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 3화
사냥을 할 때 들리는 소리가 아 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굉장히 외진 절벽을 곁에 둔 변방이었다.
에르안이 한숨을 쉬고 말고삐를 잡은 채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냥 대회에서 반란군들이 제이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울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래서 몰래 제이드 주변에서 머물 곤 했다.
그가 지금까지 1등을 지키고 있는 까닭은 그 김에 제이드의 사냥감들을 먼저 죽인 탓이었다.
굳이 제이드를 지키기 위해서라 기보다는 반란군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싶어서 그는 조용히 혼자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제이드가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는 믿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반란군이란 리체를 짜증 나게 만든 이들의 뒤 세력이라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습격이 일 어난 것 같았다.
빠르게 사라지는 에르안의 뒷모 습을 보며, 아르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말을 몰았다.
에르안 말대로 칼부림이 나고 있었다.
괜히 움직였다가 목격자 취급을 당하여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자존심 상하게 숨어있느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속력으로 달려간 습격 현장의 중심에는 은발 머리의 한 청년이 있었다.
‘황태자님?’
아르가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제이드를 중심으로 수없이 많은 암살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를 지킬 수 있는 인원이 아무도 없었다.
‘미쳤군. 황태자가 호위도 없이 이런 외진 곳에 혼자서…….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는 말은 예전부터 많았지만.’
아르가가 재빨리 달려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려고 할 때, 에르안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헛짓거리 하시다가 괜히 잡히 지 말고 여기 얌전히 서 있으십시오.”
“허, 헛짓거리? 하지만 황태자 님께서……”
“둘이면 충분하고도 넘치니까 호들갑 그만 떨고.”
그 뒤로 벌어진 일들은 아르가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호위가 없는 것은 에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르안은 망 설이지 않고 검을 빼든 채 암살자들의 무리로 뛰어들었다.
아르가는 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인 채 그 학살을 바라보았다.
에르안의 말은 허풍이 아니어서, 황태자와 에르안 둘만으로도 몇십 명의 암살자들이 순식간에 정리되고 있었다.
에르안이 깔끔하게 검에 피를 묻히는 것을 보며, 아르가는 다시 한번 충격에 빠져야만 했다.
‘마치 젊은 시절의 케일런을 보는 것 같군. 아니…… 그것보다 더한데.’
적을 없애는 속도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긴장조차 되지 않았다.
“세르이어스 공작!”
제이드가 한꺼번에 세 명씩 죽이며 환하게 웃었다.
“굉장한 충신이었군!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해.”
“제가 호위 정도는 데리고 다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호위 없이 다니는 것은 에르안도 마찬가지였다.
에르안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제이드는 계속해서 해맑았다.
“호위 없어도 이 정도는 널널한데! 하등 쓸데없는 도움이었지만 어쨌든 고마워.”
“눈깔 한쪽 또 발려서 리체에게 들이댈까 봐 온 겁니다.”
“에이, 여긴 풍토병이 없는걸.”
“그리고 반란군 뿌리를 뽑고 싶어서.”
“내 세르이어스 공작의 중심을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지. 감동 적이야.”
“충심은 맞는데, 그 대상이 황 태자님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에르안의 태도는 대놓고 불경스러웠다.
게다가 제이드는 공격을 받고 있는 당사자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태도였다.
‘뭐야, 황태자님은 이 상황에서 왜 또 저렇게 명랑하신데?’
아르가는 이 끔찍한 조합에 혼 자 이마를 짚었다.
“공작의 말이 맞았어! 날 노리는 반란의 무리가 있었다니.”
제이드가 마지막으로 덤비는 암살자에게 검을 꽂아 넣으며 히죽 웃었다.
“간도 큰걸.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머리는 검을 쓰실 때 중심을 잡으려고 달고 다니시는 겁니까?”
“공작, 생각보다 멍청하군. 머리 가 있어야 적을 보지. 눈이 달려 있잖아.”
“그게 머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까?”
에르안이 어이가 없다는 둣 차 갑게 빈정거렸다.
그는 이미 두 명의 목덜미를 질 질 끌면서 제이드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죄 죽여 버리면 배후는 어찌 추적하고요?”
