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5 화
‘스치기만 해도 된다. 쇠로 상처 만 내면…….’
웨데릭이 커다란 세르이어스 성 을 생각하며 희열에 입꼬리를 올 릴 때였다.
에르안은 무표정으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들고 있던 검으로 화살을 너무나 쉽게 쳐내 버렸다.
“믿을 수가 없군요.”
그리고 그의 목에 커다란 검이 드리워졌다.
“이사벨 마님이 아시면 쓰러지시겠습니다.”
웨데릭을 직접 포박한 사람은 호아킨이었다.
호위 기사들은 어느새 세이린의 검에 쓰러져 있었다.
***
리체는 드디어 웨데릭을 잡았다는 생각에 뿌듯해서 당당히 미소 를 지었다.
혼자서 과자의 성분을 밝혀내겠다고 끙끙거렸지만, 여러 사람들과 협력해서 결국엔 잡아낸 것이다.
아론을 이용해 미끼를 던지고, 익숙한 새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후 에르안에게 연락을 했다.
에르안에게는 혼자 외진 곳에서 무릎이 아픈 척을 하라고만 지시 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호아킨과 세이린을 대동 하고 숨어 있었다.
호아킨과 세이린에게는 아주 간단히만 설명했다.
웨데릭이 의심 가니, 에르안을 공격하는지 안하는지만 시험해 보자고 말한 것 이다.
평민 주제에 주인의 혈연을 의심한다며 펄쩍펄쩍 뛸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호아킨은 의외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저는 리체 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리체는 노장의 깍듯함에 오히려 더 깜짝 놀랐다.
“뭐든 시키십시오.”
에르안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웨데릭이 호아킨에게 잡혔을 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
그가 씩 웃으며 재갈이 물려 아무 말도 못 하는 웨데릭의 볼을 툭툭 쳤다.
“내가 쓸 수 있는 하나의 패로 남아 줬다면 목숨은 건졌을 것 아냐.”
웨데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 며 뭐라고 소리쳤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딱 형의 위치였는데 말이야. 욕심낼 걸 내야지.”
리체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아르가였다.
이 자리에 아르가가 올 줄은 전 혀 몰랐던 것이다.
우연히 에르안을 마주쳐서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일을 몰래 목격하고 만 아르가는 본의 아니게 에르안의 두 얼굴을 모두 보게 되었다.
자신은 물론, 황태자에게도 버르장머리 없던 그 싸늘한 표정을 떠올리면 이사벨의 자식 농사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웨데릭에게도 쩔쩔 맸는데……’
웨데릭을 바라보는 에르안은 딱히 배신당했다는 괴로움이 보이 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귀찮아서 살려 두었던 벌레를 무성의하게 잡는다는 태도였다.
“왜 주제를 몰라. 이렇게 현실 파악이 안 되는데 공작령을 가져도 몇 달이나 지킬 수 있을지.”
에르안은 한심하다는 둣이 혀를 한 번 차고, 호아킨에게 명령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끌고 가서 공작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해.”
“공작성에는 지금 이시더 남작이……”
“이시더 남작은 물론, 어머니께 도 알리지 마.”
호아킨이 웨데릭을 기절시킨 후 급히 사라졌다.
그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리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님, 어쩌시게요?”
“아, 리체.”
아르가는 순간 기절하는 줄 알 았다.
리체를 바라보는 에르안의 표정과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드러운 어조로 에르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또 네 덕분이야. 이 렇게 잡아낼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간드러지는 것 같은 목소리와 대놓고 치는 눈웃음에 아르가는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리체는 그의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 답했다.
“도와주실 수 있는 분들이 많아서 가능했죠.”
“아냐, 그래도 이 모든 걸 생각 해 낸 건 너잖아.”
“그건 당연한 거고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숲까지 오고…… 어디 독풀에 스친 건아냐?”
“화살 맞을 뻔한 건 공작님인데요.”
“신발은 편한 거 신었어? 다리 는 안 아프고?”
보고 있을수록 가관이었다.
대부분의 성격과 능력은 케일런 을 닮았는데, 하나에 꽂히면 약간 핀트가 어긋나는 것은 이사벨 을 닮았다.
선대 세르이어스 공작 부부를 모두 알고 있는 아르가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둘의 성향이 극단으로 발현되어 최악으로 조합된 것이다.
한마디로 정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디 계셨어요?”
리체는 일회용 마법 반지를 빼며 말했다.
“아, 우연히 황태자님을 만났는데 누가 공격을 하더라고. 아주 조금 도와드렸어.”
“난리 났겠네요.”
“응, 그래서 웨데릭 하나 없어진 건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야.”
그것까지 계산하고 오늘로 날을 잡았던 리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뺀 마법 반지를 재빨리 에르안이 받았다.
“나중에 더 좋은 걸로 줄게.”
“네? 무슨 소리세요?”
“일단 나한테 줘.”
“아, 이런 물건 버리는 것 좋아 하시죠? 알아서 버려 주세요. 근데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어요?”
“뭐, 몇 명 죽이지도 않았어. 다 황태자가 알아서 했거든. 난…… 피를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아르가는 입을 떡 벌렸다.
우연히 만났다는 것부터 피를 보는 게 싫다는 것까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이없었다.
“그래도 어디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이따가 잘 살펴봐 줘.”
리체가 알았다고 대답하기 전 에, 아르가가 무뚝뚝하게 나섰다.
