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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70화 (7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70화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숨결 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였 다.

“어머, 베티아!”

“베티아 영애!”

음악이 순간 멈추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품을 벗어나 홱 뒤를 돌았다.

누가 찬물을 뿌린 것처 럼 화들짝 정신이 드는 것 같았 다.

“리체?”

“잠시만요, 공작님!”

발코니를 벗어나 정신없이 뛰어가니, 비틀거리며 연회장 바닥에서 일어나는 베티아가 보였다.

“괘, 괜찮아요. 아, 왜 이렇게에 세상이이 돌지? 고오작 샴페인 세에 잔 마셨을 뿐인데……”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베티아 님, 정신 드세요?”

“응, 나아, 멀쩡해. 그런데 그냥,  몸이 마알을, 안 듣는 것뿐이야. 어얼마 많이 마시지도, 아않았는.......”

“저 알아보시겠어요?”

…… 발목 고쳐 주운, 조수.”

“네, 맞아요.”

“흐으응……”

“제가 금방 괜찮게 해 드릴게요.”

시선이 또 내게 쏠렸다.

하기야, 갑자기 술에 취해 쓰러진 귀족 영애와 때마침 달려온 의사라니. 구경거리에 딱 좋은 조합이었다.

어느새 가까이에 세이린 경이 있었고, 시선이 닿는 곳에 황태 자도 있었으며, 바로 옆에는 에르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종에게 물을 청한 나는 재빨 리 치맛단에 장식으로 달아 놓은 포티셀리아 꽃을 행군 뒤 바로 꽃잎을 따서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한 송이 가지고는 턱도 없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포티셀리아 꽃잎을 먹였다.

그 와중에 체온을 조금 높이는 포티셀리아 꽃의 수술까지 잘 섞어 입에 집어넣었다.

“삼켜 보세요. 달달해서 괜찮을 거예요.”

회귀 전, 나는 승전 연회에 대해서 조금도 몰랐지만 세트이어스 공작령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보통 연회에 납품하는 샴페인은 도수가 아주 낮다.

술에 고주망 태로 취하라고 있는 연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 이번에 최초로 허가를 받은 샴페인 도수는 상당히 높았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숭전 연회에서는 얼큰하게 취한 사람이 무수했고,  구설수에 오를 만한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연회가 끝난 후 의원에서 차례 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가십을 떠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티셀리아 꽃잎은 빠르게 술이 깨는 것을 도와주는 데에 가장 효과가 좋았다.

연회에서 약병을 들고다닐 수 없으므로 장식으로 가져온 것 뿐이었다.

“별 거 아니예요. 금방 술이 깨실 거예요”

그러면서 손목에 몰래 숨겨둔 열 추적기를 그녀의 체온에 인식시키는 것을 잊지않았다.

포치셀리아 꽃의 수술을 먹였으니 남들보다 체온이 살짝 높아져 있을 예정이었다.

유효시간이 3시간 이었지만, 그 안에 분명히 일이 일어난다는 확신이 있었다.

“저기, 저기에 잠시 앉아서 기다리실까요? 제가 계속 몸 상태 확인해 드릴게요.”

나는 베티아를 부축해서 연회 구석의 의자에 앉혔다.

구경이 다 끝났다는 듯이 음악이 다시 울리고, 사람들은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에르안은 세르이어스 영지에서 올라온 샴페인에 혹시나 문제라 도 생겼을까 봐 확인하러 떠났다.

어차피 미리 허가를 받은 샴페인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 을 것이다.

게다가 베티아가 이렇게 취한 것은 에르안이 권한 상당히 많은 양의 술을 그녀가 거절하지 않고 빠르게 마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세르이어스산 샴페인을 마셔도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시종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질 동안, 나는 베티아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대충 기운을 보니 서서히 정신 이 들고 있는 듯했다.

“후우.”

베티아가 손부채를 부쳤다.

“……고마워.”

나는 물을 건네주며 말했다.

“공작님이 첫 춤을 추신 분이신 걸요. 당연해요.”

내 말에 베티아의 얼굴에 뿌듯 한 미소가 걸렸다.

“네 생각에도…… 공작님이 나 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 지?”

“글쎄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며 나는 어깨를 으쑥했다.

“웨데릭 님과 이런 문제로 얽히는 걸 싫어하실 것도 같고요.”

“……그건 그래.”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소유욕 이 남다르신 분이라.”

내가 말하면서도, 아까 발코니에서의 일이 떠올라 흠칫했다.

“하긴. 자기 주치의가 다른 손님의 발목 보는 것도 싫어하시는 분인데, 당연하겠지.”

황태자님과 춤을 췄다고 선명한 불쾌함을 드러내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그 소유욕의 범위에 대 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황실 연구진 자리를 제안한 것이 극도로 마음 에 안 드는 듯했다.

