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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7화 (7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7화

시오니 님의 방에서 나와, 새롭 게 꾸민 페렐르만 자작저의 ‘내 방’에 도착했다.

그 후에도 세이린 경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아서 방은 아기자기 하고 예뻤음에도 거기에 감탄할 정신도 없었다.

“중간에 어떻게 된 걸 거예요.”

패닉에 빠져 있는 세이린 경을 앞에 두고, 나는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 얘기는 마님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걸요.”

“……오라버니와 선대 세르이어스 공작님은 굉장히 친한 친구 사이였어.”

세이린 경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둘 다 좀 이상했거든.”

사람은 다 조금씩 이상한 법이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니와 공작 부인도 친했고. 시오니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그랬군요.”

“그러니까 시오니가 그곳에 아이를 보냈다는 건 말이 되는 얘기야.”

시오니 님이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은 좀 복잡하지만 해석할 만했다.

펜이 없는 상황에서 부상자가 급히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은 자신의 혈액뿐이었다.

게다가 혹시나 위험에 처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낡은 책에 들러 붙은 핏자국을 열심히 분석했다.

시오니 님의 방 중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것은 바로 죽 나열되어 있는 일기장 모음이었다.

그녀가 남긴 책에서 핏자국이 남아 있는 페이지의 숫자를 일기장의 날짜와 대조하고, 첫 글자를 조합했더니 문장이 나왔다.

물론 모든 것은 시오니 님이 자신의 일기장 내용을 다 기억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였다.

그 사실은 ‘시오니는 다 기억해’ 라며 세이린 경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아마 페렐르만에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겠죠?”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중얼 거렸다.

“영리하신 분이라면 무언가를 눈치채시고……”

“심지어 이시더 남작이 알려 준 날짜와도 맞지 않아. 6월 9일이 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날보다 늦어.”

페렐르만 자작이 다시 전국의 열여덟 여자애들을 다 뒤져야 할 상황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생아의 경우, 머리카락이 별 로 없고 바로 눈을 뜨지 않으면 눈 색은 구별이 불가능하니까…… 시오니 님이 정말 모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시더 남작이 본디 태어난 날짜보다 일찍 알려줬나 봐요.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구별할 수 있고 몸을 풀 수 있는 기간만큼이요.”

결국 페렐르만 자작의 18년은 완전한 무용지물이었다.

우리 사이에 잠시 참담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에야 세이린 경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아르가 놈의 대녀지만, 내가 예전에 말했듯이 넌 아르가 보다는 시오니와 비슷한 것 같아.”

“네?”

“시오니도 이런 암호를 풀어 내거나 하는 걸 정말 잘했거든. 아 르가 놈은 아까 말했듯이 의학밖 에 잘하는 것이 없는데 말이야. 말했잖아. 시오니가 아르가에게 는 너무 아깝다고.”

하긴, 페렐르만 자작은 의학에 완전히 특화된 사람이어서 이런 분야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야 뭐, 다 잘하지만…….

지난번 베티아 영애를 이용해서 뒤를 밟을 때도 세이린 경은 나 를 보며 시오니 님이 생각난다고 했었다.

“어쨌든 이제 이시더 남작을 죽여도 되겠지?”

세이린 경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더 이상 얻어 낼 정보도 없잖 아. 시오니도 모르는 내 조카의 외양을 그놈이 어떻게 알겠어?”

“……중간에 행방불명된 이유는 알 수도 있겠죠. 그 작자가 개입 했다면 말이에요. 게다가 원통하지만 확실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바야흐로 초여름이 오고 있었다. 곧 반란군이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다들 반란군이 그냥 소문이라고 치부할 때…… 처음으로 흉흉 한 일이 벌어졌던 건 여름 사냥 대회.’

그때 반란군들은 황태자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만다.

나야 구석진 의원의 보조로 있을 때라, 조금 지나서야 그런 소 문을 주워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높으신 분들의 일인 줄 알았다.

‘초가을 접어들면서 여기저기 궐기하고…… 에르안도 죽고…… 영지도 넘어가고..’

애초에 사냥 대회에서 뿌리를 뽑아 버리면 가을까지 갈 일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세이린 경.”

“왜?”

“이번 여름 사냥 대회에 가세요?”

