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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9화 (7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9화

“리체 양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막사에 찾아왔거든. 페렐르만 자작 대신 주치의 대리로 온 거지?”

“네, 맞아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호위도 없이 이렇게 다니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황태자님?”

“응?”

“제가 분명 경고 드렸는데요. 불순한 무리가 있다고.”

빈정대는 것 같은 어조에 나는 살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에르안이 제이드 황태자에게 반란 군의 존재를 경고한 것 같았다.

케인을 심문하며 나온 용어이니 당연히 황실에 알려야 하는 것이 원칙이긴 했다.

역시 내 앞에서 황태자가 싫다 어쩌다 해도 할 일은 하는 모양 이었다.

그리고 제이드 황태자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내가 다 평정할 자신이 있는데, 설마 그렇게 간 큰 무리들이 있을까?”

천진할 정도의 방심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가 한 번에 다 쓸어버리는 건 사실이니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내가 5년간 없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렇게 성공해서 돌아왔는데 당연히 바보가 아니라면 마음올 접겠 지.”

“황태자님, 조금만 일찍 머리를 쓰면 될 일인데, 기어코 미래에 팔다리를 쓰려고 하시는 겁니 까?”

에르안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건방진 어조가 신경 쓰여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면 정말 머리 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건지……”

“어떻게 알았어? 난 복잡한 게 싫어.”

나는 제이드 황태자의 해맑은 대답에 살짝 입을 벌렸다.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공작. 생각보 다 상냥한 성격이네.”

내 뒤에서 디엘이 실수로 못을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미래라고 불리는 황태자 가 대책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 줄은 몰랐는지 한숨까지 한 번 쉬었다.

에르안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할 때, 갑자기 제이드 황태자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형님이다.”

나 역시 그가 쳐다보는 쪽으로 시선을 두었더니, 다소 파리한 얼굴의 마른 남자가 지나가는 것 이 보였다.

황태자의 배다른 형인 하엘던 황자였다.,

“아, 이참에 인사 좀 해 둬. 하엘던 형님은 황실 의료 연구진을 이끌고 있으니까 얼굴이라도 익혀 두면 나중에 나쁠 건 없을 거야.”

내가 뭐라고 말릴 새도 없었다.

제이드 황태자는 해맑게 웃으며 하엘던 황자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고, 길을 지나가던 하엘던 황 자는 무표정으로 우리 앞으로 다 가왔다.

그는 길게 늘어진 은발에 길쭉 한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순한 인상과 근육질 몸을 가진 제이드 황태자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날카로운 얼굴에 마른 편인 몸,  그리고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이드 황태자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그는 어쩔 수 없이 온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리체 에스텔입니다.”

내가 예를 표하자마자, 제이드 황태자는 신나서 덧붙였다.

“하엘던 형님, 리체 양이 제 눈을 고쳐 주었어요.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한쪽 눈을 실명할 뻔했다지 뭡니까.”

“한낱 평민에게 고쳐질 눈이었으면, 주치의인 케인즈 경부터 죽이는 게 정상 아닙니까?”

하엘던 황자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제이드 황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이르비아의 풍토병이었다는데,  케인즈 경이 어떻게 압니까. 리체 양이 대단한 것이죠.”

“아마 황궁에 오시자마자, 연구진들은 바로 알아냈을 겁니다.”

그럴 리 없다.

회귀 전에, 제이드 황태자는 속 수무책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내가 알기로 딱히 황실 연구진은 그 명성에 비해 대단히 이뤄낸 성과도 없었다.

연구 결과람시고 발표하는 것들 이 다 그저 그런 내용이라 페렐 르만 자작이 언뜻언뜻 말해 주는 것보다도 못했다.

“그래도 제 눈을 고쳐 준 건 어쨌든 리체 양 아닙니까.”

제이드 황태자가 꿋꿋하게 말했다.

하엘던 황자는 거의 경멸한다는 눈으로 그제야 흘끗 나를 보았다.

그래, 이게 정상이었다.

대다수의 황족과 귀족들은 평민을 자신보다 한참 아래로 보았다.

에르안 말마따나 팔다리만 강인 하지, 머리는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황태자가 이상한 것이었다.

세르이어스 공작가도, 페렐르만 자작가도 내가 큰 도움을 주지않았더라면 저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올 것이다.

회귀 전에는 길거리에서 마주쳐 도 눈길을 받지 못하는 그런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딱히 기분 이 상하지는 않았다.

“케인즈 경이 그러는데,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니랍니다. 페렐르만 자작이 인정했다고 해요. 그 것만 해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꼬장꼬장한 페렐르만 자작이...”

아르가라는 이름이 나오자 하엘 던 황자의 얼굴이 더 무참히 구겨졌다.

“……내 연구진에서 뛰쳐나간 그 무책임한 불한당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군요. 참 대단한 경 력입니다.”

“곧 성년이 된다는데, 제가 추 천서를 써 주면 혹시 황실 의료 연구진에……”

“황태자님.”

하엘던 황자는 딱 잘라 그의 말을 끊었다.

“황실 의료 연구진에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르는 평민을 추천하신다고요?”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황태자님께서 황제가 되셔도,  전 그런 천한 피는 받지 않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내 옆에 있던 에르안이었다.

