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8화
공작성에 돌아온 나는 조심스럽 게 에르안에게 하절기 사냥 대회 에 참가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가야지.”
에르안에게 가벼운 불면 중세가 있어서, 나는 연구실에서 그의 손을 잡고 상태를 측정하는 중이었다.
“당분간 그런 대외 행사엔 얼굴을 비추는 게 좋아.”
그는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내 게 한쪽 손을 맡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한 시선이었지만 몸이 뚫릴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똑똑히 보여 줄 필요가 있어서.”
“누구한테요?”
“주제 모르는 것들.”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음산해서 나는 홈칫 놀랐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그의 손을 놓은 뒤, 약초 몇 개를 즉시 조 합하며 화제를 돌렸다.
“신경성 불면이에요. 약한 신경 안정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순식간에 만든 약을 포장해 주면서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사냥 대회, 저도 가 고 싶어요.”
“사냥에 취미가 있었어?”
“아뇨. 혹시나 공작님이 다치실 수도 있잖아요.”
“짐승한테 다칠 확률은 얼마 안 돼. 차라리 내 불면을 걱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딘지 모르게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에르안이 인위적인 한숨을 쉬어 보였다.
“몇 번 말한 것 같은데. 네가 곁에 있어 주었던 어린 시절엔 잠을 상당히 잘 잤다고.”
“그건 심리적인 문제지 생리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공작님.”
나는 그의 손에 곱게 포장된 신경 안정제를 쥐여 주었다.
“어쨌든 사냥에는 취미가 없지만, 저도 갈래요.”
마냥 좋다고 할 줄 알았던 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휴가 쓰고 갈 거예요. 세이린 리즈 페렐르만 경의 일일 주치의 조수로. 하지만……”
내가 눈을 똑바로 뜨며 또박또 박 말했다.
“그 전에 왜 안 된다고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여쭤볼 거고요.”
“첫째,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가고 싶지 않아. 다들 무기를 들 고 다니는 데다가 이미 넌 누군가에게 표적이 된 적이 있지.”
“세이린 경이 곁에 있어 줄 거 예요.”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모를 일이군. 그리고 둘째.”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새까만 동공에 입술을 꽉 다문 내 모습이 비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머릿속에 꽃만 가득 찬 그 멍 청한 황태자랑 다시 만나게 하기 싫어서.”
“아니, 대체 왜……”
“질문 하나만 할게, 리체.”
그는 내 머리카락의 끝을 손가 락에 천천히 감으며 부드럽게 물 었다.
“평생…… 평생 내 옆에 있을 거지?”
“종신 계약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저었다.
“이번 가을에 환절기 마지막 검사만 끝나면, 굳이 저처럼 뛰어난 주치의를 두지 않으셔도 되실 텐데요.”
“거봐.”
그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트려 보였다.
어린 시절 함께 있어 달라며 투 덜거리던 귀여운 표정이 생각나 나는 이 와중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러니 내가 조급하지. 안 그래?”
어딘가 원망스러워 하는 것 같 기도 하면서 교태가 흐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역시 네 말대로, 내 불면엔 분명히 심리적인 문제가 있어.”
어릴 땐 마냥 귀여웠지만 이제는 그런 얼굴을 하면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야릇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여자 문제 생길 거라고 경고 했잖아요.”
“지금 문제는 네가 아직 성년이 아니라는 것 하나뿐이야.”
에르안이 살짝 한숨을 쉬며 내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천천히 공기 중에서 춤을 추다가 내려앉았다.
“어쨌든 저는 갈 거고요……. 뭐, 어느 막사를 쓰느냐의 문제 인데.”
“당연히 세르이어스지.”
그가 다급히 말했다.
“갈 거면 나랑 같이 가. 기사단 추가 편성을 명령해야겠군.”
“디엘이랑, 제 새로운 조수 아론을 데려가도 괜찮죠?”
“역시 나 하나로는 부족한 거 야?”
“당연하죠. 큰 그림 그릴 건데.”
나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쑥하 며 웃었다.
“뭐, 물론 섭섭하시면……”
비뚜름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내 말은 새침하게 늘어졌다.
“공작님께서도 제 부탁 몇 개만 들어주셔도 좋고……”
물론 나는 에르안이 무슨 대답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
아론이 공작성에 들어온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외출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온실에서도 페렐르만 상단의 사람들만 접촉하게 했고, 식사를 가져다주는 하녀가 말을 거는 것 도 일체 금지했다.
