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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69화 (6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9화

제이드 황태자는 두 번째 춤을 청했지만 나는 아직 연습이 부족 하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그를 맴돌고 있는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눈총을 받기 싫기도 했고, 할 일도 있었다.

나는 에르안이 베티아에게 샴페 인을 권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세이린 경에게 다가갔다.

“개인 열 추적기 부탁해요.”

세이린 경은 주머니 속에서 나침반처럼 생긴 작은 아이템을 건넸다.

“너, 정말로 헛짓거리를 하 면…… 아무리 오라버니가 아끼는 조수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 아.”

“걱정 마세요.”

“누구한테 쓸 예정이야?”

“베티아 영애요.”

“대체 왜?”

“음…… 어차피 절 계속 감시하실 거 아니세요? 그때 눈으로 확인해 보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베티아에게 샴페인을 충분히 먹였는지, 에르안이 베티아와 헤어져 다소 외진 발코니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에르안과는 첫 춤이 끝나고 만나기로 했다.

일단 세이린 경과 의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해서,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평민 출신이라 귀족분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씀드 리기가 좀 그래요.”

“……그래.”

세이린 경이 팔짱을 끼며 못마 땅하다는 둣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기사야. 네가 도의적으로 어긋난 짓을 했 을 때에는……”

“저는 의사예요. 저처럼 인류애 와 평화에 제 자신을 희생하는 멋진 사람은 드물걸요.”

“하, 누가 오라버니 조수 아니랄까 봐.”

나를 바라보는 갈색 눈이 날카 로웠다.

“뻔뻔한 건 그 인간에게 배웠니?”

“아뇨. 저는 그냥 날 때부터 이런 걸요.”

세이린 경은 코웃음을 한 번 치 고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자기랑 똑같은 애의 대부가 되었구나.”

“……페렐르만 자작님하고 안 친하세요?”

“그 인간이 마음에 들었던 적은 시오니를 데려왔을 때밖에 없었어.”

그녀의 눈에 그리움이 문득 담 겨서 나는 에르안에게 가야 한다 는 것도 잠시 잊었다.

“당차고 씩씩하고……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영리했는데. 정말 천재였어.”

“..............”

“오라버니는 의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다른 면에 있어서는 좀 멍청해. 주변을 잘 살필 줄 모르지.”

“동생분의 냉정하고 정확한 평 가, 꼭 전해 드릴게요.”

“부탁한다.”

“어…… 그럼 전 잠시 만날 사 람이 있어서 어디 좀 다녀올게요.”

나는 에르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마음에 걸려서 빠르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시자한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너도 참 웃기구나.”

“켕기는 게 없어서 당당하거든요.”

여전히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 는 세이린 경을 보며 내가 싱긋 웃었다.

“디엘은 제가 이런 일을 벌일 때 구경하는 것만 해도 재미있대요. 세이린 경께서도 나름 흥미 진진하게 관람하시길 바랄게요. 사실 별로 즐겁고 흥겨운 일은 아니지만.”

“남 일이냐?”

“세이린 경께는?”

“그럼 적어도 기분이 나쁘거나 놀랍지는 않겠군.”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차피 남 일이라면 말이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재빨리 에르안이 기다리고 있는 발코니 로 향했다.

발코니의 문을 연 나는 깜짝 놀 랐는데, 이렇게 독립적인 공간일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 문이다.

까만 밤을 둥진 에르안이 난간 에 기대어 밤보다 더 까만 눈동 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반달로 휘며 예쁘게 웃었다.

“……늦었네, 리체.”

나는 이상하게 그의 입매가 딱 딱하게 굳어 있다는 걸 알아챘 다.

“빌어먹을 황태자랑 춤은 잘 췄어?”

선명하게 느껴지는 분노에 나는 살짝 뒷걸음질 쳤다.

이 와중에 바람에 살짝 흔들리 는 머리카락까지 그림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온순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뭐. 공작님도 베티아 영애와 잘 추셨죠?”

“네가 시킨 대로 잘 췄지. 그 바람에 널 계속 지켜볼 수가 없었어.”

그가 반쯤 기대고 있던 난간에 서 천천히 일어나 문을 닫았다.

문가에 서 있던 나와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근데 볼 때마다 둘 다 너무 즐 거워하는 것 같던데.”

나는 보기 좋게 휘어진 그의 눈 매를 바라보며 억지로 위화감을 눌렀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평소의 에르 안과 다를 바 없다고 의식적으로 계속 생각해야 했다.

“음…… 황태자님이 편안하게 대해 주시고, 좋은 제안도 해 주 셔서요.”

“내 앞에서는 그런 표정을 한 번도 지어 주지 않았잖아, 리체.”

그거야 제이드 황태자와의 일은 너무 쉽게 진행되는 반면에, 에르안은 언제나 쉽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에르안에게 웨데릭의 음모를 설 득력 있게 말하는 건 너무 어려 워서, 거의 6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에르안이 열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어..........”

그는 천천히 내 허리를 감쌌다.

