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5화
“뭐라고요? 반역? 반역이요?”
“……제국이 마음에 안 들면 굳이 충성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지. 안 그래?”
리체가 머리를 짚으며 고통스러 워하는 것을 보고 에르안은 이상하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리체 역시 딱히 황실에 충성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혹 시 황태자 때문에 그런가.
황태자를 생각하면 더 반역을 하고 싶은 마음이 물씬 솟아오르 는 것 같았다.
리체의 첫 춤 상대라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지금도 당장 달려가 검을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데.
“그냥, 반역을 생각조차 안 할 만큼 황실에 기지는 않겠다. 이 런 뜻이야.”
많이 순화해서 대답했는데도 이 미 잠긴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 왔다.
리체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제발.”
“뭐…… 나도 안 그랬으면 좋겠어. 두 번째 질문은 뭐야?”
“아.”
이미 어딘가 지쳐 보이는 리체 가 다시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에르안 님이 공작 위를 계속 이어 가지 못하게 되시면 웨데릭 님이 이양 받게 되는 거, 맞죠? 유일한 친족이시니까.”
“맞아.”
에르안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나마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공작 위를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있 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이야.”
그것은 에르안이 생각하고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였다.
웨데릭과 로만을 1순위로 의심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심만으로 내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이기 도 했다.
법을 어떻게든 고치거나, 리체를 다른 귀족가의 양녀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이 공작 위를 버릴 생각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친족인 웨데릭의 가치는 딱 그것 하나뿐이었다.
리체에게 조금 더 풍족한 삶을 주고 싶기 때문에 가장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해 놓은 것이긴 했 다.
하지만 리체가 혹시나 신분상의 이유로 자신을 밀어낸다면 기꺼 이 자신도 평민이 될 수 있었다.
“그, 그렇게 웨데릭 님이 소중 해요? 이제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어린 시절에 딱히 에르안 님을 위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에르안은 진심으로 리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딱히 상관이 없었 다.
과거의 이런저런 일을 따지는 것보다, 지금 리체와 어떻게 하 면 함께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웨데릭은 그에게 이미 한참 전 에 우선순위가 밀린 사람이었다.
만일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아니 라면, 리체에게 그 어떤 해도 끼 치지 않는다면 과거에 자신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쯤이야 그냥 넘 길 수 있었다.
그의 세상에는 리체와 리체가 아닌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공작 위를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내 혈연, 그게 중요하지.”
“……네.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리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면서도 다소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하고 싶은 말 있으 면 뭐든 해.”
아직 리체의 마음을 얻지도 못 했는데 결혼 운운하는 것이 부담 될까 봐 그는 더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다.
리체 역시 더 묻지 않고, 그저 살짝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더 궁금한 건 없어요.”
“……그럼 내가 뭐 하나 물어봐 도 돼?”
“네.”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리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보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 걸 어 떻게 해야 할지. 온몸이 간지러 운 것 같았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폭 안길것 같은 작은 체구를 보고 있으 면 모든 걸 다 해 주고 싶었다.
“어떤 남자가 좋아?”
“네?”
“이상형 말이야.”
리체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완벽한 사람이요.”
“……응?”
“이상형이라면 뭐, 굳이 단점을 안 가진 사람을 대도 되는 거잖아요.”
그 말에 에르안은 자신도 모르 게 리체의 양 볼을 감싸고 이마 를 마주 댔다.
한밤중의 연구실은 조용했고, 단둘이 있는 것이 좋은 만큼 내 면의 무언가가 넘실거렸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리체 의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초록색 눈이 깜빡거렸다.
큰 손에 가득 들어오는 그녀의 볼살이 부드러웠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어떻게 해서든 지켜 주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못되게 굴어 가 두고 싶올 정도로 비뜰어진 소유 욕이 문득문득 차오르곤 했다.
날이 갈수록 참기 어려워지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숨기다가도, 가끔씩 그녀가 지나치게 자 신에게 무심한 것 같을 때에는 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이미 붉어진 그녀의 귀를 살짝 스쳤다.
긴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리체의 작은 입술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맞아, 리체.”
