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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64화 (6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4화

아침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는 말을 디엘에게 전하자 그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침을 같이? 나 체할 것 같아……”

“체하면 내가 약을 잘 처방해 줄게. 걱정 마.”

태피스트리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자작저의 식당 역시 특유의 부유함이 엿보였다.

음식 역시 세르이어스 공작성과 다를 바 없이 맛이 괜찮았다.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펠릭스 어르신은 내가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한마디씩 묻곤 했다.

“맛은 어떠냐.”

“괜찮아요.”

딱히 친절한 어조도 아닌데, 그 럴 때마다 디엘은 사레가 들리곤 했다.

“부족하지는 않고?”

“네, 딱 좋아요.”

물론 그런 불친절한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세이린 경 역시 의외라는 듯이 펠릭스 어르신을 바 라보곤 했다.

후식으로 나온 체리 파이까지 야무지게 다 먹고 나자,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펠릭스 어르신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개인 열 추적기 말인데.”

나는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네 실력을 확인했어도…… 아르가의 물건을 함부로 줄 수는 없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아르가 같은 놈이 대부 를 자처할 정도면, 또 돌아와서 왜 안 줬냐고 내게 항의할 수도 있겠지.”

디엘은 옆에서 아무 말도 못하 고 거세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쁜 일에 쓰지 않는다는 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믿을 수도 없어. 그러니 묻지.”

나는 차분하게 펠릭스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언제 쓸 예정이지?”

“황태자님의 승전 연회 때입니 다. 유효 시간이 세 시간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쓰 려고 해요.”

“평민 아니었나?”

“초청을 받았습니다.”

“허, 그래?”

그 말에는 세이린 경도 놀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황실의 초청을 직접 받는 건 핑장히 드 문 일인 듯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자유 도시에서 어쩌다가 뵙게 되었는데, 그때 안구 질환을 고 쳐 드린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셨습니다.”

“........흠”

펠릭스 어르신은 잠시 정적을 지키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럼 조건을 걸겠다.”

“네.”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표 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 다.

“세이린, 네가 가라.”

“네?”

세이린 경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숭전 연회 때 너도 가라는 소리다.”

“저는 굳이.......”

“그때 이 아이에게 개인 열 추 적기를 주고 계속 감시해.”

‘감시?’

웃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세이린 경에게 감시를 받는 다고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불편했다.

“이상한 데 쓰지 않도록 말이다. 그 조건에 한해서 빌려주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페렐르만 집안은 반란군에 합류하지 않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반란군의 꼬리를 잡는 일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만일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내 가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린은 나와 펠릭스 어르신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낮게 대답했다.

“……예.”

“그러면 개인 열 추적기는 승전연회에서 세이린에게 받도록 해라.”

펠릭스 어르신은 그 말을 끝으 로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체리 파이를 하나 더 구워서 함께 보내라고 주방에 전해.”

비틀거리며 걷는 그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잘 먹는 것 같더군.”

그래서 나는 나답지 않게 그의 뒷모습에 대고 활짝 웃으며 말했 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르신!”

그러나 그가 떠난 이후의 식당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세이린 경이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식기 정돈을 하자 세이린 경이 차갑게 말했다.

“하루 사이에 아버지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워삶지 않았어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냥 제 실력을 보여 드린 것 뿐이에요.”

황태자의 눈을 고쳐 준 공로로 초청장까지 받았으니 그 말에 반 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이린 경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르는 상대를 믿지 않는 것은 기사의 기본이다. 승전 연회 때 나는 널 감시할 예정이지 도와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걸 잘 알아두길 바라.”

“네.”

“그리고 만일 헛짓거리를 하거 나 내 눈 뒤에서 무언가를 몰래 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분명 페렐르만 자작을 묘하게 닮아 아름다웠으나, 기사 라서 그런지 훨씬 더 날카로운 인상을 갖고 있었다.

“너 하나 없애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둬라.”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툭 툭 치며 그녀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오라버니가 대부가 되 어 줬다고 해도 진짜로 페렐르만 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 니겠지.”

갈색 머리를 높게 묶은 그녀는 내게 서늘하게 경고하고 나서 천천히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한 마디도 못하고 있던 디엘이 그제야 속삭였다.

“거봐. 무섭다니까.”

“처음 본 평민이 위험한 아이템 쓰겠다는데 너 같으면 쉽게 믿겠니, 그럼?”

“그래도 성격이…… 그러니까 친구도 안 계시고, 연회도 안 가시겠다고 하지.”

