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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3화 (7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3화

나는 천천히 일어나 그녀의 옆 에 다가갔다.

“……어떻게 말하지.”

“네?”

“아르가, 그 자식이 북부 지역 에서 돌아오면…… 이걸 어떻게 말하느냐고.”

그녀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 다.

오라버니, 아르가 그 자식, 그 인간……. 부르는 호칭은 제멋대로였지만 역시 가족은 가족인지,  가장 걱정이 되는 사람인 듯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시더 남작님이 선의의 거짓 말을 하셨다는 거, 믿으세요?”

“아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대답은 빨랐다.

“우리 오라버니는 누군가에게 그런 배려를 받을 정도로 사람이 좋지 않아.”

“……네, 그건 그렇죠.”

역시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예상외의 곳에서 이시더 남작과의 고리를 알아낸 나는 침착하게 세이린 경을 바라보았다.

“그럼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괜히 아이를 받았다가 자신이 처치를 잘못해서…… 혹시나 보 복당할까 봐 시오니와 아이를 죽 인 걸까?”

혼자 중얼거린 세이린 경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왜요?”

“시오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영리해. 아무런 단서 없이 쉽게 죽어 줬을 리 없다.”

“그..그래요?”

“진짜야. 꼭 너만큼……”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아냐.”

그녀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여 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조용히 눈물을 찍어 내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는 조 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사실, 이시더 남작님을 의심하고 있었어요. 요즈음 공작성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서요.”

“거기 오랜만에 시체들이 걸리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제 생각에는 페렐르만 자작님이 공작성에서 떠나도록 이시더 남작님이 악의적으로 거짓말한 게 아닌가 해요.”

나는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이시더 남작은 공작님의 외숙부야. 어릴 때부터 가까웠던 사이고. 그런데 대체 왜?”

“공작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가까운 친지가 웨데릭 님이시지요.”

“리체 에스텔.”

세이린 경은 손수건을 내게 건 네며 차갑게 경고했다.

“그런 의심을 한낱 평민인 네가 함부로 품으면 안돼”

예상했던 반응이었어도 풀이 죽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총애받고 있다고 쳐도 네 목숨이 아깝다면 말이야”

“....알고 있어요”

내가 기운없이 대답하자, 세이린 경이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그러니 나 외에는 다른 사람에겐 함부로 그런 추측을 말하지 마”

“네?”

“내가 네 편이 되겠다고.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니.”

이상하게 심장이 아릿해지는 기 분이 었다.

회귀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에 게 사랑받았고, 이런저런 일을 시킬 수 있는 디엘도 있었지만 정말로 ‘내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이시더 남작 의 실체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나를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감시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 편’이라고 말 해 주었다.

“어쨌든 이 일에 이시더 남작이 엮여 있는 건 사실이니까. 당장 그 작자를 잡아다가……”

“증거가 없잖아요. 에이비크 자 작의 중언이야 번복하면 그만이 에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 말씀드릴 생각 없었는데…… 저도 너무 충격적이라서 말씀드릴게요.”

세이린 경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어차피 다 꼬리인 사람들이에요. 머리는 아니고요.”

“머리라면?”

“이시더 남작도, 에이비크 자작도 반란군 소속이거든요.”

“뭐? 그건 아주 옛날에나 있었던 소문이야.”

“공작성에 걸린 시체 중 하나가 내뱉은 말이에요. 배후가 반란군이라고.”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분명 올해가 가기 전에 반란군이 궐기할 거예요.”

“네 말을 믿기 어렵지만……”

세이린 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주워 들었다.

“네가 오늘 판을 짜는 걸 보니 이상하게 시오니가 계속 떠올랐어.”

“네?”

“그 초록색 눈이 반짝거릴 때면 또 무슨 수를 쓰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예전에 디엘이 심부름을 와서 아르가 놈이랑 똑같은 조수가 왔다고 떠드는 걸 들은 적이 있지. 그런데 오늘 내가 널 직접 보니 까 말이야.”

그녀가 검을 검집에 꽂으며 중얼거렸다.

“……시오니가 더 생각나.”

우리는 보름달 아래 그렇게 둘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저 멀리서 연회의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주 먼 세상 같았다.

