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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4화 (7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4화

마차에 올라타 서로 마주 앉자 마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공작님.”

“왜?”

“아까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어요? 샴페인 때문에 잠시 살펴보러 가신 건 알고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안 보이시길래 궁금했어요.”

“혹시 모르잖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통 과정에 조금이라도 관여 했던 사람들을 즉시 다 뒤지느라 좀 늦었어. 딱히 수상한 사람은 못 찾았지만 내일은 평상시보다 도수가 높은 와인을 허가한 관리 인까지 조사해 볼 거야.”

“……즉시라뇨?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혹시라도 회귀 전과 다른 상황 일까 봐 어리둥절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에르안이 순간 날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체, 공작성에 반란군 끄나풀들이 숨어들고 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

“이상한 일이 생기면 당연히 끝 까지 털어 봐야지.”

눈빛만 보면 사람 몇은 벌써 묻어 버릴 기세였다.

“특히나 이 연회에는 네가 있었고, 조금의 이상한 일도 난 놓치 고 싶지 않아.”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행보였 다.

공놀이를 못한다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던 꼬마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작은 일에도 철두철미하 게 대처하는 젊은 공작이 있을 뿐이 었다.

“너도 뭔가 눈치를 채서, 내게 그런 일을 시킨 것 아냐?”

“네?”

“말해 봐, 이제. 나한테 왜 그런 이상한 일들을 시켰는지.”

“ 음........”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뭘 알아내려고 했는데, 못 알 아냈어요. 그래서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실패해서.”

결정적인 말을 듣지도 못했는데 신경질을 내고 자리를 떠나 버린 베티아를 생각하니 또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괜히 그 넓은 황궁을 돌아다녀서 발이나 아프고……”

“아프다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에르안이 깜짝 놀랐다는 둣이 반 문했다.

“발이?”

“네, 구두가 평소보다 높은 데 다가 정원을……. 잠깐만요, 공작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에르안은 허리를 숙여 내 치마 를 살짝 걷고, 내 한쪽 발을 들어 자신의 무를 위에 올려놓았 다.

“공작님!”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내 구 두를 벗긴 뒤, 손수건으로 직접 까진 발뒤꿈치의 피를 닦아 주었 다.

“내가 무심했어. 에스코트하면서도 발이 아픈 줄 몰랐네.”

“그건 아마 아무도 알 수 없었 을 걸요? 그런데…… 공작님, 이러시면 안 돼요.”

그리고 그는 내 발을 살살 주물 러 주기 시작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해서 나는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공작이 사용인의 발을 마사지해 준다니.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 마세요, 공작님. 더러워 요. 게다가 체통도……”

내가 아무리 발을 빼려고 낑낑 대도 그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더럽다니. 네 발에 그런 욕 하면 네 입을 가만 안 둘 거야.”

그가 그런 말을 하면서 대놓고 자신의 입술을 살짝 물며 눈꼬리 를 휘어 보이기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발이 정말 작네, 리체.”

“공작님 손이 크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아무리 내가 뻔뻔하다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와중 에도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딱딱했던 발이 풀어지고 있었다.

“좀 괜찮은 것 같아?”

“당연히 혈액 순환이 되니까 상태가 좋아지긴 하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잡힌 채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능숙하게 내 발목과 복사뼈를 주물렀다.

“이르비아에서는 정말 체력 단련을 많이 했거든. 그래서 이런 거에 능숙해.”

“어…… 음……”

“너보다 잘할 거야, 이런 건.”

“애초에 손아귀 힘이 다르니까요.”

그는 다른 발도 구두를 벗겨 낸 뒤 똑같이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다른 신체 부위도 다 잘해. 그러니까 리체, 아픈 곳 있으면 언 제든 말해.”

누가 내 몸을 마사지해 주는 건 또 처음이었다.

나는 묘한 기분이 되어 내 발을 세심하게 매만지고 있는 에르안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대신 남한테는 말하지 말고. 나한테만 부탁해.”

“전 원래 부탁이라면 다 디엘한테 하는데.”

“그 거지 같은 분홍색 머리 다 밀리고 쫓겨나는 꼴을 보고 싶으면 부탁하든가.”

디엘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상당 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안의 눈에는 아닌 듯했다.

거지 같다니…….

어릴 때부터 디엘을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것이 그런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있잖아요, 아까요. 그러니까 발코니 에서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바 라보았다.

“응, 말해.”

“공작님, 좀 다른 사람 같더라고요.”

“……다른 사람?”

“네, 이렇게 다정하시고 섬세하신 분인데…… 그땐 좀……”

“미 안.”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요.”

“네가 놀랐다면 무조건 내 잘못이지. 반성할게. 하지만……”

그가 한숨을 쉬며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유일한 사람이 다른 멍청한 남자랑 즐거워하는 걸 보니까 기 분이 너무 나쁘더라고.”

“멍청하다뇨?”

“몇 마디 나눠 보니 뇌가 아주 청정 지역이시던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전투에는 유능할지 몰라도, 그 외에는 뭔가 순한 기운을 풍겼다.

타고난 성향도 온순한데다가 승전 후에 여기저기서 환영받자 인생에 좋은 날만 남아 있는 것 처럼 잔뜩 들떠 보였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쉽기도 하고.

