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3화
손님방으로 배달된 저녁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종류별로 과하게 육류가 많은 것 빼고는 공작성과 다를 바 없는 식단이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나는 디엘 에게 먼저 쉬라고 얘기한 뒤 재빨리 방을 빠져 나왔다.
따뜻한 봄이지만 챙겨 온 슬을 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문 쪽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서성이고 있는데, 역시 예상한 대로 지팡이를 짚은 펠릭스 어르신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너는……”
“어르신.”
나는 생긋 웃으며 펠릭스 어르 신께 다가갔다.
“저녁 산책 나오신 것 맞죠?”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펠릭스 어르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는 달려가서 그의 오른쪽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챙겨 나온 슬을 둘러 드렸다.
아무리 봄의 한복판이라고 해도, 저녁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좋았다.
“혹시 답답하시면 말씀하시고요.”
페렐르만 자작과 세이린 경도 그랬지만, 펠릭스 어르신도 키가 큰 편이었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부축을 하려면 거의 팔짱을 끼듯 붙어야 했다.
“……일부러 날 기다린 게냐?”
“네.”
우연히 마주쳤다는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 했다.
“자작가는 다 너무 예쁘고 아름 다운데, 산책로에 전부 대리석을 깔아 두었더라고요. 그 외에는 관상수로 빼곡하게 채워 넣고요.”
능숙하게 발걸음을 천천히 맞추 며 내가 말을 이었다.
이 저택에서 흙길이라고는 후문으로 이어지는 짧은 길뿐이었다.
“에나베 관절염을 앓으시는 분은 흙길을 많이 걸으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펠릭스 어르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응접실에서 하녀가 내온 차의 성분이 리아크 꽃이라 알았어요. 역시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적절 히 처방해 주셨군요.”
“마시기만 해도 성분을 알아차린다고?”
“훌륭한 의사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디엘에게 물어본 바로는, 펠릭스 어르신은 의사가 아니었다.
다만 페렐르만 상단이 약초를 다루고 있어서 약초와 차에는 조예가 깊다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저녁 식단에 육류가 정말 풍부하더라고요. 그것 역시 전형적으로 에나베 관절염을 위 한 식단이고요.”
에나베 관절염은 상당히 드문 병이었지만, 과연 페렐르만 자작이 알아서 아버지의 상태를 잘 진단한 듯했다.
“게다가…… 세이린 경이 부축 하시는 걸 보고도 눈치챘어요. 그런데 그런 식의 부축은 이제 불편하실 텐데 왜 말씀 안 하시고 계신 거예요?”
“그건 어떻게 알았지?”
펠릭스 어르신이 미간을 찌푸리 며 물었다.
“세이린은 계속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 의사니까요. 걷는 모습만 얼핏 봐도, 그 정도는 알아요.”
“내 주치의도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마 페렐르만 자작님이 보셨으면 단번에 눈치채셨을 텐데, 자작령에 안 들르시나 봐요?”
“……지금 개가 여기 들를 정신이 있겠느냐.”
“하지만……”
“딸이라도 찾지 않으면, 그 애는 시오니가 죽었을 때 이미 미 쳐 버렸을 거야.”
“지금도 아주 정상은 아니신데요.”
“그러니 더 걱정이지. 원래 좀 이상한데 더 미쳤다고 생각해 봐 라.”
“어쨌든……”
내 부축이 편한지, 펠릭스 어르 신은 내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처방이 옛날에 머물고 있나 봐요.”
에나베 관절염의 초기 처방은 단순하다.
각종 육류를 섭취할 것, 햇빛 아래에서 걷지 말 것, 리아크 꽃 잎을 우린 차를 수시로 마실 것.
그러나 만일 혹시라도 다른 노 환과 합병증이 오면 증상이 서서히 더 악화된다.
분명히 페렐르만 자작이 주치의에게 말해 놓았을 텐데, 워낙에 까다로운 병이라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펠릭스 어르신 역시 질환이 심해지고 있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다.
세이린 경의 부축 방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주치의에게 일러 주세요. 앞으로 자기 전에 백년초와 카이제풀 의 뿌리를 3:1로 섞은 환을 추가 처방하라고요.”