그가 조용하게, 아주 천천히 속 삭였다.
아까의 마냥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아닌, 욕망을 꾹 늘러 참는 잠긴 목소리였다.
“나도 완벽한 사람이 좋아.”
그에게 그녀는 언제나 완벽 그 자체 였다.
“어…… 생각해 보니까요.”
아무래도 이러다가 홀릴 것 같 아서 나는 재빠르게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제가 잘 못하는 게 있는 것 같 아요.”
“뭔데?”
“춤이요.”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요새 춤을 배웠는데, 동작은 잘 외우는데 박자 맞추는 게 어려워요. 재미도 없고요.”
“그래?”
“하필 황태자님의 첫 춤 상대라 서……. 웃음거리만 안 되면 다행인데 말이에요. 공작님은 춤 잘 추세요?”
“글쎄.”
에르안은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르비아에서 배우긴 했지만, 제국의 연회에 참석하는 건 나도 처음이라.”
“그래도 배울 땐 내가 잘하는구나, 못 하는구나 정도는 알잖아요?”
“그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네가 판단해 봐. 한번 같이 춰 볼까?”
“네, 그래요.”
나는 가볍게 그의 손을 잡고 일 어났다.
내 허리에 손을 올린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가볍게 왈츠 스템을 밟으며 도는데, 그가 내 눈을 마주보며 속 삭였다.
“솔직히 엄청 잘 추는 건 아닌 데 웃음거리는 안 될 것 같아.”
“동작은 안 틀리는데.”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센스 자체가 부족해서.”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죠. 근 데 뭐, 공작님은 잘 추시네요.”
내 심드렁한 대답에 그가 씩 웃 으며 말했다.
“네 생애 첫 춤은 나야. 황태자 가 아니고.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춤 선생님은 여자였으니까 어떻 게 보면 맞는 말이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니 에 르안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을 바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네가 황태자랑 이렇게 춤을 추는 꼴을 봐야 한다니.”
“공작님은 누구랑 첫 춤을 추세요?”
“너.”
“전 황태자님이랑 춰야 하는데요.”
“그래도 너. 다른 여자랑은 출 생각 전혀 없어.”
“어…… 그래도 공작님의 첫 사교계 데뷔이기도 하고, 많은 영 애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확실한 건 그가 나처럼 약속된 춤 상대는 없다는 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결국 제가 황태자님이랑 첫 춤 을 출 동안 정해진 상대가 없으시면, 혹시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뭔데?”
“첫 춤을 베티아 엘리 에이비크 영애에게 신청해 주세요.”
에르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대체 왜?”
“연회가 끝나면 말씀드릴게요.”
아까 에르안은 하나뿐인 혈연이라는 것만으로도 웨데릭이 가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총애받는 주치의라고 해도, 제대로 된 증거를 들이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혈연이 없기 때문에 그 무 게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마음으로는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간 절했다.
그래서 에르안의 나에 대한 믿음과 진짜 혈연을 저울질할 때마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만일 내게 사촌이라도 생긴다면 얼마나 소중할지 상상이 가지 않 았다.
나는 짐작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모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 서 지금은 심중만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계획대로라면 이번 연회 때에는 분명히 증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첫 춤이 끝난 뒤 베티아 영애에게 세르이어스산 샴페인을 같이 마시자고 꼭 청하셔야 해요.”
“술까지 같이 마셔 줘야 해?”
“네, 빠르게 많이 마시게 할수 록 좋아요. 꼭 세르이어스산이어야 해요.”
뭔가 상당히 못마땅해 보이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며 내가 사정 하듯 덧붙였다.
“다 공작님과 저를 위한 거예요. 연회가 끝나면 이유를 다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새삼 디엘이 그리워졌다.
디엘만큼 다루기 편한 사람은 없었다. 그냥 부탁한다, 한마디만 하면 다 되었는데.
하지만 평민인 디엘은 연회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고, 또 이건 에르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거야?”
“네?”
“이유도 없이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
그가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씩 웃었다.
“넌 나한테 대가로 무얼 해줄거 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