“누가 그 황실 연구진에 보낸답니까?”

그가 내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 겼다.

“리체는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사람이고 곧 정식 주치의가 될 겁니다. 성년 이후의 거처를 두 분이서 의논하실 필요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 두 의견 다 너무 불쾌해서 누굴 편들어 드려야 할 지도 모르겠군요.”

“세르이어스 공작, 상당히 무례하군.”

하엘던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했지만 에르안은 턱을 치켜 든 채로 느릿한 말올 멈추지 않 았다.

“황자님께서는 황자님의 어머님도 그런 식으로 칭하십니까?”

시야 아주 바깥쪽에 있는 디엘 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 생각에도 에르안이 너무 지나친 것 같았다.

하엘던 황자의 친모는 평민으로, 지금 황제의 측실이었다.

그 가 황태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도 적통이 아닌 이유였다.

‘안 돼. 이러다 진짜 반역하겠어.’

그와 황실의 사이가 갈라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던 나는 결국 나서기로 했다.

“제가 평민인 건 사실입니다,  황자님. 저는 제국법이 지정하는 제 신분과 분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역시 에르안의 입을 막을 수 있 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황실 연구진도 역시 과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황자님 뜻 대로, 절대 그 연구진에 들어간 다는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이드 황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냐, 리체 양. 리체 양의 실력.......”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절대 거짓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의학과 생명 앞에서 천한 피와 귀한 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엘던 황자가 코웃음을 치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군. 시건방지기 이를 데가 없어.”

“.............”

“실력이 모자라서 제 발로 기어 나가고 싶던 차에 딸이 없어지니 이때다 싶어 뛰쳐나간 인간에게서 뭘 배웠겠어?”

나는 신분제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었지만 의학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이 왜곡되는 데에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다.

“페렐르만 자작님의 인성이 좋 지 않다는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실력으로 하엘던 황자님께 그런 말을 들을 분은 아니십니다.”

하엘던 황자의 얼굴이 붉으락푸 르락 해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개길 수 있는 데에는 내 어깨를 둘러싼 에르안의 체온이 한몫을 했다.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 세르이어스 모자의 특징이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혀 경을 치는 것은 반드시 막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게 반역까지 가지만 않기를 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물론 이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 지 못했던 제이드 황태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다들 잘하는 거지, 왜 그래. 페 렐르만 자작도, 황실 연구진도,  리체도, 형도……”

“비교할 걸 비교하십시오. 무식한 평민과 도망자를 어디서 황실연구진에 비교합니까?”

“아닙니다. 리체 양은 케인즈 경이 인정한 훌륭한 인재라니까요.”

똑같은 대화만 백 번이고 천 번 이고 반복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황태자님과 제 의견이 갈리는 군요. 그러면 이렇게 하죠.”

하엘던 황자가 피식 웃으며 팔 짱을 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부상자가 나올텐데……”

짐승과의 사투가 전제되는 사냥 대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부상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구진의 일원과 리체 양의 처방을 공개적으로 비교해 봅시다. 그럼 누가 더 뛰어난지 판단이 가능한 것 아닙니까? 대신.”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체 양의 실력이 영 연구진에 못 미친다 싶으면, 시건방지게 평민 주제에 의학과 생명 운운한 실언에 대한 대가를 묻겠습니 다.”

“대가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 로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 고, 앞으로 절대 주제넘은 꿈을 꾸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정도면 되겠군요.”

대단한 자비를 베푼다는 태도였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네, 황자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에르안이 날카롭게 물었다.

“리체가 이기면, 그때는 황자님 께서 어떤 대가를 치르실 겁니 까?”

“글쎄요. 리체 양, 원하는 게 있을까요?”

“네.”

굳이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페렐르만 자작님의 실력이 모자라다고 뒤에서 말씀하신 것, 공개적으로 사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평민 이라서 무시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렐르만 자작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 문에 더 악질이라고 여겼다.

내 말에 하엘던 황자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딱히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은 없었는지,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와중에, 이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  이런 선의의 경쟁이라니 즐거운 이벤트가 되겠습니다.”

그 호전적인 근육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제이드 황태자였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밝게 말했다.

“게다가 승패의 대가로 주고받는 게 고작 말 한마디씩이라니,  정말 친선 경기나 다름없는데......”

에르안이 떨리는 숨을 참고 있 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비난의 말을 참고 있는 둣 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많이 인내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리체 양, 근데 난 리체 양이 지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거야. 내 눈을 고쳐 준 건 사실이잖아. 부담 없이 해, 부담 없이. 난 그런 걸로 마음의 크기를 평가하지 않아.”

여기서 왜 ‘마음의 크기’라는 말 이 나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본 에르안이 내 어깨를 더 강하게 자신의 쪽으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 가만히 속삭였다.

“진짜로 부담 없이 해, 리체.”

당연히 부담은 없었는데, 그 다 음 말을 듣고 엄청난 부담이 생겨 버렸다.

“하엘던 황자를 죽이고 독립 공국 선언 하면 되니까. 안 그래도 황실이 아주 성가신데 말이야.”

해사한 미소를 보니 진심인 것 같아서 나는 몹시 떨떠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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