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4화
아무도 감시하지 않고, 강박처럼 주어지던 일에서도 벗어나자 드디어 숨을 좀 쉴 것 같았다.
그는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가 새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예전에 케인을 부르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그렇게 새소리를 쉴 새 없이 내면서 시간이 꽤 흘렀다.
드디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웨데릭이 호위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론, 오랜만이군.”
웨데릭이 거드름을 피우며 아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저택에서 조수의 조수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은 들었어.”
아론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나 자신이 노력했는지 웨데릭은 모를 것이다.
그만큼 이제 성과를 올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의 오른팔 이 되는 것은 그의 신분 회복을 위한 첫 단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케인마저도 들켰다지.”
“예.”
아론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멍청한 놈, 계속 잘 있다가 결정적일 때 들키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가족들이 다 우리 손에 있으니 자백은 못 했을 거다.”
웨데릭이 씩 웃었다.
“평민들이야 그런 식으로 대하면 벌벌 떨면서 자기 선에서 끝내거든.”
아론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의 시체 역시 공작성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데릭 과 이시더 남작, 자신까지 모두 멀쩡한 것은 케인이 입을 다물고 죽었다는 뜻이었다.
“공작성의 분위기는 어때?”
아론은 사실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온실 아니면 그 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이 웨데릭을 기쁘게 할지는 알고 있었다.
“좋지 않습니다. 에르안 님은 그다지 덕이 없으셔서 공작성을 휘어잡지 못하고 계세요.”
“성격이 더러워진 건 맞는 얘기더군.”
웨데릭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형의 여자를 탐내는 못 된 버릇까지 생기고.”
“혹시 베티아 영애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연회 때 대놓고 첫 춤을 신청 하던데.”
“……전형적인 열등감이죠.”
아론이 재빨리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웨데릭 님이 가진 모든 것이 부러웠나 봅니다.”
“그럴 수 있지.”
웨데릭이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성의 주인은 내가 더 어울리고 말이야.”
“그런데……”
아론은 웨데릭의 뒤를 살피며 물었다.
“이시더 남작님은 안 오셨습니까?”
“고모님이 아프다더군. 에르안이 부탁해서 지금 세르이어스 영지로 가셨어.”
“설마?”
“아냐.”
웨데릭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에는 더 붙일 인원이 없어. 정말로 어디가 좀 안 좋은가 보지. 원래 몸이 약하신지라.”
“그러시군요. 그럼 혹시 이번 기회에……”
“아버지는 너무 생각이 많으셔.”
소심하여 극도로 몸을 사리는 이시더 남작과는 달리, 웨데릭은 아직 젊어서 패기가 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지나친 염려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지령을 받으면 모를까 직접 무슨 일을 하실 분은 아니지. 하지만 이번에 황태자 암살에 성공하 면……”
웨데릭이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일이 좀 더 빠르고 쉬워질 수도 있고.”
“더 쉬운 방법을 제가 찾았습니다.”
아론은 씩 웃으며 그에게 다가 갔다.
“주치의의 조수의 조수로 있다 보니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있더군요.”
“무슨 소리야?”
“다들 숨기고 있지만, 에르안 공작님은 지금 지병을 앓고 있습 니다.”
웨데릭의 눈이 반짝였다.
아론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 을 짚었다.
“이런 정보를 알아 오라고 저를 집어넣으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웨데릭이 흥분하며 대답했다.
“평민 셋을 십몇 년간 집어넣어도 성과가 없었는데, 역시 너를 투입하니 몇 달도 안 되어 이런 성과를 내는구나.”
“리체 에스텔이 제게 지금까지 계속 약초 손질을 시켰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와서요.”
아론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베이가, 키리치, 비기다풀이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세 풀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가는 처방은 단 하나뿐입니 다.”
아론은 의술에 별달리 홍미가 없었다.
다만 리체의 조수로 들어가야 하니 남들이 하는 만큼만 얕고 넓게 공부해 간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충 용어나 원리는 다 알고 있어서 책 정도는 읽으면 모두 이해가 가능했 다.
자신이 500번이나 베껴 쓴 「하체 특수 질환의 이해」에서 중요 하게 다루고 있는 질병을 모를 리 없었다.
“로이카 증후군입니다.”
“그게 뭐지?”
“왼쪽 무릎 위에 나타나는 질환 으로, 앞에 말씀드린 세 가지 풀 로 만든 환을 아주 많이 먹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합니다.”
“홈, 지금 에르안은 사냥 대회 1 둥이야.”
웨데릭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다들…… 세르이어스 선대 공작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며 난리들이지. 어릴 때의 그 열등감에 찌든 애송이 모습은 하나도 모르고 말이야.”
여기저기서 에르안에 대해 수군 대는 모습을 보면 웨데릭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랫동안 세르이어스 공작 위에 대한 열망을 가져서 그런지, 이제는 에르안이 자신의 것 을 빼앗은 것처럼 느껴졌다.
