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2화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에르안 일리아드 세르이어스입니다.”
낮으면서도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에르안이 그에게 다소 성의 없이 예를 표하는 것을 지켜본 제이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세르이어스 공작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들었지. 아, 그 공작성의 조수에게는 크게 은혜 를 입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한번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공작 령이 새롭게 젊은 주인올 맞아 들였으니 이제 죽 평온하겠군.”
제이드는 나름 분위기를 부드럽 게 만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에르안이 전혀 웃지도 않고 낮게 말했다.
“제가 돌아오고 벌써 세 구의 시체가 공작성에 걸렸습니다.”
“홈,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그중 하나를 심문하다가 말씀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어 부득이 왔습니다.”
에르안은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을 이었 다.
“공작성의 첩자 중 하나가 배후 에 반란군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건 그냥 헛된, 아주 옛 날 소문……”
“그 첩자는 공작성에서 10년을 넘게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셈이죠.”
황태자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에르안이 고개를 살짝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부디 전쟁터에서만 날아다니는 머저리는 아니시길 바랍니다.”
케인즈는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그 무례를 지적하지도 못했다.
“공작성의 피는 제 손에 기꺼이 묻히겠지만, 그치들이 세력을 키우는 꼴을 볼 수는 없어 말씀드 리는 겁니다.”
에르안의 눈빛이 형형했다.
해적 소탕에 5년이나 걸려서 리체를 오랫동안 못 본 것, 리체와 첫 춤올 춘 것, 리체와 웃으며 이야기를 한 것……
황태자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 지 않아 죽을 것 같았다.
몸은 좋아 보였지만, 뭔가 맹해 보이는 눈동자를 보니 벌써부터 속이 답답했다.
과연 자신이 도발하듯 ‘머저리’ 라는 단어를 썼는데도 어리둥절 하게 멍하니 있는 꼴이 전형적인 ‘전쟁에서 이기는 법밖에 모르는 바보’ 같았다.
게다가 반란군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당혹감이 분노보다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반란의 무리는 실재하고 여기 저기서 괜히 피해 보는 사람이 생기니, 황실 측에서 신경 써 주 시길.”
솔직히 말하면 그는 황실에 대 단한 충성심 같은 건 없었다.
굳 이 척질 정도의 동기가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달랐다.
그들은 리체에게 가짜 부모를 만들어 상처를 줬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뿌리를 뽑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음.........”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차피 나한테 다 질텐데 반란이라는 헛짓거리를 왜 하지? 알아서 그만두지 않을까?”
에르안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쉬었다.
리체가 이딴 맹한 놈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리체는 남자를 판단할 때 지능 이라는 변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이 모지리는 못 믿겠 군. 검은 좀 쓸지 몰라도 머리는 꽃밭이야.’
몇 마디 말을 나눠 보고 결론을 내린 에르안은 들끓는 속을 가라 앉히며 다시 리체를 찾기 시작했다.
***
나는 당장 달려 나가려는 세이린 경의 허리를 필사적으로 끌어 안았다.
그리고 급히 속삭였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요. 조금이라도 더 엿들어야 해요.”
“……너는 남 일이니 침착할 수 있는 거야. 놔.”
세이린 경의 숨이 거칠었다.
“나는 팔다리 하나씩 잘라 가며 대답을 들을 테니까.”
“그럼 혼자 나가세요.”
어차피 힘으로는 내가 밀릴 것이 뻔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쑥 했다.
“전 빼시고요. 저는 평민이라 뒤를 밟았다는 걸 들키면 신변이 위태 로워 지거 든요.”
세이린 경이 갈색 눈을 부라려 서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었다.
“사실 저는 듣고 싶은 말이 더 있는데…… 워낙에 착하고 마음 이 여려서 놓아 드리는 거예요.”
“뭐?”
“조카분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 아니까. 아, 그리고.”
나는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혹시 위험해지시더라도 못 구 해 드려요. 저는 의학 말고는 잘 하는 게 없어서요. 괜히 나서다 가 저마저 들킬 수는 없거든요. 그건 알고 가세요.”
“너……”
세이린 경이 나를 가만히 바라 보았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은 그 녀의 표정이 기이했다.
그 사이에 베티아와 에이비크 자작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 지? 금발에 녹안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된 다.”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시는 데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인연을 이어 온 웨데릭 님을 네가 배신하면 안 된다는 거야.”
