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5화 (7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5화

하늘이 파랗고 높았다.

푸른 잔디밭에 아이들의 웃음소 리가 울렸다.

“엄마! 엄마!”

흐릿한 시야에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가 뛰어 놀다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가 엄마라고?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지도 못하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폭 안기는 두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 워서 나는 활짝 웃었다.

엄청난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 드는 순간, 내 몸이 크게 흔들렸다.

“으음……”

“리체? 깼어?”

“.......어머.”

눈을 뜨니 새까만 눈동자가 보 였다.

꿈의 여운 때문에 지금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하는 데 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고, 공작님. 내려 주세요.”

“무슨 소리야. 다리 아프잖아.”

그가 나를 안은 채로 공작성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 공작성은 조용 했다.

“구두는 하인에게 줬어. 내일 네 방에 다시 가져다줄 거야.”

“아니죠, 공작님. 구두가 아니라 저를 하인에게 넘기셨어야죠.”

혹시나 누군가를 깨울까 봐 나는 기겁해서 소리치지도 못하고 속삭였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아주 난감해하는 내 얼굴을 내 려다보며, 그 역시 작게 말했다.

“어쨌든 신발도 없으니 내려 주 지는 못해. 네 방 침대에 내려 줄게.”

“감사합니다.”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심장 소 리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 다.

벌써 잔상은 흐릿해지고 있 지만 꿈에서의 행복감이 기억난 탓이었다.

‘역시, 내가 결혼을 해서 애를 낳나 봐. 그것도 아주 예쁘고 사 랑스러운 애들.’

갖지 못해서 가지는 환상이 있었다. 생을 되돌리고 나서, 내게 그것은 혈연이었다.

나는 나를 가볍게 안은 채로 조용히 걷고 있는 에르안의 턱선을 슬며시 홈쳐보다가 다시 눈올 감았다.

‘죄송해요, 공작님.’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지, 이제 몸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잘해 주셔도 저는…… 할 일 다 하면 그땐 제 가정을 1 순위로 둘래요.’

미래의 남편이 누군지는 모르지 만, 아이들이 꽤 귀여웠던 것을 봐서 얼굴이 엉망진창인 평민은 아닌 듯싶었다.

잘생긴 건 대를 이어 가니까,  아마 내 성향상 허우대는 멀쩡한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내가 능력 있고 돈도 꽤 벌어 놨으니까 ‘얼굴만’ 보고 골랐을 가능성도 높았다.

나는 시각에 의외로 굉장히 약하다는 것을 에르안을 보면서 날마다 깨닫고 있었으니까.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웃음소리 속에서 얼마나 행복감을 느꼈는 지 기억하면서, 나는 내 손을 꽉 쥐던 귀여운 꼬마 에르안을 마음 속에서 보내 버렸다.

뭐, 애초에 살려 준 데다가 제 몫 다할 수 있게 만들어 줬으니 그렇게까지 미안할 것도 아니었다.

다음 날. 아론이 오후가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나 서, 나는 신나게 그의 방으로 쳐 들어갔다.

“오, 오셨습니까.”

그는 거의 악마를 보는 것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아마도 마지막에 베르칼리아 꽃 을 다 태워 버린 것에 대한 충격이 큰 듯했다.

“베르칼리아 꽃을 피우느라 수고 많았어.”

“……네?”

그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평민인 내가 너한테 반말 써서 지금 놀란 거야?”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새초롬 하게 떴다.

“그, 그게 아니라……”

“그럼 내가 내 조수한테 존댓말 써야 해?”

“아닙니다.”

“싫음 나가고.”

“절대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속에서 얼마나 부아를 내고 있 을지 안 봐도 뻔했다.

평민을 맘대로 부려먹어도 된다고 뼛속부터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얼마나 모욕적일지 상상만 해 도 기분이 좋았다.

“아참, 왜 감사 인사도 안 해?”

“가, 감사 인사요?”

“그동안 잘 못 잤을 것 같아서 수면제까지 처방해 줬잖아. 누구 덕에 지금 이렇게 쌩쌩하게 서 있는지 몰라?”

“……감사합니다.”

“말로만?”

“그, 그럼……”

“뭐가 그렇게 내게 감사한지, 내일 아침까지 양피지 두루마리 열 개 분량올 세세히 써 오도록 해.”

아론은 질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한마디만 해 주면 되었다.

“싫어?”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내 방식 알지? 내일 아침 안에 다 못 써 오면 20개 분량으로 늘어나는 거야. 그리고 중복 문장 안 돼. 단어가 자주 겹쳐도 안되고. 내일 다시 올게.”

나는 산뜻하게 웃어 준 뒤 그의 방을 나섰다.

그에게 제대로 된 조수 일을 줄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아니, 연구실 열쇠조차도 줄 마 음이 없었다.

전혀 소득 없고 발 만 묶어 두는 일들을 시키다가 미끼로 쓸 계획이었다.

“리체!”

기지개를 켜며 연구실로 향하는 데, 디엘이 저 멀리서 뛰어왔다.

“어제 연회는 잘 다녀왔어?”