에르안과 연회에서 첫 춤을 춘 이후로 은근히 그에게 거리를 두 는 베티아를 생각하면 더 이가 갈렸다.
“그 환만 먹으면 로이카 중후군은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어요.”
아론은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왼쪽 무릎에 쇠가 닿기만 하면 그대로 즉사해 버리죠. 남부 지방의 풍토병이라 제국에서는 희귀한 질병입니다.”
“그래? 이르비아에서 걸려 왔나보군.”
웨데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 그에게는 활이 있었다.
그는 검술에는 약해도 활은 꽤 잘 쏘았다.
“잘 보시면, 에르안 공작님은 다리만큼은 나무로 덧댄 갑옷으로 둘러싸고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과 확실히 다르지요.”
“……그랬던 것 같군. 그래. 상체는 거의 보호구가 없는데, 하체는 분명 아니었어.”
“하지만 여름 갑옷의 특성상, 다리를 구부릴 때에 무릎 아래편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때 단검을 찌르거나 화살을 명중시키 기만하면……”
아론이 씩 웃었다.
“그럼 즉사인 겁니다.”
사냥 대회인 만큼 둘러댈 말은 많았다.
호위 기사가 토끼를 쏘려고 했는데 잘못 스쳤다, 급소가 아니어서 위험한 줄도 몰랐다 우기면 되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죽을 만큼의 부상을 안 입히면 되는 것이니까.
“이 사실은 공작성의 그 누구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긴, 리체 에스텔이 그런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을 퍼트릴 성격은 아니지요. 저도 조수의 조수라서 알아낸 겁 니다.”
“그렇군.”
웨데릭은 찬찬히 생각에 잠겼다.
만일 이시더 남작이 이 말을 들 었다면 ‘그분’이 명령하지 않은 단독 행동은 위험하다며 무조건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웨데릭은 그런 식으로 지나치게 신중하게 행동한 나머지 지금까지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냥 의심을 받든 말든 어릴 때 독살해 버렸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5년 만에 이토록 건장한 청년이 되어 존재감을 뽐내고 다닐 줄이야.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시간을 끄는 동안 너무나 성장해 버린 에르안을 떠올리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신의 손엔 무기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외진 곳에 흩어졌다.
에르안은 번거롭다며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니지조차 않았 다.
그를 이길 자신은 없지만, 방심하고 있는 사촌 동생의 왼쪽 무릎에 화살 정도는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끝내죠, 웨데릭 님.”
아론이 부채질을 하듯 속삭였다.
“얼른 공작성의 주인이 되신 웨데릭 님을 뵙고 싶습니다. 대신 리체 에스텔의 처분은 제게 맡겨 주세요.”
“왜?”
“시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버르장머리 없는 애라 제가 직접 죽이고 싶습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웨데릭이 결심했다는 둣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 괜히 질질 끌 필요가 없어. 어차피 아버지의 옛 계획은 실패했고, 이제는 시간이 없으니 까 말이야.”
웨데릭은 에르안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에르안이 동쪽 숲의 냇가로 갔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사실은 지금 모두가 웨데릭과 에르안에게 쏟올 정신이 없었다.
황태자인 제이드가 암살 습격을 받은 것이다.
물론 제이드는 에르안과 함께 그 많은 암살자들을 다 죽이고 부상 하나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손수건이 입에 가득 박힌 자객 둘을 부관에게 던져 주며 심문하라고 해맑게 명령했다.
“난 머리 쓰는 건 싫어서. 알아 서 배후 좀 알려 줘.”
제이드는 순진하게 말했다.
“이렇게 다 죽였으면, 반란을 일으켜 봤자 자기 손해라는 걸 알 텐데…. 세트이어스 공작은 왜 꼭 배후를 알아내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제이드는 태평한 목소리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상황을 끝까지 몰아가지 않고 자비롭게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주는 게 성군의 태도겠지?”
태연한 사람은 제이드뿐이고, 사냥 대회의 모든 사람들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에르안에 대해 묻자 제이드는 에르안이 시킨대로 대답했다.
“아…… 희대의 충신 세르이어스 공작? 무릎 아프다고 리체 양에게 갔는데.”
물론 이런 초유의 사태에 에르 안까지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여러모로 좋은 기회였다.
웨데릭은 에르안이 냇가에서 혼자 왼쪽 무릎의 보호대를 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냥 대회 내내 호위 기사도 데리고 다니지 않는 에르안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웨데릭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의 약점이 드러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과연 그의 왼쪽 무릎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에르안이 돌아보았다.
“아.”
리체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왜 혼자 있어? 리체에게 갔다고 들었는데.”
“리체는 약을 좀 가지러.”
에르안의 태연한 말에 웨데릭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가 데리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들었다.
그리고 웨데릭 역시 직접 활시위를 당겼다.
에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지? 하지 마, 나 지금 무릎이 좋지 않……”
에르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살이 에르안의 왼쪽 무릎을 향 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