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80화
에르안을 비롯한 기사들과 다른 귀족들은 사냥을 하러 숲속으로 떠났다.
나는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티 타임을 가질 필요도 없고, 사냥 에 취미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막사에 남았다.
아론은 약초 손질을 빌미로 좁은 막사에 가둬 놓고, 디엘은 나 와 함께 내 막사를 정돈하고 있었다.
아직도 하엘던 황자와의 신경전 을 떠올리는지,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물론 네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 지 않지만……”
디엘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엘던 황자님이 황실 의료 연구진을 지게 만들 것 같지도 않고.”
정작 남들 앞에 나서는 사람은 난데, 디엘이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네 조건이 페렐르만 자작님께 사과하는 거라면 더……. 대체 왜 그런 조건을 건 거야?”
“잘못 얘기한 걸 정정하라고 하 는 게 어디가 어때서.”
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당연히 딸을 찾느라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진중한 연구 실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페렐르 만 자작의 의학 실력은 확실히 인정하는 바였다.
뒤에서 실력이 없어서 도망갔다 느니 하는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니 었다.
“내가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욕하는 건 못 참아. 어쨌든 내 대부님이라고.”
“하지만……”
디엘이 짐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건 나도 들은 건데, 하엘던 황자님과 페렐르만 자작님은 의료 연구진에서 함께할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으셨대.”
“글쎄…… 페렐르만 자작님은 그때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셨고 외골수적인 면이 있어서 남의 말 을 잘 듣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황자님이라고 해도 틀렸으면 틀렸다고 대놓고 말했을걸.”
“의학에서 틀린 건 틀린 거야. 당연한 것 아냐?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그래도 밉보이기에 좋지. 게다가 결국에는 자작님이 다 맞았을 테니까 더욱 더.”
“그럼 더 잘됐네.”
나는 팔짱을 끼며 눈을 깜빡였다.
“페렐르만 자작님이 여기 오신다는데, 정식으로 사과받으실 기회가 되겠어.”
“페렐르만 자작님이 오신다고?”
“ 응”
“북부에 계시잖아. 돌아오시려면 멀었어.”
“내 신변에 이상이 있다고 급히 돌아오신다며 페렐르만 자작저에 편지를 보내셨던데.”
“네 신변? 무슨 이상?”
“글쎄.”
“설마 저번에 있었던 그 친부모 사기 사건?”
나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다……. 서신이 도착한 시간이랑, 거기서 바로 출발하면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면 그쯤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디엘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황가와 얽히는 것이 무서운 듯했다.
자기 혼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 같더니, 결국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뭐, 세르이어스 공작가가 뒤에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그래?”
“선대 세르이어스 공작님이 돌 아가시면서 거의 잠적 상태였지만, 그래도 가장 크고 부유한 영지인 데다가 지금 공작님은 여기 저기서 주목받고 계시고……. 잠 깐, 리체.”
디엘은 다시 내 짐을 정리하다
가 병에 들어 있는 시약을 들어 보였다.
“이거, 그때 그…… 용의 발톱 들어간 친자 검사 시약 아니야?”
“아, 옹. 혈액 검사인데, 이걸 쓰면 마력 검사는 안 해도 되거든 ”
“그러면 시간이 확 줄기는 하겠다.”
“만일 서로의 피가 같은 색깔로 반응한다면, 혈연관계일 확률이 70% 이상이라고 봐야 해.”
나는 무심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용의 발톱이 들어가서 상용화하기엔 수익률이 좋지 않아. 페렐르만 상단에서 상품화하기는 힘들 거야.”
“그럼 이걸 여기에 왜 갖고 왔어?”
그건 페렐르만 자작에게 보여 주려고 갖고 온 것이었다.
딸이 금발에 녹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해서.
“자작님께 보여 주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자작님께 드리는 선물, 뭐 그런 거지.”
“그렇구나.”
디엘은 시약을 책상에 올려 두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 는지 디엘에게 얘기해 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 들어오셔도 돼요.”
혹시 세이린 경이 도착했나 싶어 밝게 말했으나, 막사로 들어 온 사람은 내가 처음 보는 귀족 영애 였다.
“리체 에스텔의 막사, 맞나?”
“네.”
나는 정리하던 책을 내려놓고 의자를 권하며 대답했다.
“제가 리체 에스텔입니다.”
그녀의 눈이 직접 짐을 정리하 고 있는 나와 디엘을 아래위로 훌었다.
에르안은 그 어떤 귀족의 것들보다도 화려하고 넓은 막사를 마련해 줬지만 짐 정리를 할 하녀 는 내가 거절했다.
