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8화
딱히 추운 날씨는 아니었으나, 마차 안의 공기가 워낙에 더워서 문이 열리자 숨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에르안의 에스코트에 따라 나는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난생처음으로 와 보는 황궁이었다.
평민 신분으로는 사실 평생 구경도 못 하는 것이 정상인 곳이었다.
밤하늘에 계속해서 불꽃이 터지 고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나는 촌스럽게 여기저기 둘러보 지 않으려고 애쓰며 에르안의 손을 꽉 쥐었다.
5년 만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 답게 곳곳이 화려하고 사람이 넘 쳤다.
연회장까지 가는 길에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쏟아졌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세르이어스의 새로운 공작과 황태자의 직 접 초청을 받은 평민 여자라니.
남의 관심을 받기에 딱 좋은 조합이 었다.
나는 그 시선 사이로 찾고 있던 얼굴을 발견했다.
‘세이린 경.’
딱히 평상시보다 꾸미고 오지도 않은 그녀는 내게 차가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겠다는 뜻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갖고 있는 개인 열 탐지기를 적절한 때에 잘 받아야 했다.
시간을 딱 맞춰 도착했는지, 깜짝 놀랄 만큼 넓은 연회장 안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는 바쁜 눈으로 베티아 영애 를 찾은 뒤, 에르안에게 속삭였다.
“저기 11시 방향이에요. 보이시죠? 베티아 영애.”
“……어.”
“꼭, 꼭 첫 춤 뺏기지 마세요.”
한 번 더 주의를 주려는데, 갑자기 내 앞에 사람들이 슬금슬금 길을 비켜 주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자, 은발 머리에 푸 른 눈을 가진 제이드 황태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번 연회의 주인공답게 화려한 옷차림이 돋보였다.
이런 자리에서 보니 생각보다 동글동글하고 아이 같은 인상이었다.
“와 주었군, 리체 양.”
평민인 걸 알았어도 일단 그것 을 탓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 다.
그의 호감이 있다는 듯한 목소 리는 여전했다.
“나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 나도 그랬어.”
에스코트 때문에 내 한쪽 손을 잡고 있던 에르안의 손이 부들부 들 떨렸다.
나는 황태자의 양쪽 눈을 가만 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행히 치료가 제때 된 모양이에요. 양 눈의 균형이 완벽하세 요.”
“다 리체 양 덕분이지.”
제이드 황태자가 내게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곧 음악이 시작될 텐데, 직접 초청한 분이니만큼 첫 춤의 영광을 나와 함께할 수 있을까?”
“네, 기꺼이.”
나는 손을 놓지 않는 에르안의 발을 몰래 밟아야만 했다.
그 후에야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어 제이드 황태자에게 얹을 수 있었다.
빨리 베티아 영애에게 가 보라 는 눈짓을 하고 난 뒤, 나는 제 이드 황태자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연회장 중간으로 나섰다.
역시 여기저기서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오늘 밤 무척 예뻐.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열심히 꾸몄죠, 당연히.”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으로 황궁에 와 보는 걸 요. 게다가 황태자님과 첫 춤이니 절대로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황족도 평범한 사람인데.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질병 앞에 한 없이 나약한.”
“인간이 질병 앞에서 평등한 건 사실이긴 하지만.”
“곧 성년이라고 들었어. 만일 황실 의료진 연구에 관심이 있다면 말해. 내가 추천서를 직접 써 줄 테니까.”
황실 의료진의 연구엔 아무나 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주치의 조수나 하던 평 민 의사는 애초에 지원조차 할 수 없는 자리였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면 작위의 상승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연구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전무후무한 사람이 내 대부기는 했지만.
“책임자가 하엘던 황자, 그러니까 내 배다른 형님.”
제이드 황태자가 주변을 둘러보 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은발 머리를 가진 다소 신경질 적인 인상의 마른 남자가 귀족들 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적통이라는 이유로 제이드가 황태자였지만, 그와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의술에 관심이 많아 황실 의료진 연구의 책임자이기도 해. 내가 하엘던 형님을 통해 의료진에 넣어 달라고 부탁해 볼게.”
“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제의만 받아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느낌이었다.
비록 황실 연구진이 발표하는 실적은 딱히 괄목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의사로서 엄청난 영예였다.
음악이 시작되고 그와 춤을 추 기 위해 자세를 잡는 동안, 나는 설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님. 저한테 너무 과분한 제안이세요.”
“케인즈 경도 인정한 실력이야. 몇 번을 감탄했는지 몰라. 리체 양이 아니었으면 내 눈을 제대로 고치지 못한 대가로 케인즈 경은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거든.”
“물론 제 실력은 저도 인정하죠”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스랩을 밟으며 그가 재미있다는 둣이 말 했다.
“황태자님의 두 눈이 이렇게 멀 쩡한 건 제 덕이라는 걸, 저는 절대 잊지 않고 있으니 황태자님도 잊으시면 안 돼요.”
이 연회 초대장으로 입을 씻지 말라는 뜻이었다.
제이드 황태자가 소리 내어 웃더니 씩 미소하며 말했다.
“내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사람은 리체 양이 처음인데.”
“설마 제가 예의에 어긋난 발언 을 한 건 아니겠죠? 전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아냐, 그런 건.”
“다행이네요.”
“어떻게 보답을 더 하면 될까. 의료진에 넣어 주는 건 아무래도 부족한가?”
“그것보다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 히 말했다.