“응, 밤늦게 와서 피곤한 바람에 늦게 일어났네. 공작님은 일 어 나셨나?”

“새벽같이 일어나셨지.”

디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침부터 기사단 잡으시고, 지 금은 무슨 샴페인 사건? 그거 조사 중이시고.”

나는 알 만하다는 둣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리체, 서신이야. 페렐 르만 자작저에서 방금 도착했어.”

아무리 발 빠른 파발을 썼다고 해도, 지금 내게 서신이 도착할 정도면 아침에 보냈다는 뜻이었다.

나는 복도에서 바로 서신을 펼쳐 보았다.

“음…… 초대장이네?”

펠릭스 오리온 페렐르만 가주가 정식으로 저택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디엘과 찾아갔을 때 차갑고 냉랭하던 반응과는 완전히 다른 어조였다.

“초대장에 내 이름은 없지?”

“응. 하지만 같이 갈까?”

“사양할게.”

디엘이 재빨리 대답했다.

초대장의 날짜는 내일로 적혀 있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음, 디엘. 그럼 네가 여기 남아서 해 줄 일이 있어.”

“뭔데?”

“아론한테 내일 아침까지 양피 지 열 개 분량으로 뭘 좀 쓰라고 했거든. 내가 직접 검사 못 할 것 같으니까 네가 해 주고, 다 못했으면 20개로 늘려.”

“다 했으면?”

“그 자리에서 찢어서 버리면 돼.”

디엘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켜. 「하체 특수 질환의 이해」라는 책을 내가 돌아올 때까지 500번 다 베껴 쓰라고.”

“500번? 그것도 다 쓰면 찢을 거야?”

“아니.”

나는 아주 자비롭게 웃었다.

“주방에 불씨로 쓰라고 직접 갖 다주게 할 거야.”

내 얼굴을 바라보던 디엘이 진지하게 말했다.

“리체.”

“옹?”

“우리 계속 친구하자.”

“뭘, 새삼.”

“그냥…… 너한테 잘못 걸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래.”

“너 몰랐구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원래 똑똑한 사람이 나쁘게 굴면 그게 최악인 법이야.”

마치 이시더 남작처럼 말이다.

***

에르안은 선대 공작이 썼던 집 무실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는 중 이었다.

맨 처음, 호아킨이 성벽에서 리체를 속이려 한 무리들이라며 시체를 끌어내고 있을 때부터 배후를 싹 다 없애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에 반란군이 있다 면 당연히 몰살시켜야 했다.

반란군이 세르이어스 영지를 노 리는 이유는 명확했다.

광활한 공작령 영지, 충분한 병력, 수도와 가까운 천혜의 위치. 게다가 남쪽으로 오랫동안 떠나 버린 불안정한 후계까지.

“……정말……”

성가시다는 둣 내리깐 눈에 짜 증이 담겼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엔 그 가 죽었을 때 누가 영지를 잇게 되는지 제국 법령상 우선순위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맨 위에 적힌 웨데릭의 이름에 그의 경멸 어린 시선이 잠시 머 물렀다.

바보도 아니고, 어린 시절 웨데릭이 그에게 딱히 좋은 형이 아니었다는 건 크면서 진작에 알았다.

“가만히 닥치고 있기만 하면 될 것을.”

열기가 전혀 없는 표정에 감정 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은 중얼거 림이었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사 람을 긴장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에르안은 생각에 잠겨 턱을 한 번 쓸었다.

“지켈”

“예.”

한때는 그의 스승이었으나 이제는 가장 측근이 된 지켈이 공기처럼 있다가 즉시 대답했다.

“가뜩이나 어머니가 나를 마땅찮아 하시는데…… 외숙부와 외사촌을 없애 버리면 너무 패륜인 가.”

이사벨과 리체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모자의 사이가 지나치게 벌어지면 가운데에서 리체가 난 감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생명 존중 사상이 가득 한 리체가 혹시나 자신을 혈연의 피를 뒤집어 쓴 괴물이라고 생각 하면…….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 영지가 무너지면 제일 이득 을 볼 사람들이라.”

“결국 심중뿐이군요.”

노을이 윤곽이 또렷한 에르안의 음산한 얼굴을 비췄다.

부디 그의 의심이 맞지 않기를.

그래서 리체가 평민 남자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자신을 거 절할 때 영지를 넘길 단 하나의 혈육이 무사히 남아 있기를.

“그래…… 그냥 무작정 없애기엔 마지막 이용 가치가 있어서 아깝지.”

그는 머리카락을 쓸며 무심하게 말했다.

“일단은 감시를 붙이는 것으로 하고.”

지캘은 즉시 명령을 따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턱을 괴는 에르안의 얼굴 은 어딘가 스산했다.

그는 반란 군들 같은 비열한 놈들이 일을 치기에 딱 좋은 행사가 곧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켈”

“예.”

“정원의 개미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민트나 계피를 두면 개미가 꼬 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근데 나는 개미집을 찾아내 다 불살라 버리는 타입이 라.”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가 볍게 치며 에르안은 낮게 중얼거 렸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