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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66화 (6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6화

‘다 널 위한 건데…….’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제가 워낙에 마음이 여리고 손해 보는 성격이라……. 알았어요. 공작님은 뭘 원하세요?”

“황태자는 내가 반역을 일으키 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반역이라는 말에 놀라서 펄쩍 뛰었다.

“반역은 절대 안 돼요. 절대!”

“앞으로 모든 연회에서 다른 남자들과 춤추지 않을 것.”

“뭐…… 네.”

생각보다 쉬운 제안에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어차피 난 평민이었다. 다음 연 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날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다른 남자랑 춤을 출 시간도 없을 것이다.

“나도 안 출 거야.”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그래도.”

“뭐,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그래도 베티아 영애와는 꼭 추시는 거예요.”

나는 다시 한번 에르안의 확답을 받았다.

“알았어.”

“중간 진행의 확인을 위해, 첫 춤 끝나고 30분 뒤에 한 번 만나도록 해요.”

나는 맞잡은 그의 손을 한 번 꽉 쥔 뒤 놓으면서 약속하라는 둣이 단호하게 말했다.

에르안은 영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파서.”

“네? 정말요?”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들여다 보았다.

외양이 많이 달라진 에르안이 낯설다가도, 나는 그가 ‘아프다’ 라는 소리만 하면 무작정 보호해 주고 싶었던 옛날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그가 아파 보이면 순식간에 예전처럼 이 세상에서 중요한 건 그밖에 없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나의 그런 감정 변화를 알 고 있는지, 에르안은 아무리 아파도 끙끙거리며 참아냈던 어렸 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별로 안 아픈데도 찡얼거리는 것 같았다.

“아픈 것 같아, 리체.”

“어디가요?”

“마음?”

에르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긋하게 말했다.

“내가 요새 안 아파서 다른 여자를 나한테 붙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프면 네가 늘 내게 오는데 말이야.”

그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약속해. 연회에 가더라도 나를 제일 많이 생각해 주기로.”

나는 그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시절 그와 함께 새끼손가락을 걸고 했던 약속들이 생각났 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내가 에르안을 제일 많이 생각한다느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았다.

작정하고 옛날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은 행동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친숙함을 느끼며 새끼손 가락을 걸었다.

“그건 당연하죠. 예전부터 지금 까지 늘 그래요.”

“내가 늘 아픈 상태라는 걸 기억해. 알겠지?”

“의사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하시다니……”

“내 특기였잖아.”

아무리 눈을 새초롬하게 뜨려고 해도 그가 어린 시절을 언급하자 표정이 자꾸만 풀어졌다.

“네 앞에서 거짓말하기.”

그땐 아픈데 안 아프다고 거짓 말을 많이 했었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어서 뭐 든지 반대가 된 것 같았다.

‘사실 어릴 때에는 정말 귀여웠는데....

내가 슬쩍 웃자 그가 성공했다는 둣이 눈을 반짝였다.

“잊으면 안 돼, 리체.”

“뭘요?”

“우리한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서사라는 게 있다는 걸 말이 야.”

“그건 그렇죠?”

“어느 날 우연히 만나서 한 번 눈 한쪽이나 고쳐 준 황태자랑은 다르다고.”

“그건 그렇죠.”

사실 에르안과 제이드 황태자를 비교할 건 아니었다.

내가 선선히 대답하자 그제야 에르안이 완전히 풀어진 표정으 로 내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럼 춤 한 번 더 출까? 실수 로 발을 밟는 법까지 가르쳐 줄게.”

“……됐어요.”

실수로 황태자의 발을 밟기는 절대로 싫었다. 나는 춤에 집중 하기로 했다.

***

시간은 홀러, 승전 연회의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느낌이 좋았다.

왜냐하면 아론이 드디어 베르칼 리아 꽃을 모두 피웠다며 연구실 로 찾아온 것이다.

그의 손은 케르폰 뿌리의 가시 에 찔려서 엉망이었다.

두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해서 다크서클도 깊게 내려와 있었다.

‘나는 장비가 없어서 급할 땐 맨손으로 알코올을 다루느라 손 이 다 벗겨졌었지.’

그것에 비하면 꽤나 호강한 것 이나 다름없었다.

“베르칼리아 꽃을 말린 것 90송 이입니다.”

아론은 떨리는 손으로 내게 베 르칼리아 꽃이 가득 담긴 유리병 을 건넸다.

아론이 온다는 소리에 함께 구경 온 디엘이 탄성을 내뱉었다.

꽃 하나에 얼마나 많이 손이 가는지 알기 때문에 우러나온 진심어린 감탄이었다.

“고생했어요, 아론.”

나는 싱긋 웃으며 유리병을 받 아 들었다.

“다 해내면 제가 큰 상을 드린다고 했는데, 기억나세요?”

‘‘예.”

그래도 상이라고 그의 핏발 선 눈에 기대감이 서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연구실 서랍에서 나는 종이 하 나를 꺼냈다.

“받아요.”

베르칼리아 꽃을 피워 낼 만큼 인내심이 강하다는 내용의 표창장이었다.

물론 내가 연습장을 뜯어 직접 쓴 것이었다.

아론이 굉장히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표창장을 받아 들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 다.

“혹시 기대에 못 미치는 상은 아니죠?”

“네? 아닙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행하는 표창장인데요.”

나는 ‘리체 에스텔’이라는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회귀 전에 그에게 받은 표창장보다는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적어도 표창장을 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연구실 책상에서 푸른색 시약을 집어 건네며 내가 선심 쓰듯 말 했다.

“이거 드세요.”

“네?”

“저 의사예요. 필요한 약 처방 해 드리는 거니까 걱정 마시고 드세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아론은 어쩔 수 없이 시약을 삼켰다.

몽롱해지는 그의 두 눈을 바라 보며 내가 설명했다.

“수면제예요. 그동안 잠을 못 잔 만큼 이틀은 푹 주무실 수 있 으실 거예요.”

내가 승전 연회를 간 사이에 일 을 치면 큰일이기에 준비한 수면 제였다.

물론 아론의 몸 상태를 보아 숙 면이 가장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그를 위한 처방이 기도 했다.

“네? 아니,  근데 이걸 지금......”

그는 감기는 눈을 최대한 뜨려 고 하며 비틀거렸다.

그의 의식이 완전히 나가기 전에, 나는 디엘에게 베르칼리아 꽃이 담긴 유리병을 건넸다.

“디엘, 이거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거든. 태워 버려.”

“잠시만요!”

아론이 눈을 부릅뜨며 손을 뻗 었지만 이미 수마에 잠식되고 있 는 것 같았다.

나는 똑똑히 들으라는 둣 말했 다.

“여기 램프의 연료로 쓰면 되겠다. 한 번에 부어.”

그동안 아론이 피땀 홀려 키운 꽃들을 그의 눈앞에서 태워 버렸다.

아론은 경악에 찬 눈으로 불타는 꽃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충격받은 얼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틀 동안 푹 자 면서 그 허탈함이 꿈에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껏 환자를 살려 놓으면 회복 시간도 안 주고 전쟁터에 내보냈었지.’

나는 쓰러진 아론을 발로 굴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난 참 마음이 여리단 말이야. 진짜 착하고.”

디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 를 바라보았다.

“디엘, 이틀간 곯아떨어질 거야. 적당히 감시하기 좋은 방으로 옮겨 줘.”

여기서 아론을 그냥 보내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 이후 케인 외에 그를 찾아오 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또 다른 꼬리를 붙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이용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 김에 조금 더 괴롭힐 수도 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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