정식으로 내 조수로 임명한 뒤 방을 주고 나서도 절대 자유를 주지 않았다.
보통 무언가를 다 베껴 쓸 때까지 방에서 못 나오 게 했던 것이다.
이제 아론은 내가 그의 방에 들어가기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악독한 여 자가 월 시킬까 겁부터 먹는 것 같았다.
“새로 할 일이 있어, 아론.”
나는 디엘을 시켜 가져온 약초 세 꾸러미를 바닥에 두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이번 사냥 대회에 나가시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특별히 드셔야 할 약이 있어서 일이 좀 많아.”
아론은 바닥을 가득 채운 약초 더미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베이가, 키리치, 비기다풀이야. 다 깨끗하게 씻어서 건조해 놓도록 해. 얘네는 햇빛 쐬면 안 되 니까 이 방에서 나가지 말고.”
“이걸…… 이걸 다요?”
“응,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너도 사냥 대회에 가게 될 거야.”
내 무심한 말에 아론의 표정이 순간 환하게 변했다.
“저, 저도요?”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안 계시잖아. 내가 거의 주치의 노릇은 다 하고 있는데, 내 조수도 따라 가야지. 안 그래?”
“네, 네…… 그렇죠.”
“어쨌든 사냥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내일 모레까지는 다 손질해 놔.”
나는 차갑게 말한 뒤 아론의 방 에서 나갔다.
나에게 숨기려고 애를 쓰지만, 신나서 씰룩이는 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잘 걸려들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나는 이것저것 묻는 디엘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몰래 씩 웃었다.
‘어떻게 해서든 웨데릭을 직접 잡는다.’
에르안의 말대로, 다들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냥 대회란 사람이 사람을 해치기에 얼마나 좋은 기 회인가.
괜히 황태자 시해 시도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빡대가리가 아니던데, 500번이나 쓰게 시켰으면 당연히 외웠겠지.’
그리고 난 그 무모함을 이용할 셈이었다.
***
하절기 사냥 대회는 무려 일주 일 동안이나 이어지는 큰 행사였다.
반란군들이 처음으로 황태자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꼬리 를 밟힌 것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다시 말해서, 처음 며칠간은 내가 별로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잊지 않으셨죠?”
사냥 대회가 열리는 에히포 숲 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에르안에게 단단히 일렀다.
“지금 공작성에는 의사가 아무 도 없고, 마님도 적적하실 거예 요…. 꼭 이시더 남작님을 보내드려야 해요.”
반드시 웨데릭만 혼자 남게 해야 했다.
그래야 단독 행동으로 무모한 짓거리도 할 수 있었다.
에르안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눈 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사냥하기 편한 차림으로 등 뒤 에는 화살을, 허리춤에는 검을 꽂은 그의 모습은 꽤나 근사했다.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급보를 받았다고 해야겠어. 물론 공작령에 도착할 때면 사냥 대회는 끝나 있겠지만 말이야.”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라고 지 시한 적은 없었는데, 에르안은 내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훨씬 더 치밀한 계략을 내놓았 다.
내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그가 내게 커다란 보닛을 씌워 주며 씩 웃었다.
“햇빛에 타면 피부 쓰라리니까, 웬만하면 막사에 가 있어.”
턱 밑에서 리본을 묶어 주는 손 길이 퍽 부드러웠다.
뒤에서 태양이 빛나며 그의 잘 짜인 근육을 하나하나 비추고 있 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전사의 몸 같아서 나는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왜, 보기 좋아?”
“네.”
“원하면 나중에 돌아와서 더 벗어 줄게.”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그럼 더 노력해야겠군. 어느 쪽 근육이 부족한 것 같아? 취향만 말해 주면 무조건 맞춰 줄 게.”
다소 과장된 한숨을 한 번 쉬고나서, 에르안이 다른 곳으로 가 려던 찰나였다.
“리체 양!”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머지않아 암살 위협을 받게 될 제이드 황태자였다.
물론 저렇게 순진한 얼굴 뒤의 사기와도 가까운 신체적 능력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만.
“사냥 대회 참가 명단에서 보고 몹시 반가웠어.”
“어머, 황태자님. 반겨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추 고,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에르안의 발 등을 툭 쳤다.
그제야 에르안 역시 무뚝뚝하게 예를 표했다.
저만치 뒤에서 막사를 살피고 있던 디엘이 흠칫하여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