“그거 며칠 안 남았잖아.”

세이린 경이 달력을 확인하며 말했다.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저희, 가는 게 어때요?”

나는 씩 웃으며 제안했다.

“저는 공작님이 가시면 주치의의 조수 역할로 따라가고, 안 가신다 하면 세이린 경의 동반인 역할로 갈게요.”

“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왜? 사냥 대회 구경하고 싶어? 혹시 내가 활이라도 가르쳐 줄까?”

“아뇨. 전, 피는 누군가를 살릴 때만 봅니다.”

“뭐? 그런 나약한 태도로는 성인군자 같은 끔찍한 것밖에 안 돼.”

“물론 남한테는 잘 넘기고요. 남이 피를 보는 건 제 알 바 아 니죠.”

단호하게 거절한 나는 말을 이었다.

“마침 제게 좋은 미끼가 있거든요.”

그 미끼는 지금 공작성에서 울면서 책을 베끼고 있을 것이다.

“좋은 걸 하나 낚아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세이린 경이 내게 더 묻기 위해 눈을 반짝일 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노 크했다.

내가 일어나 문을 여니 자작저 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저, 세이린 경께서 여기 계시 다고 하셔서요.”

“네, 맞아요.”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세이린 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와 하녀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얼핏 보니 그의 성격답게 편 지는 아주 짧았다.

“흠”

세이린 경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나는 눈치를 보다 물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북쪽을 뒤지는 걸 사정상 중단 하고 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 다는군.”

“네? 왜죠?”

“대녀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그 대녀는 지금 멀쩡히 여기 있는 걸요?”

나는 황당해서 눈을 깜빡였다.

“어쨌든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잠시 들른다는 내용이었어. 아버지의 상태를 좀 보겠다고.”

‘‘아……”

“그런데 예상 날짜도 참 거지 같이 잡았네.”

“왜요?”

세이린 경은 대충 책상에서 팬을 찾기 시작했다.

“하필 사냥 대회 주간이야.”

그리고 우리는 막 사냥 대회 참가를 결정한 참이었다.

“……아냐, 잘된 걸 수도 있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페렐르만 자작이 보낸 편지지의 뒷면에 짧은 문장을 휘갈겼다.

내가 대충 보니, 리체와 자신도 사냥 대회에 참전하니 거기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없을 때 얘기해야지. 난동을 부려도 야외에서 부리는 게 낫지 않겠어?”

“그건 그러네요.”

“화가 나서 뛰쳐나간 뒤에 울부짖어도 다른 사람들이 짐승 새끼 가 우는구나, 할 것 아냐.”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린 경은 성의 없게 쓴 편지를 하녀에게 건넸다.

“답장이니 전달해 줘.”

페렐르만 자작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종이를 꺼내는 에너지조차 아깝다는 듯한 태도였다. 다시 한번 그녀의 일관성을 깨닫는 계기였다.

그나저나 왜 나 때문에 예정일 보다 일찍 오는지는 몰라도, 사 냥 대회 때 페렐르만 자작을 만 나는 일정이 생겼다.

‘거참…….’

시오니 님의 방에서 본 초상화는 이상하게 여운이 남았다.

세상 행복하게 웃고 있던 젊은 두 사람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씁 쓸했다.

‘진짜 못돼 처먹었다, 이시더 남작.’

나는 참된 의사로서 살의가 치 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눌렀다.

제 친누이를 독살하려고 한 남 자였다. 페렐르만 자작을 헤매게 하는 거짓말을 하는 건 일도 아 니었을 것이다.

내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세이린 경이 내 두 손을 잡았다.

“리체.”

“네?”

“이 방 어때? 정신이 없어서 이제 물어보네.”

“네. 좋은데요?”

“세르이어스 성에 비하면 어떠 냐는 거야.”

아니, 왜 비교 대상이 공작성인 지…..

“여기가 더 편하고 좋으면 사표 쓰고, 아예 거처를 옮기는 건 어 때? 성년이 6월 말이라며.”

“제가 거기서 아직 할 일이 남 아서요. 그 이후에 생각해 볼게요”

오라는 곳이 많은 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왠지 불길 한 예감이 드는 것을 꾹꾹 눌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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