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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81화 (8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1 화

어차피 모든 계획이 사냥 대회 의 끝 일정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 3일간은 딱히 큰일 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아론은 작은 막사에 갇힌 채로 계속 약초 손질만 하도록 했다.

당연히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이 완전히 막힌 채였다.

에르안이 어떻게 잘 말했는지,  이시더 남작도 세르이어스 성으로 향했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사냥 대회 엔 웨데릭만 남은 셈이었다.

두 부자를 떨어트린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그 사이에 물론 내게도 아주 자 잘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세이린 경이 도착해서 내 곁에 붙어 있기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이었다.

“리체!”

세이린 경은 나를 보자마자 꼭 안아주더니, 작은 단검을 하나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이건 뭔가요?”

“워낙에 남자들이 많잖아. 혹시나 얼굴을 밝히는 네게 어떤 미 끈한 놈이 수작을 걸거든……”

그녀는 섬뜩한 표정을 지어 보 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막사에 있던 디엘을 끌고 와서 단검으로 그의 하체 중심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일단 이렇게 찌른 뒤 나를 불러.”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디엘의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벙찐 우리의 앞에서 세이린 경이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어디 묻는 건 내가 할 테니.”

디엘은 충격받은 눈으로 조용히 막사를 떠났다.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일은 귀족 영애들이 비밀리에 나를 부르 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너무 많 아서 세기도 귀찮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3일간 에르안이 가장 많은 짐승을 잡으면서 급격 히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황태자가 압도적인 우승 을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물론 몇 마리 차이가 나지는 않 았지만 어쨌든 에르안이 지금까 지는 1둥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안 좋았고, 5 년 동안 남부로 요양 가 있을 정 도로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문 이 쑥 들어갔다.

“그러니까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신 거지?”

귀족 영애들은 남몰래 나를 불러서 에르안에 대해 묻곤 했다.

나는 그녀들이 주는 맛있는 음식과 차, 가끔은 보답으로 주는 보석까지 챙겨 가며 진실을 말해 주곤 했다.

“네, 지나치게 건강하십니다. 계절이 바뀌는 가을에 최종 사후 검사 한 번만 하시면 돼요. 아마 별 이상 없으실 거예요.”

어디가 많이 아프다면 보안을 위해 숨기겠지만 에르안이 너무 건강한 건 굳이 비밀로 할 필요 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 아이를 낳는, 그런 기능에도…… 확실히 문제없는 거,  맞아?”

“네, 전혀 이상 없으신데요. 아마 아주 훌륭하실 거예요.”

거기까지 다 확인하고 나서야 귀족 영애들은 배시시 웃으며 질 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런저런 대화가 잘 통하다가, 늘 비슷한 질문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곤 했다.

“성격은 어떠신 편이야?”

“음,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상냥하신데 자신의 다 큰 몸을 생각 안 하시고 아직도 어린애 같이 굴 때가 계세요.”

내가 솔직히 말해도, 영애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음…… 다정? 상냥? 어린애?”

“천진난만하게 잘 웃으시는 편 이고……”

“저기, 얘… 아무리 모시고 있는 주인이라고 해도 무조건 좋 게 말할 필요는 없어.”

“네?”

“아무도 사냥 대회에 있었던 4 일간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걸? 심지어 목표한 짐승을 잡으실 때도 섬뜩한 얼굴이야.”

나는 이상하다는 둣이 반문했다.

“일을 못 하는 사용인이 옆에 있었나요? 능력 안 되는 사용인들에게는 정말 엄격하세요. 실수 를 용납하지 않는데, 또 완벽한 사람한테는 너그러우세요.”

“.............”

“아, 분홍색 머리를 개인적인 취향으로 싫어하시더라고요. 주 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기분 나빠하시는 것 같았어요. 은근 아직도 아이 같으셔서.”

나는 아는 대로 다 솔직히 대답 해 주고 선물까지 받아오는데도,  결국 영애들과의 대화는 뭔가 찜찜하게 끝났다.