페렐르만 자작이야 한참 뒤에야 북부에서 돌아오겠지만,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원하는 대로 다 되지는 않았지 만 대체로 운이 좋은 하루였다.

황태자에게 언제든 방문해도 좋 다는 허가를 받았다.

베티아와 에이비크 자작을 이용 해서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내막을 다 털어놓고, 계속해서 내 편이 되어 줄 귀족이 생겼다.

그런데도 세이린 경과 함께 조용히 서 있자니, 내 가족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서글폈다.

“리체라고 했지?”

“네.”

“년 왜 반란군에게서 세르이어스를 지키려고 하는 거지?”

“생명 존중 사상과 세계 평화주의 때문에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제가 진짜 선량하고 마음씨가 고운 데다가, 그만한 능력도 있 는 바람에……”

말하면서도 내가 너무 대의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 한숨이 나 왔다.

“이렇게 된 거죠.”

세이린 경이 픽 웃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정말로 세르이어스의 사람들이 소중해졌거든요. 제 대부님이신 페렐르만 자작님도 포함해서요.”

내가 담담하게 말을 잇자, 세이린 경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이 혼란스러운 둣 흔들렸다.

“나는…… 아무 방법도 생각이 안 나. 무식하게 그냥 검을 들이 대는 것밖에는. 솔직히 그냥 이 시더 남작의 배에 검을 쑤셔 넣고 싶어.”

“안 돼요. 그러면 혹시 모를 조카분의 단서마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잖아요.”

당장이라도 연회장에 달려갈 것 같은 기색에 내가 즉시 말리자, 그녀가 열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오누이가 이 모양이니,  오라버니도 반쯤 미쳐서 온 대륙을 다 뒤지고 있겠지.”

“..............”

“네게 없는 걸 나는 다 가지고 있어. 귀족 작위와 신체적 능력 말이다. 그러니 나를 최대한 이용해 주렴.”

스무 살 정도 어린 내게 그녀가 진지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자신 을 쓰라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누구를 이용해요. 같은 편이라면서요. 저희는 함께하는 거예요.”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한배를 탄 거라고요.”

생각해 보니 누군가와 운명 공 동체가 되었다는 느낌이 처음이었다.

예민하고 경계심 많던 그녀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이윽고 단단하고 상처가 많은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굳게 잡았다.

***

“리체, 어디 갔었어?”

세이린 경과 함께 연회장에 다 시 돌아가니, 에르안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정작 찾을 땐 없더니……. 아냐, 어차피 상관있는 내용도 안 나와서 별 소용도 없었겠지.’

결과적으로는 페렐르만 집안의 일을 알게 되었으니 적당한 상대를 데려간 셈이었다.

“이쪽은 페렐르만 자작님의 여동생이신 세이린 리즈 페렐르만 경이세요.”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에르안은 살짝 머쓱한 표정이었다.

저 멀리 있는 이시더 남작을 무 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세이린 경의 허리를 툭 치면서,  나는 그녀에게도 에르안을 소개 했다.

“에르안 일리아드 세르이어스 공작님이 시고요.”

둘은 끔찍하게도 서로에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팍팍 티 내면서 대충 예를 갖추었다.

에르안은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가자, 리체.”

“그럴까요?”

연회는 이제 막 무르익는 것 같 았지만, 더 이상 딱히 별 볼 일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평소에 움직임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때 아닌 추격전에 꽤 지쳐 있기도 했다.

“세이린 경은……”

“나는 조금 더 있다 갈 거야.”

그녀는 이시더 남작을 눈빛으로 죽이려고 하는 사람처럼 그쪽을 바라보며 섬뜩하게 말했다.

아마 적을 두고 갈 수 없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뚫어지게 관찰한다 한들 소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에이비크 자작 같은 사람은 몰 라도,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이시더 남작이 이런 곳에서 꼬리를 밟힐 리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자유 의지를 존중 했기 때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세이린에게 섣부른 행동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짧은 언질만 주었다.

그렇게 세이린 경과 헤어지고, 나는 에르안과 함께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탔다.

지금 출발해도 꽤 늦은 밤이 되 어서야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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