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2화
내게 배정된 환자의 이름은 에시언 레이지로, 프릴리트 후작가 영식의 호위 기사라고 했다.
내가 내린 처방은 상당히 단순 했다.
물을 많이 마시고 이리테 시약을 이용해 땀과 소변으로 최 대한 독을 배출해 내는 것이었다.
즉 수시로 물을 마시게 하고, 때 되면 약 먹인 뒤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니까 디엘, 네가 잘 봐 주 면 되는 거야.”
나는 싱긋 웃으며 디엘에게 수건을 건넸다.
“슬프게도 내일은 내가 좀 바 빠.”
디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수건을 받아 열심히 에시언의 땀 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내일은 정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페렐르만 자작님은 근데 안 오 시나?”
“아마 시간을 계산하면 내일쯤 도착하실 둣한데.”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친자 검사 시약을 조금 비커에 덜어내며 대 답했다.
대충만 원리를 설명해도 그는 알아들을 것이다.
“내일 자작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을까 모르겠네. 네가 잘 챙겨 드려.”
“나도 바빠. 환자도 봐야 한다고. 아론도 감시해야 하고.”
디엘이 툴툴거리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내일은 감시 안 해도 돼.”
“응?”
“풀어 줄 거거든. 아론도 이제 자유를 즐길 때가 됐지.”
아마 좋아 죽을 것이다.
공작성에 온 이후, 그는 계속 갇혀서 단순 업무만 반복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개방된 장소에서 자유를 얻는다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으음, 리체. 이번에는 나만 네 계획에 낀 게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디엘은 이번에 낀 게 아니고, 뒤처리를 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 반지, 누구랑 나눠 꼈어?”
내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를 보며 디엘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예전에 이사벨 마님을 해치려던 하녀를 잡아낼 때, 디엘과 나눠낀 일회용 마법 소통 반지였다.
“나눠 낀 사람은 공작님이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계속 나랑 같이 다닐 사람은 세이린 경이야. 큰 그림을 좀 그렸거든, 이번에.”
“세, 세이린 경?”
“너도 따라올래?”
“아니.”
디엘은 즉시 대답했다.
세이린 경이 그에게 단검을 겨눈 것이 상당히 충격인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페렐르만 자작님이 상대하기에 더 나아서. 적어도 목숨의 위협은 안 느끼거든.”
어쨌든 모두가 역할에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아주 오 랜만에 꿈을 꾸었다.
디엘이 페렐르만 자작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곧 페렐르만 자작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가 나오는 꿈이었다.
[그렇게 사람 바뀐 척, 요망한 표정 하지 마십시오. 안 넘어갑니다. 절대 허락 못 해요. ]
그의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키가 큰 남자는…….
[이미 제게 진실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르안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고 마주 한 순간부터, 공작님은 제게 후회할 일들만 차곡차곡 적립하신 것 같군요. ]
에르안이 뭐라고 말하는지,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겉과 속이 다른 자의 최후겠죠. 아주 인과응보에 권선징악입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코웃음을 치며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절대 허락 못 한다는 게 뭘 까…….’
새벽에 잠시 깼을 때, 나는 꿈을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금방 털어 버렸다.
에르안과 페렐르만 자작의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이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 문이다.
페렐르만 자작이 누군가와 사이 가 좋을 리 없었고, 그건 성인이 된 에르안과도 마찬가지일 것이 다.
그거야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마음 편히 잠이 들었다.
***
사냥 대회 6일차가 되는 날이었다.
빠르게 출발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거의 마지막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더 늦으면 해가 져 버릴 것 같아, 아르가는 하인들에게 마차를 이끌고 천천히 오라고 지시했다.
북부에서 또 의학 서적과 희귀한 풀 등을 잔뜩 싣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말을 타고 산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세이린이 사냥 대회에서 만나자 고 한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시오니가 죽고 나서, 원래부터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세이린은 더더욱 이런 행사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알아보니 리체와 에르안 역시 사냥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했다.
‘잘 컸나?’
그가 본 에르안의 마지막 모습 은 아직도 열셋이었다.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 물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린 날의 에르안이 떠올라 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살려 내는 것이 전부였던 절친한 친구의 연약한 아들.
불안해 보이는 눈매에서 애정 결핍을 읽었지만 딱히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어딘가에서 어떻게 지낼지 모르는 그의 딸이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빠르게 사냥 대회의 본부로 달려가 리체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멈춰선 것은 갑작스레 목에 검이 드리워 졌을 때였다.
“아.”
낮은 목소리가 들리고 검은 즉 시 내려졌다.
“페렐르만 자작이시군요.”
아르가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누군가 이렇게 갑자기 다가와 검을 겨늘 줄도 몰랐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거두는 것도 속도 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여기서.”
아르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 다.
순간적으로 그가 속으로 중얼거린 이름은 ‘케일런 다렌 세르이어스?’였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횐 피부, 단단한 몸에 넘쳐흐르 는 서늘한 기운까지 선대 공작인 그의 옛 친구를 똑같이 닮아 있었다.
그러나 딱 하나, 길게 뻗은 눈매만큼은 누가 봐도 이사벨이었 다.
“……에르안 님?”
에르안은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뒤 혀를 찼다.
“얌전히 정해진 길로 오시지, 왜 제 몸 하나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주제넘으시게 산길로 오십니까?”
어딘가 주눅 들어 있던 어린 날의 어조와는 완전히 달랐다.
건방지면서도 오만한 말투에 아 르가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 했다.
“주제넘은 제 덕분에 목숨을 간신히 건진 옛날은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이르비아에서 몸만 크고 머리는 퇴화되셨습니까?”
그 역시 독설로는 어디 가서 지 지 않았기에, 날카롭게 대꾸했다.
“둥가 교환의 법칙이 이렇게 잘 성립하시는 분으로 크실 줄이야.”
“페렐르만 자작 또한 말로 둥가 교환이 참 잘 되시는 분이죠.”
에르안이 못마땅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흑마 위에서 아르가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소년은 5년 동안 아르가보 다도 키가 커져 있었다.
“리체 에스텔을 데려와 너무나 내 마음에 든다 했더니……”
그의 눈이 형형했다.
“……대부라니, 나 참.”
아르가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5년 만에 보는 아버지 친구이자 제 주치의에게 하는 말이 쌀쌀맞게 이를 데 없었다.
“제가 지금 살려 드릴 테니까 꼭 이 은혜를 기억하시고.”
에르안은 번거롭다는 둣 검은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나중에 리체의 대부랍시고 저를 성가시게 하지 마시길 바람니 다.”
“누가 누굴 살린단 말입니까?”
아르가가 코웃음을 치며 말고삐 를 잡았다.
의사인 그는 당연히 검술이나 사냥에 능하지 못했다.
그래도 정해진 길로 잘 달려가 무사히 본부에 도착할 능력은 된다고 생 각했다.
에르안의 일방적인 무시에 기분이 더 상해 버린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됐고, 저는 제 갈 길 가겠으니 에르안 님은 곰을 잡던 늑대를 잡던 맘대로 하십시오.”
“뭘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고 얌전히 여기 숨어 계세요. 곧 칼부림 날 것 같으니까 거기 휘말려 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고집스러운 아르가의 표정을 본 에르안이 살짝 한숨을 쉬고, 짜증난다는 둣이 중얼거렸다.
“숨어 있기 싫으면 따라오든가. 성가시긴 하겠지만 자작님 하나 정도는 더 살릴 수 있으니까.”
아르가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받아치려고 할 때였다.
저 멀리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