“네, 제가 가겠습니다.”
에르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 라보았다.
순식간에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먼 길 이동해서 힘드실 텐데 좀 쉬시죠.”
“아닙니다. 제가 오랜만에 상태 를 좀 볼 겸.”
“막사 배정이 좀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은 리체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리체가 잠시 망설이더니 끼어들었다.
“네, 자작님. 오늘은 먼 길 오셨으니까 좀 쉬세요.”
“역시.”
에르안은 환하게 웃으며 리체의 옆에 섰다.
“리체는 여러 모로 착하지.”
“그건 그렇죠.”
“일단 가자. 다리 아프니까 내 말 같이 타고 내려가.”
마치 상전을 모시는 것처럼 에 르안은 리체를 데리고 흑마에 올라탔다.
그리고 알아서 오라는 듯이 아르가와 세이린에게 성의없게 눈짓올 하고 떠났다.
아르가는 조용히 옆에서 웨데릭 의 호위 기사를 묻고 있는 세이린에게 말을 걸었다.
“세이린.”
“왜?”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오누이의 첫 대화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르이어스 공작…… 좀 이상하지 않아?”
“몰라, 난.”
세이린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리체랑 있을 땐 계속 저렇게 사근사근한 모습이던데. 그 외에는 본 적이 없어서.”
아르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작 리체는 그 차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 역시 아까 황태자와 있을 때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면 이 괴리를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좋은 공작이 되겠어.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평온할 테고 제 자리는 잘 지키겠군. 하지만.’
그리고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단단히 미친놈이다.’
***
호아킨 단장님은 웨데릭과 아론까지 데리고 몰래 공작성으로 향했다.
아무도 모르게 지하 감옥에 가두라는 에르안의 명령은 내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어쩔 줄 몰라 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나뿐인 사촌의 배신에 어떻게 할지 망설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승마를 할 줄 몰라서, 그에게 거의 안긴 채로 말을 타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공작님?”
“응? 뭐가?”
“웨데릭 님이…… 공작님을 해 치려고 했잖아요.”
“안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에르안은 평정심을 잃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웨데릭을 아주 아끼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싶었다.
에르안이 뒤에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따뜻할 땐 따뜻하지만 결국엔 냉정한 사람이야.’
나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게도 이렇게 다정하지만, 양녀로 삼겠다는 이사벨 마님의 말에는 완전히 선을 긋지 않았던 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벗어나면 냉담해지는 성향이 분명했다.
[그게 딱 형의 위치였는데 말이 야. 욕심낼 걸 내야지. 왜 주제를 몰라.]
확실히, ‘세르이어스’를 탐내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잔인했다.
“어쩌실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 리체.”
에르안은 내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잔인하거나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건 그래요.”
“알아서 해결할게, 리체. 그래도 고마워. 다 내 생각해서 이렇게 해 준 거니까.”
“그런 셈이죠.”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과자 성분만 제가 잘 밝혀냈어도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됐는데.”
“그래도……”
에르안이 씩 웃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가 날 위해서 이렇게 해 준다는 것 자체가 난 감동이야.”
내가 생각해도 에르안의 입장에 서 나는 대단한 복덩이였다.
어릴 때 돌봐 줘, 건강하게 돌 아올 수 있게 해 줘, 나쁜 생각을 하고 있던 사촌까지 검거해 줘.
“그런데 황태자님은 괜찮으시죠?”
어차피 공격당할 것은 알고 있 었다.
무사히 살아남아 별일 없 이 사냥 대회가 끝나고, 배후는 찾지 못하게 될 것도.
어쨌든 그 일로 시끄러울 때 웨데릭을 잡아내고 싶었다.
그 암살 현장에 우연히 에르안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당연하지.”
에르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식하게 몸을 쓸 줄만 알아 서, 아주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네.”
“생각하지도 말고.”
“네.”
“안부를 묻지도 마.”
“저 황실 의료진 절대 안 가요.”
“그래도 어쨌든.”
“황태자님 측실도 생각 없고요.”
“그런 말이 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불쾌해.”
“성년이 되더라도…… 환절기까 지는 공작성에 있을 거예요.”
내 성년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사냥 대회가 끝난 뒤, 어 영부영 시간이 지나면 곧 내 생일이었다.
“환절기까지?”
“네, 좀 추워질 때도 몸이 괜찮으신가 지켜봐야죠.”
그나마도 페렐르만 자작이 계속 공작성에 붙어 있으면 굳이 내가 필요 없기도 했다.
하지만 성년 이후에 조금 더 공작성에 머물 이유가 있었다.
‘칸시아를 만나야 해.’
분명 칸시아는 조만간 나를 찾 아올 것이다.
건강상 문제가 분명히 생길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수정 구슬을 갖고 오면, 내 부모님을 정말로 찾을 수 있을 거야.’
떠돌이 집시인 칸시아에게 내 거처를 ‘세르이어스 공작성’이라 고 말해 놓았으니, 그때까지는 공작성에 있어야 했다.
“어쨌든 제 거처나 위치는, 뭐 가 되었든 상황을 좀 봐서 결정을 해야죠.”
갑자기 나를 안고 있었던 그의 한쪽 손이 더 꽉 나를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느릿해졌다.
“맞아. 뭐든지 상황을 좀 봐서.”
나는 함께 말을 타는 것도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폭 안겨 있자니 그의 열 기에 몸이 휘감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상황이야,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