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7 화
폐회식 날이 되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홀쩍 다가온 여름으로 인해 햇살은 쨍쨍했다.
사냥 대회 1둥은 에르안이 차지했다.
이 사냥 대회를 통해 에르안은 당당히 온 제국에 세르이어스의 존재감을 알렸다.
이제는 그 누구도 세르이어스의 후계자가 비실거린다거나, 제 구 실올 못할 것이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적당히 한두 개 차이로 황태자 님께 져 드리지.”
페렐르만 자작은 혀를 끌끌 차며 내 옆에서 중얼거렸다.
“사회생활을 저렇게 못해서야.”
“……누가 들으면 자작님께서는 사회생활 정말 잘하시는 분인 줄 알겠어요.”
“내가 못했으니 하는 말이야.”
이상하게 페렐르만 자작은 에르안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듯했다.
하긴,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에르안을 떨떠름하게 여겼다.
친모인 이사벨 마님까지도 말이다.
“나도 하엘던 황자님께 절대 져 드리지 않아서 많이 피곤했거든 ”
“하엘던 황자님이랑 제이드 황태자님이랑은 다르니까요.”
“그래, 아주 많이 다른 것 같긴 하더라.”
페렐르만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연구진의 나탈리인가? 그 애랑 대결을 했다며?”
“네.”
“자세한 건 못 들었는데, 그래 도 혹시 몰라 네 환자를 보기는 봤다.”
“할리피 두꺼비의 독, 맞죠?”
“어, 나탈리는 뭐라고 진단했든?”
“토마소 중후군이요.”
“형편없군.”
“형편없죠. 연구진 실력이 원래 그래요?”
“연구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치게 똑똑해서 생기는 문제다.”
“그렇군요.”
나는 선선히 동의하며 황제에게서 치하를 받는 에르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 역할은 거의 다 끝났다.
웨데릭을 넘겼으니 알아서 이시더 남작도 처리할 것이고, 저렇게 늠름하게 잘 컸는데 세르이어 스 영지를 못 지킬 이유가 없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환절기에 정말로 멀쩡한지 확인만 한번 하면 내 할 일은 다한 셈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페렐르만 자작에게 넘기면 되는데…….
당장 미쳐 날뛸까 봐 내 성년 생일 파티로라도 붙잡아 둬야 하는 사람에게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제 주치의, 리체 에스텔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에르안은 어느새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성년이 아니라 주치의라고 말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페렐르만 자작이 공작성 에 붙어 있지 않는 걸 누구나 알아서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 영광을 모두 리체 에스텔에게 돌립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페렐르만 자작이 못마땅한 둣 말했다.
“리체.”
“네.”
“저 녀석, 좀 이상하지 않냐.”
“……녀석이라뇨. 공작님이세요.”
“너한테 특히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널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제 덕분에 저기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건 맞는 얘기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어제도 보셨잖아요. 속이 시커먼 사촌까지 제가 개고생 하며 잡아줬다고요. 지나치게 총애를 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인 가요?”
다 맞는 말인 걸 인정하는지, 페렐르만 자작은 한숨을 쉬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계속 미심쩍은 듯했다.
“그래도…… 총애라기엔 일정범위를 넘어선 것 같은데.”
“절대 아니에요. 그건 제가 더 잘 알아요.”
양녀로는 절대 못 삼는다며 이사벨 마님을 잡아먹을 둣 굴었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단호 하게 말했다.
“오히려 일정한 선을 절대 못 넘게 하는 건 공작님이신걸요. 제가 주제 모르는 짓을 하면 아 마 다른 사람처럼 섬뜩하게 돌변 하실 거예요.”
“……그래. 이중인격인 걸 알면 됐다.”
“이중인격이라기보다는…… 높 은 자리의 사람으로서 겉과 속이 다른 건 당연한 거겠죠.”
“하여튼 굉장히 마음에 안 들게 컸어.”
페렐르만 자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 어쨌든 남의 자식이니 내 알 바 아니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나랑 얽힐 일이야 없을 테니.......”
지루한 시상과 여러 연설이 이어지고, 조금 지칠 때가 되어서야 하엘던 황자가 앞에 섰다.
“모두 다 아시겠지만.”
그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며칠 전 재미있는 대결이 즉흥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나는 순간 하엘던 황자의 시선이 페렐르만 자작에게 닿은 것을 느꼈다.