그의 고집스러운 입매를 흘끗 본 내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아니면 내일 제가 직접 말씀드 릴게요. 주치의를 만나게 해 주시면요.”
“……됐다. 필요 없어.”
후문으로 이어지는 흙길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에나베 관절염은 적어도 매일 30분 내외로 흙길을 걷는 것이 권장되는 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길을 몇 바퀴 돌아야 했다.
“어르신, 그런데 혹시…… 저 대리석 길들을 다 치우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면 빽빽하게 심어진 관상 수들만 없어도 걸을 수 있는 곳들이 많을 텐데요.”
고급스러운 정원은 당연히 보기 에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에나베 관절염 환자가 산책하기엔 최악이었다.
단단하 고 미끄러운 대리석길이라니, 흙 길과 정반대였다.
내 질문에 펠릭스 어르신이 가 만히 정적을 지키다가 퉁명스럽 게 대답했다.
“저 관상수는 시오니가 직접 심은 거야.”
시오니라면 시체로 돌아왔다던 페렐르만 자작의 부인이었다.
“맨 처음 자작저에 왔을 때, 고 향인 라베리 섬을 그리워하기에 그곳의 묘목들을 구해다 주었더니 신나서 몇 날 며칠을 매달리더구나.”
펠릭스 어르신의 눈에 그리움이 가득 담겼다.
“별것도 아닌데 고맙다고 어찌 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말하던지.”
나는 문득 그가 며느리를 굉장히 아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작은 애가 폴짝거리면서, 이 나무는 뭐고 저 나무는 뭐고…… 하루 종일 옮는 것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이 정원에 손을 대겠느냐.”
그 목소리가 얼마나 절절한지, 내 마음조차 울적해질 지경이었 다.
“아르가와 시오니는 성년이 되 자마자 결혼했는데, 2년 동안 아 이가 생기지 않았지.”
완연한 어둠이 내린 길에는 둥근 달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부축하느라 달라붙은 그림자가 길게 우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살짝 봄바람이 불어 꽃잎이 밤 하늘에 흩날렸다.
나는 조용히 펠릭스 어르신을 부축하며 새삼 저 멀리 보이는 잘 관리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는 부부를 위한 속설이 있어.”
“뭔데요?”
“귀한 아이가 쉽게 오라고, 오다가 헤매지 말라고 가장 비싼 대리석 길을 깔아 주는 것.”
“아……”
“우리는 마차가 다녀야 하는 이 길을 제외한 모든 산책로에 대리 석 길을 깔았고…”
펠릭스 어르신의 담담한 어조에 한숨이 담겼다.
“거짓말처럼 아이가 왔지.”
이상하게 슬퍼져서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 저택이 얼마나 설렘과 기대에 차 있었을지 그의 목소리 만 들어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아이가 걷게 되면 혹시라도 다칠 수 있으니, 그때 대리석 길을 다 없앨 계획이었는데.”
그 이후의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충분히 걸어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컸겠구나.”
친정에 갔던 시오니는 조산 후 시체로 돌아오고, 딸은 행방불명 되었다고.
“다시 그 귀한 아이가 쉽게 찾아오라고……”
펠릭스 어르신은 한숨을 쉬며 달을 바라보았다.
“오는 길 잃지 말고, 언제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제 집으로 부디 돌아오라고……”
“..............”
“이 길을 없애지 않고 있는 거 란다.”
나는 그가 세이린 경에게 부축 을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를 눈치챘다.
혹시라도 상태가 나빠진 것을 들키면 정원과 대리석 길을 없애고 그를 위한 산책로를 만들까 봐서 였다.
에나베 관절염이 심해지면 심해 질수록, 저녁 무렵 흙길 산책은 필수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주치의에게도 점점 나빠 지는 상태를 얘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르가 놈이 자작저에 몇 년간 들르지 않아도 괜찮아.”
미신에 기대어서라도 손녀딸을 기다리고 있는 간절함이 느껴져 서였다.
“내 손녀딸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구나.”
“..............”
