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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1화 (7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1 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케인즈 경이 끝까지 내게 경어를 쓰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잘 생각해 볼게요.”

내 성년 즈음에 반란군들이 여 기저기서 들고 일어날 텐데, 그 이후 상황을 좀 봐야 했다.

그러고 보니 반란군의 최종 배후가 누군지 나는 알지 못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반란의 마무리를 보기도 전에 웨데 릭은 처참하게 가장 먼저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연회장 구석에서 웨데릭이 베티아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쌩하니 멀어진 베티아의 뒤에 남겨진 웨데릭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그나저나 에르안은 왜 이렇게 안 오지?’

에르안은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주인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영지에서 공급한 물품에 문제가 없는 지 확인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확인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아직도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리체 양.”

케인즈와 의학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있는데, 제이드 황태 자가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

“네, 황태자님.”

“연회는 잘 즐기고 있나?”

그가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 치며 씩 웃었다.

“초청한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바빠서 리체 양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네.”

“괜찮아요. 저도 바빠요.”

신경 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 었다.

“아까 그 소란스러운 현장에서 멋지게 한 영애를 진정시킨 건 잘 봤어.”

“진정이라기보다는…… 홈.”

“역시 리체 양은 똑똑해 보일 때가 가장 예쁘더군.”

원래 그런 거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에이비크 자작이 베티아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드디 어 보았다.

‘안 돼! 아직 에르안이 안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얼버무렸다.

“황태자님 칭찬에 너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개인 열 추적기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배운 대로 우아하게 예를 갖췄다.

“수줍은 나머지 더 듣지 못할 듯하여,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 다. 좋은 시간 되세요.”

황태자와 케인즈 경을 두고 뒤를 돌자마자 나는 다급히 나침반 처럼 생긴 개인 열 추적기의 바늘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바늘이 가리키는 곳 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 에르안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대체 왜 안 오는 거지?’

물론 나 혼자만 그녀를 뒤쫓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감시하는 역할인 세이린 경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베티아와 에이비크 자작은 붐비 는 황궁을 나가 한참이나 멀리까 지 이동했다.

워낙에 사람들이 많고 황궁의 구조가 복잡하여 중간에 놓친 적 도 있지만 개인 열 추적기가 있 어서 쫓아가기가 쉬웠다.

내 몸이 날랜 편이 아니었기 때 문에 개인 열 추적기가 없었다면 무조건 놓쳤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정원 한구석에서 드디어 부녀는 멈춰 섰다.

나는 근처의 수풀에 조용히 몸 을 숨겼다.

그리고 내 옆에 세이 린 경이 자리를 잡았다.

“수상하군.”

세이린 경이 낮게 말했다.

“부녀간의 대화를 나누려고 이렇게 외진 곳까지 와?”

“그러게요.”

동시에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에르안을 못 데리고 오고 말았다.

원래 에르안과 함께 엿들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네 짝은 웨데릭이라고 몇 번을 말하느 냐!”

에이비크 자작이 딸의 팔을 붙 잡고 짜증을 냈다.

“웨데릭하고 얘기도 안 나누고,  눈도 안 마주치면 아비의 얼굴이 뭐가 돼? 네가 어릴 때부터 양가 에서 합의가 된……”

“저는 공작님이 더 좋아요. 저 도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베티아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공작님도 제가 마음에 드는 눈 치고요. 공작 부인 자리가 눈앞에 있는데 아버지는 어찜 그렇게 꿈이 작으세요?”

“뭐?”

“고작 남작가 영식에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은 남자와 공작님이 지금 비교나 되나요?”

에이비크 자작은 답답한 둣이 가슴을 쳤다.

“그 비실이가 공작 자리를 얼마나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 는 거냐?”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에르안이 직접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적어도 세이린 경이 듣고 있으니 중인이 생기는 셈이었다.

‘얼른 말해, 얼른!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이 에르안을 죽일 예정이라고!’

꽉 쥔 주먹에 땀이 배었다.

“아버지는 눈이 없으세요?”

베티아는 말도 안 된다는 둣이 대들었다.

“아니면 설마 비실거린다는 말 뜻을 모르시는 거예요?”

에이비크 자작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어릴 때 얼마나 몸이 약했는지 네가 알……”

“그건 옛날 얘기잖아요. 지금은 남부 지역으로 요양도 다녀오셨 고요.”

“다시 올라왔으니 언제 약해질 지 모르지.”

“공작가 주치의가 뛰어난 거 모 르세요? 조수만 해도 꽤 실력이 좋던데.”

나는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괜 한 에르안의 건강 얘기 말고, 속 시원하게 말했으면 했다.

