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6화
7. 큰 그림은 다 함께
페렐르만 자작저에 도착했을 때 에는 이미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을 때였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펠릭스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르신!”
나는 깜짝 놀라 달려갔다.
“왜 나와 계세요? 제가 언제 올 줄 알고.....”
“굳이 널 기다리려고 나와 있던 건 아냐.”
펠릭스 어르신이 툴툴대며 말했 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 바람 좀 쐬고 있었던 거야.”
“날이 아주 흐린데요?”
“난 원래 흐린 날을 좋아해. 잘 알아둬.”
“그러시군요. 굉장히 사소하고 참신한 정보 감사합니다.”
펠릭스 어르신께 대리석 길을 걷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그를 부축하며 후문의 길로 빙 돌아갔다.
“크흠, 약은 잘 받아 보았다.”
“꼬박꼬박 드셨어요? 제가 복용 법도 써서 보내 드렸는데.”
“그래.”
나는 그날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돌아간 이후, 바로 펠릭스 어르 신께 알맞은 처방을 해서 우편으로 에나베 관절염 후기에 맞는 환을 보내 드렸다.
“이번 달에 드실 것도 제가 직접 가져왔어요.”
“……고맙구나. 돈은……”
“약초 값은 당연히 페렐르만 상단에서 지급하는 걸로 처리했고요.”
“그렇다면 처방료는…”
“처방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간단 한 건데요, 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저택에 들어서자, 문 바로 앞에서 세이린 경이 대기하고 있었다.
“잘 왔어, 리체.”
맨 처음 디엘과 방문했을 때 하 녀들이 사무적인 태도로 응접실 에 안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저택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화사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벽지를 좀 바꿨지.”
세이린 경은 귀 뒤를 긁으며 말 했다.
“손님을 맞기엔 분위기가 너무 칙칙한 것 같아서.”
손님방에서 저녁을 먹었던 때와 는 다르게, 이번에는 다 같이 식당에서 정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저 먼 지방에서 공수한 식재료 로 만든 에피타이저부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메인까지 굉장히 심혈을 기울인 식사인 것이 분명했다.
“입에는 좀 맞는지 모르겠군.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오랜만이 라.”
펠릭스 어르신의 말에 나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이 음식이 입에 안 맞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리사를 각지에서 데려온 보람이 있군.”
내 방문을 위해 벽지를 바꾸고 각지의 요리사를 데려오다니 ……. 정말 돈이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는 것이 분명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보다 더 나은가?”
펠릭스 어르신이 경계의 어조로 물었다.
“저는 평민 출신이라, 뭐든 다 과분해요.”
“어쨌든 아르가의 대녀라면, 페렐르만 집안에도 속한 것이나 마 찬가지이지.”
“그, 그건 아니에요. 제 성은 여 전히 에스텔이고……”
“네 집처럼 생각해.”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언사에 나는 말려 달라는 의미로 세이린 경을 바라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썰 고 있던 세이린 경이 나와 펠릭스 어르신을 번갈아 한 번씩 본 뒤, 칼을 고기에 꼽으며 음산하 게 말했다.
“세르이어스 성에서 대우가 거 지 같으면 언제든지 짐 싸서 와. 절대 참을 필요가 없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디저트로 초콜릿 케이크와 체리 셔벗까지 다 먹고 나서, 세이린 경은 직접 내가 머물 방을 안내 해 준다고 나섰다.
“지난번의 손님방은 어딘지 알고 있는데......”
“네 방을 만들었어”
“네? 왜요?”
“아르가 놈의 대녀잖아. 어떻게 손님 방에서 재워?”
“지난 번에는 아루렇지도 않게 재우셨잖아요”
“피치못 할 사정이었어”
세이린 경은 새침하게 말했다.
어차피 펠릭스 어르신이 마음에 걸려서 정기적으로 들를 예정이라, 나는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않기로 했다.
“펠릭스 어르신께는 말씀드리셨어요?”
복도를 단둘이 걸으며,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금발의 녹안이 아닐 수도 있다 는 거……”
“도저히 못 했어.”
세이린 경은 짧은 갈색 머리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그날 죽어라고 이시더 남작의 뒤를 밟아 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그런 보는 눈이 많은 연회장에 서 이시더 남작이 뭘 하겠어요.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에요.”
“그래. 네 말이 맞았지.”
그녀의 눈에 다시 참담함이 어렸다.
“아버지께는 도저히……. 얼마나 사실지도 모르는데, 평생 품고 있는 희망마저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페렐르만 자작님께는 말씀드리실 건가요?”
“그건 말해야지.”
그녀가 생각만 해도 두통이 온다는 둣이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 다.
“내가 직접 말할게. 너는…… 너는 말하지 않아도 돼. 그놈 폭 주하는 추태를 너까지는 안 봐도 되니까.”
“네.”
나 역시 그 절망을 직접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순순히 대답했 다.
대신 빠른 친자 검사 방법을 개발했다고 하면 좀 위로가 되지않을까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세이린 경이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리체.”
“네?”
그녀는 다소 고풍스럽게 생긴 문 앞에 멈춰선 후, 망설이며 말 했다.
“……여기 시오니의 방인데, 한 번 들어가 볼래?”
거길 내가 왜 들어가느냐고 물으려다가, 지난번 세이린 경이 나를 보면 시오니 님이 생각난다 고 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린 경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아주 크지는 않지만 꽤 아 기자기한 방이 드러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쪽 벽에 걸 려 있는 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젊은 페렐르만 자작과 임신해서 배가 불러 있는 여인이 활 짝 웃으며 앉아 있는 초상화였 다.
“시오니 님이세요?”