약물과 약초가 많아 직접 하는 게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말이 없어도, 내 막사를 찾아온 이 귀족 영애는 ‘역시 평민 따위’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탈리 이르타 르웰리치라며 백 작가의 여식임을 밝힌 그녀에게 디엘이 조심스럽게 차를 내주었다.
나는 대체 백작 영애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직접 내 막사에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실 의료 연구진 소속이고, 방금 하엘던 황자님께 소식을 들었어.”
곱게 손질된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나탈리는 우아 하게 말했다.
“비슷한 또래라며 네 상대로 나를 지목해 주셨는데 워낙에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무엇이 어이가 없으신가요?”
“황자님께서 황태자님의 체면을 살려 주신다며 대결을 제안하셨으면, 네가 알아서 꼬리를 말았어야지. 그 정도 눈치도 없니? 아, 평민이라 누가 안 가르쳐 줬나?”
마치 벌이 쏘는 것같이 날카로운 어조였다.
“음…… 황자님의 제안을 거절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 것 같 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 내가 새로운 예의를 가르쳐 줄게.”
나탈리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해.”
“네?”
“죄송하다고, 주제넘었다고, 사 실은 공작가 주치의의 조수 따위가 뭘 알겠냐고. 평민 주제에 분 수에 맞지 않는 꿈을 가진 나머지 실수했다고 빌어.”
나는 가만히 정적을 지켰다.
그녀의 잘 관리된 손톱과 완벽히 꼿꼿한 자세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조용히 입올 열었다.
“저는 이번 일로 황실 의료 연구진에 들어갈 생각은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러니 저와 같이 근 무하게 되실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 담담한 말에 나탈리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계를 인정하는 건 좋은 태도야.”
그녀가 목을 가다듬더니 새침하게 덧붙였다.
“네가 소문처럼, 황태자님의 측실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거야. 아직 건방지게 굴면 안 되지.”
“전 알아요. 제가 그럴 리 없어요. 측실이라뇨. 생각 없습니다.”
연회에서 첫 춤을 추었을 때, 그런 소문이 돌 것이라는 건 각 오했다.
하지만 본디 그런 복잡한 자리 에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제이드 황태자도 워낙에 사람이 가벼워서 그런 세기의 사랑을 할것 같지는 않았다.
내 대답에 그녀는 다소 누그러 진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굳이 네가 나를 거스를 필요는 없잖아?”
르웰리치 백작가라면, 잘은 모 르지만 어쨌든 대귀족 중 하나임 에 분명했다.
사냥 대회에 오기 전에, 이사벨 마님이 여기저기서 쓸데없는 혼담 서신이 들어오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쉴 때 본 이름 같기도 했다.
“죄송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 면, 제가 잘 보여야 하는 분이 너무 많아서요. 그런 말을 하신 분이 영애뿐은 아니셨거든요.”
베티아는 대놓고 미용 시약이라도 만들어 내라며 당당히 요구하 기까지 했으니까.
기분이 다소 상해 보이는 나탈리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이쯤 되면 영애분들이 제게 잘 보이셔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뭐?”
“어쨌든 황실 의료 연구진에 가 지 않겠다는 것 빼고는 다 거짓 이에요.”
평민이 귀족에게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제국법이 지정하지는 않았다.
“주제도 안 넘었고, 공작가 주치의의 조수라도 전 언제나 천재 였어요. 그건 신분하고는 관계없 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건방진 게!”
그녀가 내 뺨이라도 내려칠 것 같이 손을 번쩍 들자, 디엘이 덜덜 떨면서 급히 끼어들었다.
“아가씨, 리체는 공작님께서 아끼시는 인재입니다. 후환을 감당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나는 평온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맞아요. 공작님이 저렇게 건강해지신 건 제 덕이니까요.”
그리고 멈칫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재빨리 덧붙였다.
“게다가 제 대부님은 페렐르만 자작님이세요.”
한낱 자작가여도 약초 유통으로 는 가장 큰 페렐르만 상단을 이끄는 집안이었다.
의학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지위를 막론하고 뜨끔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또, 저는 엄살이 심하고 참을성이 없는 편이라 제가 당한 건 여기저기 다 일러요.”
내 태연한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둣 그녀가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고는 이를 갈며 씹어 뱉듯 말했다.
“……뭐, 평민이니 지킬 명예가 없어서 망신을 당해도 상관없다면 네 뜻대로 하렴.”
나탈리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봤자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에르안이나 이사벨 마님이 다른 사용인들에게 짓는 표정에 비하 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는 질 수밖에 없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 나탈리 이르타 르웰리치가 귀족다운 자비 를 베풀었구나 싶어 눈물이 날 거다.”
그녀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결국 뒤를 돌아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