‘웨데릭이 에르안을 배신할 예정이고 공작령을 먹을 계획이니 까 웨데릭에게 잘 보이라고 말을 해! 얼른!’

확실히 세이린 경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남 일인지, 그녀는 손톱 밑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님이 잘 돌봐 주 시겠죠. 의술로는 그분만큼 뛰어 나신 분이 없다던데.”

“제 딸을 찾느라 눈이 뒤집혀 있는데 무슨. 제정신으로 누굴 돌볼 여유라도 있겠느냐?”

“18년간 거의 대륙을 다 뒤지지 않았어요? 곧 나오겠죠.”

베티아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에이비크 자작이 그녀를 놓아준 뒤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그 딸? 어차피 절대 못 찾는다.”

하품을 하고 있던 세이린 경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이게 무슨 전개야?’

나는 불안함에 눈을 굴렸다.

“베티아.”

에이비크 자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불쌍한 아르가는 평생 제 딸을 못 볼 거야.”

“왜요? 제가 듣기로, 페렐르만 자작님은 이시더 남작님의 말씀 대로 금발에 녹안인 여자 아이들 을 모두 다 살살이 훌고 계신다고.......”

“왜냐하면 그건 거짓말이거든.”

나조차도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세이린 경의 손이 그녀의 허리 춤에 자리 잡고 있던 검으로 향했다.

***

“케인즈 경.”

제이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무래도 리체 양이 나를 좋아 하는 것 같아.”

“그러신가요?”

“부끄럽다니, 수줍어서 가 보겠다니……. 그게 리체 양 성격에 할 말인가?”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동안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말 이었죠.”

케인즈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벌써 그녀의 예외가 된 거야.”

제이드가 심호흡하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춤을 추는데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더라고.”

“아…… 그랬습니까?”

“책에서 봤는데, 상대가 호감을 표시하면 빠르게 반응해야 한다고 했어. 그래야 지치지 않는다고 말이야. 리체 양이 한 발자국 다가와 줬으니, 이젠 나도 다가 가야겠지?”

“……리체 양이 마음에 드십니 까?”

제이드는 이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그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귀족 영애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역시 황후의 가르침대로, 최대한 집안이 좋고 참한 영애들과 즐거운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눈을 리체처럼 똑바로 쳐다봐 주지 않았다.

결국 자유 도시에서 리체가 가 까이 얼굴을 들이댈 때처럼 강렬한 떨림도 없었다.

“하, 케인즈 경.”

고뇌에 빠진 제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첫정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야.”

5년 만에 전쟁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웃어 준 여자가 바로 리체였다.

“자꾸 그녀가 기준이 되어 버린다고.”

“리체 양이 훌륭하다는 건 인정 하지만, 평민입니다. 기준으로 삼기엔 너무 독특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토록 적극적으로 내게 호감을 표시하는 여자도 없었 는걸.”

“귀족 영애들이야 다들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는 속이 보일까 봐 그러는 거죠. 리체 양은 잃을 게 없고요.”

케인즈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절 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 있어서는 훌륭한 주군일 지 몰라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진중하지를 못했다.

아니, 조금 더 정정해야 했다.

무조건 때려 부수는 전쟁 빼고는 모든 면에서 통찰력이 아직 부족했다.

너무 선량하고 사람의 호의를 잘 믿는 것은 아닌지, 케인즈는 그가 걱정이 되었다.

승전 이후 여기저기서 칭송해 주니, 황궁에서 만나는 모든 사 람들에게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긍정적이고 대인 관계에서 순진 한 것은 분명 인간으로서 장점이었으나, 황태자라는 자리에 어울 리는지는 미지수였다.

어릴 때 막둥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으며, 비록 5년이 걸렸으나 첫 출정에서는 승리를 쉽게 거두었다.

황실은 전쟁터만큼이나 복잡한 곳인데 매사에 너무나 순진하니...

“그런데 말이야.”

제이드가 태평하게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저 남자가 세르이어스 공작 맞지? 이번에 작위를 이양받은.”

케인즈는 제이드가 가리킨 남자 를 흘끗 보았다.

얼핏만 봐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지닌 검은 머리의 청년이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상이 별로군. 뭔가 마음에 안 드나 봐.”

“리체 양에게 책과 초대장을 건 네주러 갔을 때 보았는데, 원래 좀 성격이 이상한 것 같았습니 다.”

케인즈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 인상이 더러운 에르 안이 연회장을 가로질러 그들에 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뭐 잘못했나?”

제이드는 에르안의 이글이글한 눈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쳤던 그이지만, 에르안을 보니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절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인데.’

검을 쓰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 아보는 법이라, 제이드는 그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단번 에 알아챘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의 뒤에 많은 시선이 꽂히는 것을 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이 제이드만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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