하긴, 대다수의 귀족들이 참가 한다는 가장 큰 규모의 승전 연회도 굳이 안 가겠다고 하는 걸 보면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 둣 했다.

“그래서 친구라고는 원래 시오 니 님밖에 없었대. 시오니 님이 돌아가시고 더 성격이 날카로워 지셨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이 상한 생각이 들었다.

18년 동안 온 대륙을 휘저으며 딸을 찾고 있는 페렐르만 자작만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자작저 전체가 시오니 님과 그 딸의 그 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원하는 걸 얻었는데도, 이상하게 조금 씁쓸한 마음으로 나는 공작성으로 가는 마차에 탔다.

펠릭스 어르신이 챙겨 주신 체 리 파이 한 상자를 무릎에 올려 놓고서.

***

에르안은 리체의 연구실에 들어 가기 전에 얼굴 상태를 한번 확 인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황태 자보다는 경쟁력이 있어야 했다.

문제는 그가 황태자를 아직 보지 못한 상태라 괜히 불안하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가까이서 리체를 유혹할 때에 그녀의 눈동자가 가끔 풀린다는 것이었 다.

평상시에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초록색 눈이 아주 가끔씩 다른 여자들이 그에게 보내던 그 런 동경의 눈빛을 품을 때가 있었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인 반응이었다.

남자로 보이기 위해 서는 그때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리체,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이틀 만에 들어온 리체는 또 다 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선대 공작의 방을 쓰지 않 고 어린 시절 썼던 방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단 하루 그녀가 공작성을 비운 것뿐인데 같은 층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성 전체가 텅 빈 것 같았다.

“별일 없으셨죠?”

리체가 싱긋 웃는 것을 보고,  에르안은 당장 그녀에게 왜 황태 자를 만나고 싶어 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예전같이 애처럼 보채는 건 역 효과만 날 뿐이었다.

“별일은 없었고, 페렐르만 자작 저에는 잘 다녀왔나 해서.”

“예, 저도 잘 다녀왔어요.”

가만히 보니 그녀는 보존액에 담긴 과자의 일부분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르안은 그 과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웨데릭이 식사 대신 먹으라며 주머니에 넣어 주 던 것이었다.

‘웨데릭처럼 건강해지고 싶다고 칭얼거렸더니 비밀이라며 선심 쓰듯 주기 시작한 과자인데.’

“이걸 아직도 분석하고 있어?”

“네.”

리체는 스포이드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어린 시절 공작님이 드시던 건데, 성분을 잘 모르겠어서요.”

“그 영지에서 나는 싸구려 과자겠지, 뭐. 그것보다 리체.”

에르안은 그녀의 동그란 초록색 눈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 말 을 꺼냈다.

“케인의 심문이 끝났어. 어이없 게 심장마비로 너무 일찍 죽어 버렸대.”

리체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무덤덤하게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반란군과 연관되어 있는 모양이야.”

깜짝 놀랄 줄 알았던 리체는 오히려 더 차분한 표정이 되어 뭔 가 할 말이 있다는 둣 입술을 오 물거렸다.

에르안은 충분히 기다렸으나 그 녀가 망설이기만 하자, 결국 자신이 말을 이었다.

“반란 세력이 있다는 건 예전에 조금 말이 돌다가, 황태자께서 숭전하고 돌아오신 뒤 아예 자취 를 감춰 버린 소문이야. 만일 반란 세력이 정말로 존재하고, 그 들이 세르이어스를 노리고 있다면 당연히 가만있지 않겠지만.......”

“........예”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리체는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배후를 밝혀내는 데에 계속 네 가 있었어. 리체, 네가 다칠까 봐 나는 그게 무서워. 왜냐하면.......”....

‘왜냐하면’ 다음으로 터져 나오 는 감정이 너무 많아서 에르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너는 내게 너무 소중하거든”

그가 말꼬리를 흐리는데, 리체 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에르안 님.”

어릴 때 그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제가 지금 질문을 딱 두 개 할 게요.”

“그래.”

“약속해요. 꼭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알았어.”

한참을 망설이더니, 리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반란군에 들어가고 싶으신 건 아니시죠?”

“반란군이 널 해치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에르안에게 절대적인 논리는 리체였다.

황실에 충성해서가 아니고, 리 체에게 가짜 부모를 붙이려고 한 것이 괘씹해서 그는 반란군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역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

그 역시 바보가 아닌데,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없다는 법을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은 건 아 니었다.

혹시라도 그 법이 그들의 사이 를 끝까지 갈라놓는다면 빌어먹을 황실의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으로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진실만을 말하라고 해서 대답한 건데, 리체의 얼굴이 새 하얗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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