‘나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설마 자기 옆에서 결혼도 하지 말고 평생 주치의로 살라는 뜻은 아니겠지.

어릴 때처럼 항상 자신을 우선 순위로 두라는 말이 꼭 그렇게 들렸다.

하긴 이대로 있다가는 평민 남자라고는 디엘밖에 못 만날 테니 어차피 결혼은 글렀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내 먼 미래보다는 일단 베티아 의 가까운 미래가 중요했다.

“베티아 님의 마음은 어떠신데요?”

“비할 바가 되니? 공작성의 주인과 고작 남작 아들하고.”

“그러면 그걸 확실히 보여 주셔 야겠네요.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

“네 말이 맞아.”

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어설픈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나는 또렷하게 초점이 들어온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고 일어섰다.

“이제 정신이 다 돌아오신 것 같아요. 내일 숙취가 있을 수 있 으니 꿀차에 이르본 뿌리를 넣어 드시고요.”

“고마워.”

베티아가 도도하게 말했다.

“그런데 혹시, 피부에 좋은 시약 같은 건 없을까? 에이비크 자작저로 좀 보내 줄 수 있니?”

“네?”

“내가 공작성의 안주인이 되면 네 고용인이 되는 셈이잖아. 내게 미리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을 텐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시간을 돌려도 사람은 참 안 변 한다.

에르안은 공작령에서 올라온 샴페인을 확인하느라 한참 동안 모 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나 싶은 일이었는데 이상했다.

“역시 처치가 훌륭하시군요.”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케인즈 경이었다.

“물론 숙취 약물도 좋지만,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에 는 생화의 꽃잎이 최고지요.”

“운이 좋았어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때마침 제가 장식으로 쓰고 있 어서요.”

“곧 성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케인즈 경은 내게 음료수를 권하며 은근슬쩍 물었다.

“계속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계 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지금 이사벨 마님이나 에르안의 태도만 보면, 페렐르만 자작을 쫓아내고서라도 나를 주치의로 두고 싶어 할 것 같았다.

나 역시 지내다 보니 대우도 좋고 편안한 공작성의 주치의 자리 를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 에르안과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후, 생각이 좀 변했다.

‘분명히 분위기가 야릇했단 말 이야.’

내가 업어 키운 고용인을 대상 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예전에 무기고에서 피치 못하게 안겨 있을 때 ‘아, 몸 좋네.’라고 생각한 것과는 아예 달랐다.

질투심에 일렁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와 내 허리를 끌어안는 그 의 손길이 아직까지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심장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위험해. 위험하게 컸어. 아마 자기가 유혹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

예쁘게 접히던 눈 밑의 살을 떠 올리자 또 다시 귀가 달아올랐 다.

‘물론, 자기를 살려 준 주치의가 떠날까 봐 불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식으로 잡으려고 하면, 알 거 다 아는 나는 이상 한 쪽으로 혼들린다고.’

평민들이 귀족 영식들을 마음에 담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제국법상 신분이 다르면 정식혼이 불가능하고, 사생아도 인정되 지 않는다.

측실을 인정하는 것은 황족들뿐이었다.

덕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영지 에서도 하녀들은 피임약이나 아 이를 떼는 약 등을 처방받으러 나에게 오곤 했다.

다 순간의 본능과 욕정에 휩싸 여서 생기는 비극이었다.

물론 에르안은 절대로 나를 그 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 다.

그러므로 이러한 야릇한 분 위기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냥 그가 무의식적으로 풍기는 기 운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황태자가 제시한 자리에 도 저렇게 질투하는 마당에, 내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이 우선순위 뒤로 밀리는 걸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일이 끝나도 공작성이 내 게 가장 좋은 직장인가에 대해서 는 조금 생각을 해 봐야 했다.

“아직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러면 혹시 입대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 입대요?”

“예. 군의관은 평민에게도 열려 있고, 일정 기간만 지나면 기사 서임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갑자기 선택지가 너무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옛날에는 영지 구석에서 개인 의원을 여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 가 없었는데.’

“음…… 생각해 볼게요. 아까 황태자님께서는 황실 연구진도 말씀하셔서.”

“황실 연구진보다는 군의관이 더 제가 뒤를 봐 드리기 좋을 겁 니다.”

케인즈 경은 포기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황실 연구진은 하엘던 황자님 소속이라 정확히 말하면 황태자 님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지만 군의관으로 들어오시면 제가 상관으로 있는 거지요.”

“왜 제 뒤를 봐주시는데요?”

“리체 양이 아니었으면 저는 황태자님의 한쪽 눈을 실명시켰다는 실책으로 인해 징계를 받았을 테니까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 보았다.

“원래 기사 서임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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