“다음에 또 오면, 또 죽이면 되지.”
“이딴 식이니까 해적 소탕에 5 년이 걸리지…… 젠장. 그때도 그냥 쫓아가서 보이면 죽이는 방식이었습니까? 별다른 작전도 없이?”
“어떻게 알았어?”
에르안은 벌벌 떠는 암살자 둘을 내던지고, 그중 하나의 입을 벌려 검의 평평한 면으로 혀를 꾹 눌렀다.
“배후.”
내리깐 눈에 감정이라고는 실리지 않았다.
붉은 피가 줄줄 흐르 는 땅 가운데에서 그는 마치 죽 음의 신 같았다.
“밝히면 살려 주고, 밝히지 않으면 네 가족까지 추적해서 다 죽이고.”
아르가는 조심스럽게 나무 뒤에 서 그를 지켜보았다.
“네가 입을 다물어도 저 다른 놈이 불면…… 네가 불었다고 여기저기 다 알릴 거야. 그럼 네 주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네가 더 잘 알겠지.”
둘을 잡아 놓고 서로 배신을 종 용하는 악랄한 방법이었다.
자객 하나의 허리를 꾹 밟고 있 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르가는 과거를 떠올렸다.
‘케일런을 많이 닮았군. 업무 능력까지 비슷하다면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을 수도 있겠어. 저 고약한 성질을 열셋까지 누르고 살다니.’
선대 세르이어스 공작, 케일런은 확실히 여러모로 훌륭한 지도자였다.
인간미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딱 하나, 자신이 완벽했기에 남들의 홈도 참지 못해 좀 성질이 더럽긴 했다.
‘근데 황태자에게 하는 꼴 보니, 제 아비보다 더 미친 놈 같은데.’
그때였다.
에르안의 왼쪽 손에 자리 잡고있던 반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자객을 죽일 둣이 협박하고 있던 그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그는 급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두 자객의 입에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지 말라는 재갈의 역할을 하겠지만 지나치게 급하고 투박한 손짓이었다.
그러고는 목덜미를 잡아 차례로 멍하니 있던 황태자에게 거의 던져 버렸다.
“직접 족쳐서 끝까지 알아내려 고 했는데 지금 리체가 불러서. 제가 우선순위가 좀 확실합니 다.”
“리, 리체 양이?”
“머리 써서 스스로 알아낼 능력이 없으면, 이대로 데려가서 부관에게 넘기시죠. 여하튼 그냥 죽여서 일을 최악의 능률로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가 흑마에 훌쩍 올라랐다.
“누가 저에 대해서 묻거든 무릎이 아파서 리체에게 갔다고 하고.”
그리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르가 역시 주변을 획 둘러보고 말을 몰았다.
분명히 그가 리체라고 말했다.
어쨌든 아르가가 만나야 할 사 람도 리체였기에, 급히 에르안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아론은 신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대체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인 지 몰랐다.
어차피 내일은 폐회식이므로 오 늘이 실질적으로 사냥 대회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손질해야 할 약초가 없다며 디엘이 자유를 주었다.
“뭐, 구경이라도 다니세요. 은근 볼 것 많아요. 화려하고. 저녁때 까지만 돌아오세요.”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웨데릭 님이 공작성을 차지하기만 하시면.’
그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둘 다 내가 직접 끝까지 괴롭히다가 고통스럽게 죽인다.’
그 ‘둘’은 디엘 몰레킨과 리체 에스텔이었다.
리체 에스텔, 그 마녀 같은 여자는 성취감 없고 지루한 일만 미친둣이 시켰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철저하게 자신을 감시하는 얄미운 디엘 몰레킨이 있었다.
계속 갇혀 지냈던 그의 마음은 타들어 갈 것 같이 조급했다.
다시 공작성에 들어가 그 끔찍한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약초를 손질하고 두꺼운 책의 내용들을 몇 번이고 베껴 쓴 기억은 끔찍했다.
물론 그래서 도움이 된 것도 있었다.
‘얼른, 최대한 얼른 웨데릭 님이 세르이어스를 차지해야……’
보통 사람들과 소통까지 거의 못한 그의 눈에는 광기마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