아마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에도 ‘아, 반란군 명단이야? 주요 인물들이니까 사형시켜!’라며 해 맑게 말하고 잊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황태자에게 그렇 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에르안이 반란군에 들어가서 내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될까 봐 불안해하고 있던 나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남들 앞에서 그런 말씀 하신 건 아니죠?”

“하지만 내 생각인데.”

“그런 생각을 하셔서도 안 돼요. 황태자님이신걸요. 충성을 다 하셔 야죠.”

“음..........”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리체, 내가 충성하는 건 너야.”

“공작님, 아무리 제가 공작님을 생명의 위기에서 이렇게 잘 키웠 다고 해도 그런 단어는……”

“리체, 내 앞에서 황태자 편을 들면 나 슬픈데.”

고분고분한 말투였지만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간 것이 새초롬해 보였다.

“이건 편이 아니죠. 그냥, 그런 건 나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 예요.”

“뭐, 리체 앞에서는 착하게 굴어야지.”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이 부드러 운 어조였다가, 그는 갑자기 불 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좀 낯설었다면 정말 미안해. 혹시 무섭거나 그 랬어? 나한테 정이라도 떨어졌거나……”

왠지 초조하고 불안한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 다.

그가 이럴 때마다 어릴 적의 여린 모습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 는 것 같았다.

“아뇨, 그렇진 않고요.”

나는 턱을 긁으며 민망한 둣이 시선을 피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이제 서로 성인이니까 과도한 신체적 접촉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요.”

“황태자하고 춤도 췄으면서, 나 하고는 그 정도도 안 돼?”

“당연하죠. 공작님은…… 좀 느낌이 달라요.”

“어떻게?”

아무래도 이것이 에르안에게 하 는 내 마지막 정신 교육이 될 둣 했다.

어린 시절 남에게 휘둘리지 말 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던 것처 럼,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 했다.

“물론 공작님께서는 아주 순수 한 의도로, 어린 시절 때를 떠올 리며 하는 스스럼없는 행동이라 는 걸 알아요.”

“음?”

“하지만 저는 알 걸 다 알잖아 요. 자꾸 그렇게 가까이서 얼굴 을 들이대고 눈웃음을 치신다거 나,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이신다거나, 천천히 살갗을 쓸어내린 다거나 하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고요.”

“이상한 생각? 이상한 생각 뭐?”

에르안의 눈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비치기 시작했다.

“공작님을 잘 아는 저니까 그냥 넘어가지, 다른 여자들은 다 유혹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는 나를 나른하게 바라보다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래?”

그가 마사지하고 있던 내 발을 아까보다 더 느릿하고 부드럽게 쓸었다.

“몰랐네……”

또, 또 요망한 목소리에 요염한 눈웃음이 었다.

나는 새침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앞으로는 유의하세요. 저니까 이런 말씀을 해 드리는 거예요.”

“리체.”

“네.”

“그럼 유혹당할 것 같아? 충분 히 매력적이긴 했어?”

“당연하죠. 공작님도 매일 거울 보실 거 아니에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는데, 에 르안의 눈썹은 재미있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꼭 좋아하는 여자한 테만 그러셔야 해요. 안 그러면 인생이 정말 많이 피곤해지실 거 예요.”

“알았어. 난 리체 말은 다 잘 듣지.”

그가 내 발목을 쓸며 씩 웃었다.

“네 말대로 할게.”

즉시 튀어나오는 온순한 대답 에, 나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다른 거처도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에르안 밑에 있다가는 공작성에 뼈를 묻어야 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과를 받았다고 해도,  발코니에서 느껴지던 그의 선명한 소유욕은 섬뜩했다.

‘왜 공작성의 사용인들이 바짝 얼어 있는 줄 알겠어.’

내가 설렁설렁 근무해도 괜찮다 는 이사벨 마님과 에르안은 확실히 달랐다.

회귀 전, 샴페인 유통 문제가 터졌을 때 이사벨 마님은 유통자에게 큰 징계를 주고 끝냈지 이 렇 게 가족들까지 조사시키 지는 않았다.

이번에 샴페인 사건 관계자들을 샅샅이 뒤지는 걸 보니 나 역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갈려 나갈 확률이 높았다.

만일 내 혈연은 끝끝내 못 찾더라도, 오히려 그래서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러려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잘 맞춰야 했다.

내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니라서,  세르이어스 성이 최고의 직장이 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회귀 전에는 스스로가 너무 잘 난 나머지,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을 때 떠 오르는 얼굴이 아무도 없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이번 생은 그래도 좀 나은 것 같다.’

지금 사형 선고를 받는다면 많 은 사람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딸처럼 생각해 주시며 밤새 곁 을 지켜 주신 이사벨 마님, 무뚝 뚝한 얼굴로 잔뜩 선물을 가져오 는 페렐르만 자작, 간이 심하게 작기는 하지만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디엘, 처음으로 내 편 이 되어 주겠다고 한 세이린.

그리고 어릴 때 잘 보살펴 주고 처방을 잘해 주었다고 해서, 한 낱 사용인의 발까지 망설이지 않 고 주물러 주는 상냥한 에르안까지.

‘다 내가 회귀 후에 다른 영지로 도망가지 않고, 이타적이고 숭고한 선택을 한 덕분이겠지.’

어쨌든 빨리 그에게 잡힌 발을 빼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만 눈이 감겼다.

내 고개가 창문에 떨어지려는 찰나, 급히 받쳐 주는 팔이 어렴 풋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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