절대로 그런 성격이 아닌 것 같다며, 말을 걸어도 싹 무시당한다는 열변을 토하는 영애도 있었다.

‘고작 나흘 본 영애들이 에르안 에 대해 뭘 안다고……’

싸늘하다, 섬뜩하다, 눈빛이 무 섭다. 이런 얘기를 내 앞에서 털어놓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영애들 사이에서 에르안의 인기는 높아 지기만 했다.

그러니까 결국 처음엔 생김새때문에 무서워 보여도, 계속 보다 보면 그 다정함올 알 수 있다 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홍색 머리를 가진 영애들이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는 소문까지도 들려왔다.

어찌 되었건 이번 사냥 대회 이후에 이사밸 마님께 더 많은 혼담 서신이 쌓이게 생긴 건 불 보둣 뻔했다.

짐승 시체를 아무렇게나 툭 던지고 피를 씻어 내기 위해 간이 욕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내가 봐도 멋있긴 했다.

짐승들을 마치 짐승처럼 잡던 에르안은 정작 그런 일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매일 저녁 혹시라도 상처를 입거나 독벌레에 쏘인 건 아닌지 봐 주었지만 조금의 상처도 보이 지 않았다.

내가 올 시간이면 항상 그는 막 씻고 나와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쾌청한 특유의 체향이 막사 전 체에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마치 그의 영역에 완전 히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윤기가 나는 그의 몸을 꼼꼼히 살펴 줄 때마다 나는 수많은 귀 족 영애들이 나를 부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냥에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승부욕이 있을 뿐이야.”

에르안은 팔짱을 낀 채 툴툴거렸다.

“뇌가 청정한 황태자가 혹시나 1등을 해서 이 영광을 리체 양에게 돌립니다, 뭐 이딴 짜증나는 말을 할까 봐.”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긴 했다.

황태자는 아직도 가끔 나와 마 주치면 윙크를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귀엽다고 하면 귀여울 수도 있는데, 지나친 근육질의 남자가 그런 눈짓을 하니 순간적으로 몸이 굳곤 했다.

“공작님은 1등 하시면 뭐라고 소감을 말씀하실 건데요?”

“이 모든 영광을 리체 에스텔에게....... ”

내가 알기로 3둥과의 격차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누가 이겨도 내 이름이 언급될 것 같았다.

“제가 두 분의 건강에 엄청난 공로를 쌓은 건 사실이지만 몹시 부담스럽군요.”

“그나저나.”

에르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대결이라는 건 성가시지 않아? 괜히 귀찮게 다른 부상자들만 계속 보고.”

“네, 괜찮아요.”

나는 매일 저녁, 황실 의료 연구진에서 내보낸 나탈리와 부상자를 함께 보곤 했다.

사람들 앞에서 부상자를 보며 원인과 치료법을 처방하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다지 심각한 중세 의 환자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의 처방은 엇갈리지 않았고,  계속 똑같은 진단만 나와서 승부는 계속해서 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 흥미를 보이며 와글와글 구경 오던 사람들도, 흐름이 재미없게 이어지자 점점 더 관심을 잃기 시작했다.

“사실 사람이 안 다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나는 진심으로 심각한 상황이 생겨서 내 실력을 보이는 것보다 는 대결이 흐지부지 되더라도 다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더 낫 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은 바로 다음 날 저녁 깨지고 말았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사냥 대회에서 심각한 상태의 부상자가 나온 것은 개최 후 정확히 5일째 되던 오후였다.

기사들이 허겁지겁 업고 온 두 명의 부상자는 똑같은 중상을 보 이고 있었다.

“비파데 늪에 실수로 빠졌는데,  그 이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 습니다.”

귀족 영식들은 아니고, 그들을 호위하던 기사단 중 두 명이라고 했다.

