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7 화
“그래,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이사벨 마님은 더 이상 공작 부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성의 가장 높 은 안주인답게 위엄이 있었다.
“몇 배의 대가를 치른 보람이 있어.”
그녀는 이번 연회 때 세르이어스의 대표로 에르안이 가니,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한 상태였다.
원래부터 사교 행사를 별로 좋 아하지 않는 성격인 걸 알고 있 어서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치 자신이 가는 것처 럼 내게 온 정성을 다했다.
“에르안? 알아서 하겠지.”
오히려 자신의 아들이 사교계 첫 데뷔인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얼굴로 낳아 줬으면 사교계 에서 내 할 일은 다 한 거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리체, 정말 너무 예쁘네. 이 정도면 황태자님과 첫 춤이라고 해도 절대 비웃음은 당하지 않을 거야.”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상당히 예뻐서 나조차도 놀라웠다.
일전에 자유 도시에 갈 때에도 꾸민다고 꾸였는데, 전문가들의 손길을 받으니 그때와는 비할 바 가 못 되었다.
옅은 노란색 드레스에 치맛단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반짝거렸다.
내 눈 색깔과 잘 어울리는 에메랄드 장식으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가슴께에서 찰랑거렸다.
‘회귀하고 나서 정말 호강하네.’
회귀 전에는 동네 의원에서 거친 모직 원피스를 몇 개 돌려 입 는 게 다였는데, 그때와 비교하 면 정말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봄이니까, 요즘 유행 따라 생화 장식을 좀 할게요.”
재단사가 큰 상자를 열며 말했다.
상자 안에는 온갖 꽃들이 가득 했다.
“치맛단 보석 사이로 달 거고 요. 여기서 제일 잘 어울리는 꽃으로……”
“아, 사실은 제가 따로 준비한 꽃이 있어요.”
나는 재단사의 말을 부드럽게 끊으며 말했다.
“포티셸리아 꽃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연구실에서 직접 수경 재배했답니다.”
“포티 셀리아요?”
“네, 흰색 꽃이니 무난하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붉은색 계열이 더 화려할 텐데……”
“전 단아한 분위기가 더 좋더라고요.”
그동안 내 의견을 딱히 말하지 않았던지라, 재단사는 상당히 당 황한 듯했다.
하지만 나 역시 절대 굽힐 생각 이 없었다.
이사벨 마님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결국 내 편을 들어주었다.
“리체 말대로 해. 그래도 본인 취향이 제일 중요하지.”
“감사합니다, 마님.”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포티셀 리아 꽃을 재단사에게 건네며 이사벨 마님에게 생긋 웃어 주었다.
“아……”
이사벨 마님은 안타까운 둣이 나를 바라보았다.
“세르이어스의 성만 있었더라도…… 황태자님은 물론 온갖 귀 족 영식들이 다 구혼하고 싶어 정신을 못 차릴 텐데.”
“마님, 공작님의 혼사부터 걱정 하셔야지요…. 공작님이야말로 성년이 지나신 걸요.”
“난 그 애와 지낸 요 근래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단다.”
“뭔데요?”
“그 애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상대는 분명, 무조건 껍데기만 멀쩡하면 만족하는 여자일 거다.”
가끔 좀 쎄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공작성의 사람들은 에르안을 너무 개차반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일 처리하는 걸 봐서 세르이어 스 공작으로는 역대급으로 유능할 거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5 분만 대화해도 숨 막히는 상대와 누가 정상적인 결혼을 하겠니.”
나는 별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이사벨 마님이 워낙에 신랄하게 독설을 퍼부어서 차마 끼어 들지 못했다.
“어쨌든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혼사가 아니야.”
“그래도 약혼이나 혼담이 오가 는 귀족 영애가 있을 수 있잖아요.”
“뭐, 그런 내용의 서신이야 넘칠 정도로 쏟아지지.”
하긴, 가신 영애들의 지난 대화 를 생각해 봤을 때 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았다.
“아.”
이사벨 마님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둣이 눈올 깜빡였다.
“맞아……. 정말 옛날이지만, 약 혼 얘기가 나온 아이는 있었단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네.”
“네? 정말요? 그런 말은 한 번 도 못 들어 봤는데요.”