“고작 그런 말을 하시려고 저를 여기까지 불러내신 거예요? 실망이에요, 아버지.”
베티아가 짜중을 냈다.
“베티아, 그게……”
“됐어요. 전 공작님께 가 보겠어요. 멸치같이 생긴 웨데릭 님 에 대해서는 더 얘기하지도 마세
베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핵 뒤를 돌더니 황궁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 끝까지 도움 안 되는……. 여기서 성질 못 이기고 튀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더 캐묻고 더 긁었어야지!’
에이비크 자작은 베티아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분노에 들끓는 표정으로 세이린 경이 검을 빼 들고 순식간에 그 의 목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만히 몸을 끌어안고 수 풀 속에 몸을 숨긴 뒤 그들을 가 만히 바라보았다.
‘열심히 판을 짰는데 결정적인 말을 못 들었네.’
이제 남 일을 구경하는 건 내가 되었다.
‘뭐, 에르안도 없었으니까…….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나저나 나름 충격적인 사실이 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페렐르만 자작의 18년이 고스란히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딸을 찾았 는지 알기 때문에 나 또한 허탈 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관절염을 돌봐 주지도 않으며 몇 년째 집에도 안 들어 오는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 펠릭스 어르신이 생각났다.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던 정원과 곧게 뻗은 대리석 길이 눈에 선했다.
검을 빼 들고 뛰쳐나간 세이린 경의 마음도 그와 비슷하겠지.
“딸까지 저승길로 보내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대답해.”
세이린 경이 이를 갈며 에이비크 자작을 노려보았다.
그 새에 베티아는 시야에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조카가 금발에 녹안이 아니라니?”
“세이린 리즈 페렐르만 경? 어, 어떻게 여기를……”
“오라버니가 평생 딸을 찾지 못할 거라니? 설명해.”
“그, 그냥…… 제 딸이 철없게 굴기에 그냥 급히 만들어 낸..........”
그녀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아 붉은 실금을 만들어 냈다.
에이비크 자작이 다리를 후들후 들 떨기 시작했다.
“당신,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면 고, 고발을……”
“얼마나 구석으로 왔는지 사람 이 하나도 없어. 너 하나 죽이고 묻어 버리는 건 일도 아냐.”
“정말입니다! 정말 저는…… 저 는 그 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둣 대답했다.
“그럼 내 조카는 금발의 녹안이 아니라, 어떻게 생긴 거지?”
세이린 경의 검이 더 깊이 들어 갔는지, 그가 비명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뭐? 분명 이시더 남작이 직접 그 아이를 받았다고 했어.”
“시오니 님이 딸을 추, 출산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에이비크 자작의 푸른 눈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소, 소, 솔직히 말 하면, 그, 그 아이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
“진짜입니다! 이시더 남작님께 서는……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삶의 의욕을 잃으실까 봐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뿐입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건 거짓말이다.
내가 ‘남 일’이라고 생각해서 대충 넘긴 퍼즐 한 조각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딸을 이시더 남작이 받았다니, 그것부터 의심을 했었어야 했다.
이시더 남작이 거짓 정보를 알려 주어, 페렐르만 자작을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주치의 자리에 서 밀어내려고 한 것이다.
‘어떡해…… 내 생각보다 너무 치밀해.’
저 멀리서 황궁 경비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덜덜 떨면서 응얼거릴 땐 언제 고, 에이비크 자작이 소리를 질렸다.
“여기! 여기에 사람이 있소!”
경비대원 둘이 달려오자, 세이린 경이 서늘한 눈으로 검을 치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세이린 경은 이를 갈며 말했다.
“이자가 치근덕대기에.”
“……그러시면 안 되죠, 자작님.”
에이비크 자작은 씩씩거리며 세 이린 경을 노려보았지만, 어쨌든 그녀에게서 벗어났다는 것 하나 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경비대에게 연행되는 에이비크 자작의 뒷모습을 보며 세이린 경이 한숨을 쉬었다.
에이비크 자작의 피를 먹은 검이 툭, 하고 잔디밭에 떨어졌다.
아무도 없는 황궁의 정원, 보름달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 우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진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간신히 작은 희망을 가 지며 버티고 있던 18년의 세월이 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