할 말이 있거든요.”
나는 일부러 질질 끌며 하엘던 황자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입 을 딱 씻고 뭉갤 모양이었다.
절대로 단상을 내려가 주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버티려는데, 에 르안이 천천히 일어섰다.
“제가…… 이 대결이 시작될 때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는 싱긋 웃었는데, 나를 보면 서 웃을 때와는 다르게 좀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약간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분이서 조건을 걸었던 것 같은데요.”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건 아니고, 그냥 말 한마디 씩 아니었습니까?”
평민과의 약속보다 대귀족의 말 한마디가 더 효과가 있는지 하엘던 황자의 표정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아, 맞다!”
제이드 황태자가 환하게 맞장구를 쳤다.
“형님, 약속은 지키셔야죠.”
순진무구한 목소리였다.
“리체 양이 듣기로 한 말이 있었잖아요. 그게 뭐였더라……”
하엘던 황자의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붉게 익었다. 정말로 하기 싫은 말이 분명했다.
게다가 페렐르만 자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잘됐다.’
나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아까 공개적으로 그렇게 페렐르만 자작님을 까더니…… 얼마 되지 않아 정정하게 생겼네.’
영문을 모르는 페렐르만 자작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뭔데, 대체?”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가만히 하엘던 황자를 바라보았다.
“아! 페렐르만 자작이랑 관계된 말이었는데.”
황태자가 해맑게 말했다.
그 말에 페렐르만 자작이 미간 을 찌푸리며 하엘던 황자를 바라 보았다.
한숨을 쉰 에르안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그 이상은 황자님이 말씀하시게 둡시다.”
“응?”
“이제 좀 입을 처닫으라는 얘기 입니다.”
“그래, 충신의 말은 들어야지. 본디 충신의 말은 듣기에 쓰다고 했어.”
“.............”
에르안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