둘 다 의식이 없었고 끊임없이 입 밖으로 피를 줄줄 홀리고 있 었다.

계속해서 저 상태로 피를 홀리고 있었다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긴급 수혈이 필요하다고 소리치려는 찰나, 하엘던 황자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팔짱을 꼈다.

“똑같은 중상의 두 부상자 라……. 나탈리, 어떻게 생각하지?”

나탈리는 우아하게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예, 지금 진료해 보겠습니다.”

지금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데, 그녀의 판단을 기다리며 나는 초 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다행히 나탈리 역시 긴급 수혈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군의관들이 급히 두 부상자들의 혈액형을 확인한 뒤 마법 아이템을 써서 알맞은 피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우리는 의식이 없는 두 환자를 살펴보았다.

둘 다 교차해서 확인해 본 뒤,  우리는 두 환자가 정확히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했다. 그러나 진단에서 의견 이 갈렸다.

“창백한 안색, 끊임없이 피를 쏟아 내는 중상, 호흡 불안, 풀어 진 동공 등으로 보아 혈액의 성질이 바뀌는 토마소 중후군으로 보입니다.”

나탈리는 차분하게 말했다.

“일시적 혈액 중화를 위한 히리 카 마력 치료와 데프리히아 꽃을 기반으로 한 케시오 시약을 처방 하면 이틀 안에 의식이 돌아오고 회복될 것입니다.”

하엘던 황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의견은 조금 달랐다.

“여름철의 늪에 서식하는 할리피 두꺼비의 독에 중독된 것 같 습니다. 토마소 중후군이라기에는 손발이 지나치게 차고 마력의 변화가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의견이 갈리는 케이스가 나온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 정적이 흘렀다.

어느새 내 곁에 선 케인즈 경이 팔짱을 끼고 신중하게 두 부상자 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력 치료는 최대한 자제하고, 이리테 시약으로 최대한 독을 배출시켜야 합니다. 최대한 소극적 인 처방이 필요하며, 의식은 곧 돌아오겠지만 완전히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 말은..........”

하엘던 황자가 천천히 나를 바 라보며 말했다.

“이틀 안에는 완벽히 회복시킬 자신이 없다?”

“네, 그런 병은 아닙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뭐, 필요하다면 다른 처방으로 일시적인 효과를 낼 수는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구적인 장기 훼손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나탈리는 이틀 안에 회복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토마소 증후군이라면 그렇겠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단히 맞서는데, 눈치 없이 제이드 황태자의 목소리가 저 뒤에서 들렸다.

“리체 양, 나는 리체 양을 응원 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 예를 표하고 대답했다.

“응원을 해서 바뀌고 말고 할 결과가 아니지만…. 어쨌든 감 사합니다.”

하엘던 황자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집중하라는 뜻으로 박수를 한 번 쳤다.

“똑같은 중세를 가진 두 환자를 두고, 드디어 이 둘의 의견이 갈렸군요. 저희 연구진에서는 이틀 이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와글와글하게 모인 사람들 이 모두 다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틀 후면 사냥 대회의 폐막식 이지요? 지금 이 두 명에게 한 명씩 환자를 배정하고, 그때 이 환자들의 상태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탈리는 나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둣이 웃어 보였다.

“이틀 뒤에 완전히 회복시킬 자신이 없다고 네 입으로 말했어. 난 할 수 있다고 했고.”

나는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두꺼비과의 독은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다뤄야 했다.

빠 른 치료를 위해 무리하면 장기적으로 안 좋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환자가 완벽히 나았다면 당연히 내가 이기는 거겠지.”

“영애가 처방하신 히리카 마력 치료와 케시오 시약으로 환자가 나았다면요.”

내가 전혀 물러날 생각 없이 대 답하자, 하엘던 황자는 고개를 치켜들며 대중들 앞에 선언했다.

“폐회식 때, 아주 즐거운 구경을 할 수 있게 되겠군요.”

내 생각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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