페렐르만 자작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여전하군.”
“네?”
“사람이 다쳤는데 재미있다니.”
잠시 하엘던 황자와 페렐르만 자작의 서늘한 시선이 맞부딪쳤다.
불과 몇 분 전 사회생활 운운하 던 사람이 짓기에 적절한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실력의 한계로 황실 연구진을 뛰쳐나간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 리체 에스텔과 황실 연구진의 나탈리 이르타 르웰리치 영애가 서로의 실력을 겨뤄 보기로 한 거죠”
나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지금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실력의 한계’를 운운하다니 미쳤나 싶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팔을 턱, 잡으 며 내가 중얼거렸다.
“완전 헛소리네요.”
화를 펄펄 낼 줄 알았던 페렐르만 자작은 의외로 침착했다.
“18년 전 일이지, 벌써. 기록은 본디 남은 자들의 것이야.”
“.............”
“어차피 딸을 찾겠다고 나간 건 내 선택이야.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다. 어차피 후회는 없어.”
그는 아직 나와 하엘던 황자의 내기 내용을 알지 못했다.
최대한 극적인 기쁨을 위해 우리 모두 숨기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하엘던 황자가 비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상관없어.’
나는 조용히 일어서며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하엘던 황자의 안내에 따라, 나 와 나탈리는 천천히 일어서서 사람들 앞에 있는 단상에 섰다.
황제와 황후, 황제의 측실들이 높은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황태자를 맨 위에 두고 대귀족들의 대표들 이 앉아 있었다.
공작인 에르안 역시 황태자의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 는 표정이었다.
황태자는 체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리체 양! 응원할게.”
도대체 어제 자객에게 암살 위협을 받은 얼굴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운동 경기입니까? 응원한다고 힘나서 이기게.”
에르안이 퉁명스럽게 짜중을 내는 것까지 귀에 들렸다.
“그건 그러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공작?”
“그냥 닥치고 있으면 됩니다.”
“그래, 충신의 말이니 들어야지.”
“충신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 오. 아주 기분이 더러우니까.”
“본디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 으로 판단하는 거랬어.”
대체 왜 저렇게 대화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에르안은 당장 역모를 꾀할 것 같은 건방진 태도였는데 충신이라니.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있 는 범위가 아니었다.
“그러면 각자 이틀 동안 맡았던 부상자들을 데려오도록 하죠.”
하엘던 황자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일단 리체 에스텔이 맡았던 에시언 레이지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환자, 에시언은 아직 혼자서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디엘이 그를 부축하며 올라왔다.
나는 또박또박 상황을 설명했 다.
“할리피 두꺼비의 독에 중독되었다고 판단하여, 이리데 시약으로 최대한 독의 배출에 신경 썼습니다. 현재 의식도 돌아오고 심장 박동과 호흡 역시 정상입니 다.”
확실히 이틀 전에 피를 토하며 제 몸을 못 가누던 그때보다 훨썬 회복된 모습에 사람들이 고개 를 끄덕였다.
“보통 두꺼비과의 독은 부작용 이 심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아직 거동이 아주 편하지는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한다면 완 치될 것입니다.”
환자 검중을 위해, 케인즈 경을 비롯한 군의관 몇 명이 에시언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장 박동과 호흡, 기본적인 소근육 움직임 등을 확인한 그들이 내 말이 맞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거동은 불편하다는 뜻이군요.”
하엘던 황자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완치는 한 달 후에나 가능하다는 말이고요, 그렇죠?”
“네.”
“그럼 어쨌든 지금 완치는 못한 것 아닙니까. 할리피 두꺼비의 독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한 달 뒤에는 장담이 가능하겠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토마소 중후군은 절대 아니 었다.
하엘던 황자는 성의 없게 고개 를 끄덕이고 다시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나탈리 영애가 치료 한 부상자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상의 오른쪽에서 그녀가 맡았던 환자가 걸어 나왔다.
‘말도 안 돼.’
디엘의 부축이 필요했던 에시언 과는 달리, 그녀의 환자는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 완전히 회복된 모습이었다.
당당하게 혼자 선 그를 보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탈리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토마소 증후군이라고 판 단하여, 히리카 마력 치료로 일시적 혈액 중화를 했습니다. 그 리고 케시오 시약을 처방해서 이틀 안에 완치시켰습니다.”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