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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86화 (8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6화

“……도저히 말 못 하겠어.”

그날 밤, 세이린 경은 내 막사에 와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둘이 말하라고 일부러 에르안과 먼저 온 것인데, 세이린 경은 결국 페렐르만 자작에게 진실을 말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18년 동안 헛짓한 거라고 어떻 게 말해……”

내 막사에서 기웃거리다가 모든 사정을 듣게된 디엘의 안색 역시 파리해졌다.

그는 금발에 녹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여러 번 충고한 적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단 하나의 희망이라며 한숨 짓던 아르가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미쳐 날뛰시면 어쩌죠?”

디엘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딸을 찾겠다는 희망 하나로 살아오신 분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세이린 경의 목소리는 참담했다.

“딸을 찾겠다며 황실 연구진에서 그렇게 갑자기 뛰쳐나와 서……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원래라면 별로 관심 없었겠지만, 황실 연구진과 안 좋은 감정이 생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그냥 나오신 게 아니에요?”

“애초에 연구진에서 말이 많았어. 아르가가 말은 제대로 안 했지만, 시오니 말로는 하엘던 황 자님이랑 사사건건 대립한다고 했었거든.”

“의학에서 대립할 게 뭐가 있어요? 원칙은 명백한데요.”

“그게 정확히 아르가 놈의 생각이고, 황자님은 생각이 좀 달랐나 보지.”

세이린 경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황실 연구진에서 나와서…… 당연히 약속되었던 백작 위는 사라졌고.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아르가가 연구 해 왔던 것들 역시 다 연구진에 넘긴다는 모욕적인 각서도 써야 했어.”

물론 그 당시 페렐르만 자작에 게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이제 세대가 교체되어서 그런지… 연 구진 사람들이 아르가가 실력이 없어서 쫓겨났다는 것처럼 얘기하고 다니더라고. 아마 본인도 알 거야.”

누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엘던 황자가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18년 전의 일이니 자신의 입맛대로 남을 깎아내리는 건 굉장히 쉬울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아르가는 별 볼 일 없고 책임감마저 없는 삼류 의사로 남겠지.”

세이린 경은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 감수하고, 딸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딴 건 신경도 안 썼는데……”

디엘이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다른 단서가 있으면 모르겠는데, 결국 ‘딸에 대해서는 아무 단서가 없다.’가 새로운 사 실이었다.

“그럼 내일 말씀드리는 걸로 해요.”

내일은 사냥 대회 폐회식이었고, 나와 나탈리의 대결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기도 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맡은 환자, 에시언 레이지는 할리피 두꺼비의 독에 중독된 것이 맞았다.

나탈리가 주장한 토마소 증후군 이라면 이미 에시언 레이지는 적절한 처방이 이루어지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판단대로 최대한 소극적인 치료와 함께 무조건 독의 배출에 신경 쓰자, 그의 안색은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고 의식도 돌아왔다.

물론 단기간에 해결될 질병은 아니었다.

말끔하게 낫는 것은 더 시간이 흘러야 하겠지만 적어도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에르안이나 디엘, 세이린 경은 내 실력을 믿는지 이 대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조차 하지 않 았다.

‘그 환자는 어때?’라든가 ‘네 치료법이 맞아?’ 같은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다들 어차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하엘던 황자님께 사과를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으시겠어요?”

“아르가도 인간인데, 당연히 좋겠지.”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친자 검사 시약도 드리고……”

나는 비커에 조금 덜어 놓은 시약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니 온 대륙의 열여덟을 조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디엘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런데 시오니 님께서 그 아이를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보냈다며.”

“하지만 이사벨 마님은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없어.”

이사벨 마님은 심지어 그 딸과 에르안을 엮어 주기로 한 이야기 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관련된 일화가 있다면 내게 말을 해 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쪽으로 보냈지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을 거야.”

“이사벨 마님이 뭘 놓치고 계실 수도 있지. 너무 희망을 잃지 말자고.”

디엘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 를 저었다.

“어설픈 희망이 사람에게는 가장 고문인 법이야. 내가 겪어 봐서 알아.”

한스의 일은 내게도 꽤 충격적 인 사건이었다.

정말로 가족을 찾은 줄 알았던 그 며칠간의 설렘은 나중에 더 큰 배신감과 좌절로 돌아왔다.

내가 무슨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 눈치챈 디엘이 시선을 떨구었다.

세이린 경이 박수를 한 번 쳤다.

“그래. 어쨌든 리체의 말이 맞긴 해. 최대한 기분이 좋을 때, 그때 말하자고. 근데…… 근데도 죽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면 어떡 하지?”

그때, 디엘이 좋은 생각이 났다 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억지로라도 살 의지를 만들어 드려야죠.”

“어떻게?”

“리체의 성년이 곧 다가오잖아요.”

“내 생일?”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바로 와 닿지 않았다.

회귀 전, 내 성년은 그냥 의원에게서 독립하는 날이었다.

딱히 누군가에게서 대단히 축하를 받거나 한 기억이 전혀 없었 다.

게다가 그날이 정말 내 생일이 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건 보육원에 내가 도착한 날이지 진짜 내가 태어난 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게 뭐?”

“그게 뭐라니?”

세이린 경이 어이가 없다는 둣 입을 벌렸다.

“리체, 네가 성인이 되는 날인데 그런 반응은 대체 뭐야?”

“그게…… 중요한가요?”

“당연하지.”

세이린 경은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평민이라 데뷔탕트를 열어 줄 수는 없지만, 자작저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서……”

디엘이 끼어들었다.

“아뇨, 그건 아무래도 이사벨 마님과의 협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사벨 마님은 절대 그런 이벤트를 페렐르만 자작저에 뺏기실 분이 아닙니다.”

“디엘, 년 어느 가문 사람이지? 월급 어디서 받는데?”

세이린 경의 날카로운 눈빛에 디엘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피식 웃었 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축하할 거리가 된다고……”

“아르가는 네 대부야.”

세이린 경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까…… 네 성년 축하를 꼭 직접 받고 싶다고 부탁해 봐. 그럼 그때까지는 살아 있을 거 아냐.”

“그 이후에는요?”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는 일이지.”

“.............”

내가 미심쩍다는 둣이 눈을 깜 빡이자, 세이린 경은 울먹이며 재차 부탁했다.

“사람 하나 살린다고 치자, 리체……. 부디 대부님이 축하해주는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고 싶다고 해. 네게 성년의 의미가 크다고 말이야.”

“별로 안 큰데……. 그리고 저 거짓말 잘 못해요.”

“아르가는 의학 외에는 바보라 서, 형편없는 거짓말에도 속을 거야.”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라는 말이 내게는 엄청난 무게였다.

뭐, 생일 파티를 열어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또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성년 선물로 뭘 준비해야 할까.”

세이린 경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밀리면 안 돼.”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는데........”

“무슨 소리야.”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씩 웃었다.

“아마 아버지도 기뻐하시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실 모습이 눈에 선해.”

내 마차를 기다리던 펠릭스 어 르신을 생각하자 마음이 이상해졌다.

“드디어 늘 침울하던 우리 집에도 설렘이 찾아오는구나.”

“뭐…… 그렇게까지……”

“고맙다, 리체.”

그녀가 내 머리를 숙숙 쓰다듬어 주었다.

문득 화려한 성년의 생일 파티 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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