“금발에 녹색 눈, 시오니를 빼 닮았다는데……. 아마 아주 영리 해서 꼭 우리를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시오니는 굉장히 당차고 똑 부러졌거든.”
“네, 그럴 거예요.”
나는 그의 팔짱을 더 꼭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친자 검사를 간편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얼마 전에 개발 했거든요.”
왠지 모르게 고이는 눈물을 참으며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북부에 계시는 페렐르만 자작 님이 돌아오시면 보여 드릴 예정이에요.”
본디 이렇게까지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왠지 밝고 명랑하게 종알거려야 할 것 같았다.
“용의 발톱을 이용한 방법인 데…… 검사 시간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어요.”
“그런 걸 개발했다고?”
“네. 뭐, 페렐르만 자작님을 위한 거기도 하지만 저를 위한 것 이기도 해요. 저도 보육원 출신 이거든요.”
나는 다시 한번 같은 길을 돌면서 말을 이었다.
“부모님을 찾고 싶어요, 저도.”
“..............”
“저를 버리셨든, 잃어버리셨든, 일단 만나 보고 싶기는 해요. 그 어떤 상황이더라도 원망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고 있어요.”
낯선 정원에서의 밤은 고요했 고, 그래서 이상하게 서로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 예쁘고 똑똑하게 낳아 주셨으니 그거 하나만큼 은 감사드리고 싶어서요.”
내 천연덕스러운 말에 펠릭스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걸렸다.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고 마음먹었지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 다.
“사실은 제 부모님도 이렇게 대 리석 길을 깔아 두는 마음으로 저를 기다리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러냐?”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세이린 경이나 주치의에게 말해서 정원부터 다 싹 갈아엎으라고 조언하려고 했는데요……”
펠릭스 어르신의 주름진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손녀딸분을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이 마음을 전달해 주시면 서로 너무 기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비밀 지켜 드릴게요.”
“흠, 홈.”
“아까 처방해 드린 환은 주치의께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대신 제가 공작성에서 직접 지은 뒤에 보내 드릴 테니 꼬박꼬박 드세 요.”
“……번거롭지 않겠느냐.”
“당연히 번거롭죠. 그러니까 오래 사셔야 해요. 손녀딸분 찾으 실 때까지.”
나는 그날 밤 펠릭스 어르신과 꽤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지금은 좀 바쁘지만, 연회에 다녀오면 가끔씩 찾아오겠다고 약속도 했다.
어쨌든 페렐르만 자작은 내 대부였고, 정신이 팔려있는 대부대신 그의 아버지를 가끔 돌봐 드리는 건 당연히 해 드릴 수 있 는 일이니까.
“크흠, 큼.”
이제 슬슬 들어갈 때가 될 무 렵, 펠릭스 어르신은 시선을 돌 리며 말했다.
“개인 열 추적기는 사용이 까다로워. 잘못했다가는 폭발해서 크 게 다칠 수도 있어.”
“그런 건 걱정 마세요.”
“하긴.”
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그가 중얼거렸다.
“이토록 오래 걸었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구나. 네가 적절히 부축을 잘해서 그런 걸 거야.”
“네, 맞아요. 제가 여러모로 참 섬세해요.”
“내 아들놈은 워낙에 깐깐해서, 멍청한 애를 오랫동안 조수로 두 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 다.”
“그럼요. 다들 2주를 못 버티는 데, 저는 벌써 5년도 넘었다고요.”
“그런데 열 추적기를 어디에 쓰 려고 하느냐? 사실 사용할 수 있 는 시간도 몹시 짧고, 일회용이 라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아이 템이지.”
펠릭스 어르신의 갈색 눈이 나 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악용될 소지가 상당한데.”
“악용은 하지 않아요. 다만 복잡한 곳에서 추적해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요.”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의사의 생명 존중 사상을 걸고 맹세할게요.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수많은 생명을 살리 기 위한 일이에요.”
“허.”
펠릭스 어르신이 혀를 차며 웃 었다.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내게 개인 열 추적기를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식사를 하고 공작성 으로 떠날 예정이지?”
“네.”
그는 자작저로 들어가면서 내뱉 둣 말했다.
“아침 식사는 같이 하도록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