“제가 원할 때 황태자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지난번처럼 괜히 오해해서 아직 때도 안 되었는데 연회에 부를까 봐, 나는 ‘내가 원할 때’라는 조건을 강조해서 집어넣었다.
“아, 이렇게 적극적이면 내가 너무 설레는데.”
제이드 황태자의 뺨이 터질 듯 이 붉어졌다.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황궁에 와.”
‘맞아! 바로 그거야!’
“리체 에스텔 양의 방문이라면 반드시 받으라고, 내가 일러둘 게.”
‘됐어!’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 황태자도 인상이 순둥순 둥한 게, 디엘처럼 말을 아주 잘 듣는 타입 같았다. 순진한 푸른 눈을 보니 아무 생각이 없는 사 람 같기도 했다.
그와 한 바퀴를 빙글 돌면서 나 는 저 멀리 있는 에르안을 보았다.
멀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 지만 다행히 상대의 머리가 금발 로 반짝이는 것이, 베티아와 춤 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다 잘 풀리고 있어.’
또 나와 멀지 않은 벽에 기댄 세이린 경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안이 베티아에게 세르이어스산 샴페인을 권할 동안, 나는 그녀에게서 개인 열 추적기를 받 아야 했다.
***
베티아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에르안이 첫 춤을 자신에 게 신청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웨데릭이 자연 스럽게 자신에게 춤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에르안이 먼저 다가와 춤을 같이 추자고 제안했다.
“네, 물론이지요.”
웨데릭의 표정이 구겨지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에르안이 연회장에 나타났을 때 거의 대다수의 귀족 영애들은 그 에게로 시선을 빼앗겼다.
가뜩이나 거대한 영지와 부를 가진 세르이어스의 젊은 주인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취임식에서 이미 에르안을 본 적이 있는 베티아는 그것만으로도 뿌듯해질 지경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 넓은 어깨와 긴 다리.
무표정인데도 이상하게 야릇해보이는 분위기 등이 물론 그녀에게만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와중에, 그에게서 첫 춤 신청을 받았다는 것은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설레는 일이었다.
에르안의 겉모습 역시 좋았지만, 그녀에게 쏠리는 시샘과 부러움의 시선이 더 짜릿했다.
어디선가 씩씩대고 있을 실비나 를 생각하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기껏해야 남작령의 영식, 웨데릭과 염문설이 돌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만족감이었다.
아버지인 에이비크 자작이 대체 왜 그렇게 웨데릭과 연결하려고 애를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햇빛을 닮은 금발을 타고 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어릴 때부터 외모에 대한 찬사를 받아 왔다.
웨데릭은 그녀를 볼 때마다 아 름답다며 한심한 표정을 지어 보 이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 하나 특출 한 구석이 없는 웨데릭에게 자신 은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꿈은 크게 가져야죠, 아버지.’
연회 때 웨데릭에게 잘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던 아버지 에이비크 자작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는 에르안의 손을 잡았 다.
바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에 이비크 자작의 눈빛도 모른 척했 다.
‘물론 말수는 적지만, 이 많은 영애들 중 나라니……. 역시, 그 때 정원에서 소동올 부릴 때 나 를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춤을 추면서 에르안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신경이 다른 데 쏠 려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어딘 가를 가끔씩 바라보면서 이를 갈 곤 했다.
점점 더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어두워졌지만 베티아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성격인 건 취임식때 파악했다.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면 그 성이 내 집이 되는 건데. 남작령하 고 비교나 되나.’
번득이는 그의 검은 눈은 마주 치기엔 너무 섬뜩했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선 팔의 힘줄 때문에 말을 걸기도 무서웠다.
하지만 평생 입을 다물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남자였다.
‘그래도 첫 춤 신청이 나야. 게 다가 분명히 웨데릭 님과의 소문 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가 알기로 웨데릭과 에르안 은 어린 시절 사이가 상당히 좋 았다.
벌써부터 사촌 간 사랑싸움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두근두근했 다.
뒤에서 얼마나 시샘하는 소문들 이 떠돌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물론 리체와 황태자가 이 연회에서 가장 큰 소문의 주인공이겠지만.
흘끗 보니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웃고 있었다.
심지어 둘 다 무언가에 설레는지 볼이 붉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춤만 추는 자신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저 평민 주치의 조수가 황태자 의 첫 번째 측실 정도는 될 모양이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만큼 화 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짧게만 느껴졌던 첫 음악이 끝 났다.
혹시나 두 번째 춤까지 청 할까 기대하는 눈으로 에르안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술 한잔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네? 네, 좋아요.”
베티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끄 덕였다.
이렇게 저돌적인 성격이었나 싶었다.
보통 둘이 술을 마시는 건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다음인데.
“세르이어스산 샴페인 두 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시종이 재 빨리 샴페인을 가져왔다.
두 번째 춤이라도 청하려고 웨 데릭이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전전긍긍한 얼굴과 웨데릭의 씩씩거림을 완전히 무시한 채 샴페인 잔을 한 번 에 비웠다.
“샴페인 향이 정말 좋네요, 공 작님.”
에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잔을 더 시켜 그녀에게 쥐여 주었다.
‘세상에, 세르이어스 영지의 술이 이렇게 좋다고 내게 자랑하는 건가 봐.’
“부디 많이 드시길.”
‘역시 세르이어스의 안주인으로 와 달라며 이런 식으로 유혹하는 거야.’
그의 긴 눈꼬리와 붉은 입술을 보며 베티아는 샴페인을 죽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