“라베리 섬에 가기 직전 그린 그림이야.”
시오니 님은 귀여운 인상을 가 진 몸집이 작은 여자였다.
동그 란 초록색 눈과 허리까지 구불거리는 금발이 아름다웠다.
물론 앉아 있는 시오니 님의 어 깨에 팔을 두르고 서 있는 페렐르만 자작 역시 내가 평소에 봤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 람이 었구나.’
외알 안경도 쓰지 않은 그는 정 말 준수하고 단정하게 생긴 미남 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는 둣이, 시오니 님에게 고정된 눈에서는 마치 설탕이 뚝뚝 떨어 질 것만 같았다.
“저때가 우리 집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지.”
세이린 경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시오니는 여러모로 정말 영리 했어……. 진짜 천재였다고.”
“.............”
“의학밖에 모르던 바보 같은 아 르가도 잘 보살펴 주고. 하나만 빼고는 완벽해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초상화에서 어렵게 눈을 떼고 세이린 경을 바라보았다.
“하나요? 그게 뭔데요?”
“시오니의 아주 결정적인 문제는 남자를 볼 때 외모에 지나치게 약했다는 거야.”
세이린 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껍데기 하나만 기가 막힌 아르가 놈한테 온 거 아냐.”
“자작님이 뭐 어때서요. 페렐르 만 상단이 지닌 돈이 얼마인데요.”
“작위도 자작으로 낮고, 기사 서임을 받은 것도 아니고, 성격 이 둥글둥글해서 인맥이 넓은 것 도 아니고, 꼴에 천재라고 외골 수에다가……”
세이린 경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되 었다.
“그 당시 시오니에게 구애하던 사람들 중에서는 훨씬 더 좋은 남자들도 많았어. 시오니는 그 아름다운 라베리 섬 영주의 딸이니까. 그런데!”
생각만 해도 안타깝다는 둣이, 세이린 경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는 얼굴값 하는 남자가 이 상형이라며 적극적으로 구애도 하지 않은 아르가한테 먼저 청혼 을 해 버린 거지!”
결국 본인이 원하는 가치를 스 스로 쟁취했다는 뜻이었다.
세이린 경은 씩씩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게 말이 되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미가 돋보이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동의를 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지만, 나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 하는 성격이었다.
“제가 그렇거든요.”
“뭐?”
“선천적으로 시각에 약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고……”
나는 차분하게 선언했다.
“탐미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 니다.”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내 눈 앞에서 홀리듯 웃어 주던 에르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본 남자 중에 가장 잘생긴 남자 여서 그런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나도 모 르게 경계심이 풀리면서 정신 못 차리게 되는 그런 느낌. 회귀 전에는 잘 몰랐던 내 진정한 취향이었다.
그렇게 생긴 남자라면 평생 내 가 먹여 주고 재워 주더라도 흐뭇할 텐데.
“저도 무조건 잘생긴 남자와 결 혼할 거예요. 눈이 즐거운 게 1 순위예요. 다른 건 뭐, 제가 다 잘하니까요.”
“……리체. 너도 참 위험하구나.”
세이린 경이 정색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 놈이 되었든, 내가 면접을 봐야겠어.”
“네?”
“얼굴만 번지르르한 놈팡이라면 내가 목을 따서……”
“아니 대체 왜 세이린 경께서 제 남편감을!”
“오빠의 대녀 아냐! 그런 엄청난 위치의 인연이 제 인생을 망 치려는 걸 두고 보라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세르이어스 공작성도 위험했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서도 편하게 내 멋대로 결혼하 기는 그른 듯했다.
더 이상 이 화제에 대해서 논하 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마저 아기자기한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 다.
책상 위에 작은 책장에는 일기 장들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남의 일기를 보는 건 예의가 아 니라서 시선을 돌리다가 나는 신 기한 것을 발견했다.
“어…… 세이린 경?”
“이건 뭔가요?”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귀족 여 인의 방에 있기에는 너무 이상한 낡은 책이었다.
게다가 책의 제 목도 아주 이질적이었다.
「벼 파종 시기에 대한 기본 원칙」
조심스럽게 책장을 펼치니, 물 자국에 핏자국까지 아주 지저분 해서 상태조차 좋지 않았다.
세이린 경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느 농가에서 시오니의 시체 와 함께 발견된 책이야.”
“네?”
“이 책을 꼭 껴안은 채였어.”
“본디 농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나요?”
“그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오니의 마지막에 함께 있었던 책이니 간직해 두고 있는 거지.”
불현듯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절대 읽을 일 없는 책을 곁에 두고 죽었다니 이상했다.
“세이린 경.”
“왜?”
“시오니 님이…… 머리가 좋으셨다고 했죠?”
“응, 굉장히 영리했지. 진짜 천재였어. 아르가는 의학 외에는 바보인데 말이야.”
세이린 경이 그것 하나만큼은 보장한다는 둣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본 책 내용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나 역시 의학서 한정으로 비숫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이거 분명히 의도가 있을 거예요. 다잉 메시지일 수도 있 어요.”
“우리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 책에서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물과 피에 젖어 우글우글한 그 책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훌어보았다.
세이린 경도 내가 열심히 집중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 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심지어 내가 일기장 몇 개를 뒤지는 데도 무례하다며 끼어들지 않았다.
한참을 책과 일기장을 대조해 보던 나는 고개를 들고 세이린 경에게 조용히 말했다.
“딸은 살아 있대요.”
“……응?”
“6월 9일, 오후 3시 25분 출생.”
세이린 경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에 찬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보내서 머리카락과 눈 색깔은 알 수 없음.”
“누, 누구한테 보냈대? 누구한테?”
“그게.........”
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