“당연하지. 모두가 잊고 있었던 걸.”
그 말을 꺼내는 이사벨 마님의 얼굴 표정이 복잡했다.
“페렐르만 자작의 아이가 딸인 걸 알았을 때……”
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펄펄 뛰었지 만, 함께 임신 중이던 나와 시오니는 페렐르만 자작 몰래 사돈을 맺자고 깔깔거리며 장난으로 계약서까지 만들었단다.”
“아……”
“물론 일이 이렇게 되고, 그 이 후에는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게 그동안 에르안과 정식으로 얽혔던 단 한 명의 여자애구나.”
우리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동안, 내 치맛단에는 횐 포티셀리아 꽃이 단단히 달리기 시작했 다.
이사벨 마님이 전혀 신경을 쓰 지 않은 것에 비해, 연회 차림으 로 꾸민 에르안은 지나치게 멋있었다.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마주 앉아 있으니 자꾸만 힐끔힐끔 눈길이 갔다.
“맘에 들어?”
내 시선을 알고 있었는지, 에르안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정하고 꾸미셨는데요.”
“시각에 약하신 누구 때문에.”
그가 눈웃음을 치며 내 머리카락 끝에 살짝 입을 맞췄다.
역시 아들에 대한 이사벨 마님의 평가는 지나치게 박했다.
이럴 때 보면 꽤나 다정한 데다가 매너도 좋은데.
적절한 귀족 영애와 결혼하면 그렇게까지 그 여자에게 비극은 아닐 것이다.
세르이어스 공작가는 제국에서도 상당히 대귀족에 속했다.
한 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나와 본 적이 없다가 드디어 나타나는 젊은 공작이니 온갖 시선이 쏠릴 것이다.
“첫 춤, 잊지 않으셨죠? 다른 영애랑 햇갈리면 안 돼요. 베티아 엘리 에이비크 영애예요.”
첫 춤 이야기가 나오자 에르안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알아보니까, 그 여자 웨데릭 형이랑 염문설이 있던데.”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티가 팍팍 나는 어조였다.
“떠도는 소문일 뿐이래요. 예전 에 발목을 고쳐 줄 때 똑똑히 들었어요. 그리고 세르이어스산 샴페인 잊지 마세요. 최대한 빨리, 많이 먹이려면…… 딱 평소처럼 만 웃어 주시면 될 거예요.”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오늘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리체.”
그 때 에르안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넌 내가 어떤 여자랑 춤을 추 고 술을 마시며 웃어 줘도 전혀 상관이 없어?”
어찐지 날이 선듯한 뾰족한 말투였다.
“음…… 상관이 있어야 하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가정교사에게 속성으로 배우기로, 춤을 추는 것만으로는 관계가 확정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럼 뭐, 상관 없는거지.
“허리를 안고 빙빙 도는 것쯤이야 아무나와 할 수 있는 거 아니 에요? 보통 계속 파트너를 바꾼 다던데.”
에르안이 이마를 짚었다.
“……역시 바람둥이야, 리체.”
낮은 목소리에는 탄식이 가득했다.
“아닌데요.”
“그럼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 싹수가 보여.”
“왜요?”
“계속 파트너를 바꾼다는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공작님도 할 수 있으세요.”
아무래도 사교성 없는 것이 이 사벨 마님을 닮았나 해서, 나는 문득 걱정스러워졌다.
열세 살까지 또래 인간관계라고 는 나와 웨데릭밖에 없었고, 5년 간 홀로 떨어져 있어서 혹시 여 자를 대하는 게 어려운가 싶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 움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여……”
“그만.”
에르안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열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걸 내가 지켜볼 자신이 없어.”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중얼거렸다.
“눈앞이 흐려지고 가슴이 무너 져 내릴 것 같아.”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끝을 스치고, 내 머리 장식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의 묘한 표정 하나로 마차 안 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달아오르 는 것 같았다.
어린애의 투정이라고, 애써 어린 시절의 에르안을 떠올리며 나 는 목을 가다듬었다.
“공작님, 성장하셔야죠.”
나는 그의 손등을 툭툭 쳐 주었다.
“이제 성년이신 걸요.”
그가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마차가 멈췄다.
황궁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