정확히 춤을 출 때 황태자의 손 이 닿았던 자리였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못 참을 줄은 몰랐는데.”

문득, 나는 디엘이 왜 그렇게 에르안을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 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대면한 하녀들이 왜 一 제 대로 된 설명은 하지 않지만 一 늘 기가 죽어 있는지도 이해가 갔다.

이사벨 마님이 껍데기 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것도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내게는 잘 웃고 다정하 기 그지없어서 가끔 느껴지는 이 이상한 느낌을 모른 척했는데 상 냥한 어조가 소름끼치는 건 처음 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응? 왜 그렇게 즐거웠어?”

“아니, 뭐…… 성년이 되면 앞 으로 황실 연구진에 들어올 수있게 해 주신다고도 하시고.......”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황실 연구진?”

“그, 그냥 제안이었어요.”

“리체…… 너 거기 못 가.”

그의 새까만 눈에서 날짐승 같 은 선득함과 소유욕이 느껴졌다.

“내가 안 보낼 거거든.”

“왜요?”

나는 무심코 이유를 물었다.

“나를 살려 줬잖아, 리체. 네 처방으로 이렇게 건강해졌는걸. 끝 까지 책임져야지. 네 우선순위는 항상 나라고 약속하지 않았어? 응? 안 그래?”

“그…… 아직 완전히 건강해진 건지, 사후 검사가 필요해요. 환절기가 되어 봐야 확실히 알지요.”

에르안이 오고 나서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마님도 그런 성격이었으니, 유능한 직원을 절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성향인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영리한 데 다가, 자신을 살려 주기까지 한 나를 얼마나 놓치기 싫을까.

나 같아도 나 같이 유능한 주치 의를 보내기는 싫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법적인 효력이 없 는 말에 대해서는 그다지 겁먹지 않았다.

“그러니까 황태자님의 제안은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가 없고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가 열은 한숨을 쉬며 다시 내 눈을 똑바 로 마주쳤다.

“혹시 그 늑대 같은 인간이 네 허리에 손을 계속 얹고 있었던 건 아니지?”

내가 뒷걸음질 치자,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허리에 두른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내 몸을 더 밀착시켰다.

“또 어디야, 그 새끼와 살이 맞 닿은 곳이.”

더운 숨결이 느껴져서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발코니와 연회장 은 문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게다가 아까는 다른 남자랑 또 속삭이고 있던데.”

“다, 다른 남자요?”

“네가 이렇게 연회에서 많은 남자들과 어울릴 줄은 몰랐어.”

나는 기가 막혀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세이린 경을 오해하는구나!’

세이린 경은 키도 크고, 머리도 짧았다. 게다가 드레스가 아닌,  평소에 입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남자라고 착각할 만도 했다.

“어릴 때부터 네가 바람둥이인 건 알고 있었는데.”

그가 내 갈색 머리카락을 느릿 하게 쓰다듬자 어깨에 소름이 돋 았다.

내가 알던 에르안이 아닌 것 같아서 몸이 굳었다.

그 와중에 새하얀 얼굴과 욕망 이 어린 검은 눈,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시선이 가는 나 자 신이 어이없었다.

“바람둥이여도 괜찮아......”

굉장히 억울한 발언이었지만 허 리에 느껴지는 단단한 손길 때문 에 나는 숨을 멈췄다.

“언제나 내 곁에만 있어 주면 돼.”

무심코 그러겠다고 대답할 뻔 했다.

확실히 이사벨 마님이 말한 대 로, 마님은 그를 이 얼굴로 낳아 준 것만 해도 할 일은 다 하신것 같았다.

‘아냐, 이르비아에 보냈으니 이렇게 잘 컸잖아. 절반은 내 몫이 지 않을까.’

문득,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 는 걸 눈치챈 그가 눈을 치켜떴다.

“넌 왜 나를 앞에 두고도 다른 생각을 해……”

달래는 것 같이 달콤한 목소리 였지만 평상시에 비해서 꽉 잠겨 있었다.

“나는 네가 눈앞에 있으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나서 미칠 것 같은데.”

“음,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나는 정답을 말했다.

“그리고 바람둥이라뇨. 저는 그 런 쪽에 있어서는 아주 깔끔합니다.”

“……그건 또 그래서 문제기도 해. 넌 어느 쪽이든 날 너무 곤 란하게 만들어.”

에르안이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서로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내 이마에 닿았다.

“근데 어떡해? 내가 널 곁에 두 고 싶은걸.”

그의 달아오른 눈매는 너무 예 쁘고, 맞붙은 체온은 홧홧해서 심장이 뛰었다.

내가 숨을 간신히 고르자, 그가 조심스럽게 이마를 마주 대고 속 삭였다.

“너도 내 생각대로 하는 게 가 장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이상하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살짝 밀어내기 위해 그의 가슴 에 손을 얹었는데, 그의 심장 역 시 너무 두근거리고 있어 가만히 대고 있는 꼴만 되었다.

‘만일 이게 유혹이라는 거라면,  진짜 타고난 걸 거야……’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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