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2화
다음 날부터 나는 갑자기 바빠 지기 시작했다.
승전 연회는 한 달 뒤였다. 덕분에 예법이나 화법, 걸음걸이와 춤 둥을 갑자기 배우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나마 내가 똑 똑하기에 다행이었다.
“리체 아가씨의 드레스를 맞추 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님이 보낸 재단사도 영혼을 다해 내 체형과 피부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황태자님의 초청을 받으셨다지요. 승전 연회의 첫 춤이라니, 모두가 주목할 걸요.”
“그것 참 최악이군요.”
“누구나 리체 아가씨의 드레스를 주목할 테니, 저한테는 엄청난 기회인 거죠.”
“저한테는 엄청난 스트레스고요.”
첫 춤을 춰야 한다니 까짓 거 추는데, 온갖 시선을 다 받는 것 은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큰일 을 치르려면 이 정도 희생은 해야만 했다.
‘베티아를 잘 이용해야 해.’
나는 영혼 없이 재단사의 호들 갑에 반응해 주며 생각했다.
‘그러려면 에르안의 협조가 필 요한데……’
에르안 역시 제국의 대귀족이니 연회에 참석할 것이다.
게다가 그의 첫 번째 사교계 진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취임식 때 가신 영애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분명 또 다시 주변의 이목을 살 것이다.
‘누구나 탐낼 만한 사람이긴 하지. 그런데..’
사실 계속해서 찜찜한 것이 하 나 있었다.
예전에 꾼 꿈 내용 때문이었다.
칸시아의 말에 따르면 내 꿈은 미래를 보는 것이라는데, 지난번 꾼 꿈의 내용이 영 마음에 걸렸 던 것이다.
거의 대다수가 흐릿한데, 마지막에 에르안이 반역을 한다고 해서 내가 깜짝 놀랐던 것만 기억 났다.
‘설마 반란군에 에르안이 몸을 담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무엇 때문에 열세 살부터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단속을 해야 했다.
뛰어난 습득력으로 스케줄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난 뒤, 나는 디엘을 불렀다.
“디엘.”
“어, 왜?”
“개인 열 추적기를 구할 수 있 을까?”
내가 ‘개인 열 추적기’를 언급하 자마자 디엘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못 구해. 마법 용품이잖아. 허 가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게다가 일회용 아냐?”
“페렐르만 상단도 못 구해?”
“아예 시장에 물량이 풀리는 상품이 아냐. 애초에 갖고 있는 사람도 극히 드물어.”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개인 열 추적기는 의료 기기 중 극히 드문 마법 용품으로, 특정한 체온을 가진 사람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의 뒤를 놓치지 않고 쫓는 데에는 가장 유용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물론 데이터 해석이 까다로워 의학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만 다룰 수 있는 데다가 비싸고, 악용 될 여지도 많아서 애초에 몇 개 되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일회용이었으니 아마 사용하지 않은 것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몸이 날래거나 관련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원하는 사람의 뒤를 몰래 밟 으려면 나침반처럼 생긴 개인 열 추적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페렐르만 자작님도 안 갖고 계 셔?”
디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키 지 않는다는 둣이 대답했다.
“옛날에 황실 연구진에 속해 있으실 때 하나 받은 걸로 알아. 연구 중간에 시오니 님이 돌아가 셔서 사용하지 못하시고, 그 후 저택에 방치 중이지만.”
“잘됐다. 사용 안 한 것이 있다 니.”
나는 신나서 말했다.
“그럼 그걸 가져오면……”
“페렐르만 저택에 가서 그걸 가 져오라고? 난 자신 없어.”
디엘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페렐르만 자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자작님은 네 부탁이면 들어주실 테니까.”
“기다릴 시간이 없어. 승전 연회까지 필요하다고.”
“그럼 서신을 주고받기에도 빠 듯한데. 지금 북부의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모르니까.”
“방법이 없을까?”
“딱 하나밖에 없어.”
내가 어떻게든 수를 써 보라는 듯이 칭얼대자, 디엘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네가 직접 페렐르만 저택에 가 서 받아 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페렐로만 저택의 누구한테?”
생각해 보니 페렐르만 자작은 공작성에도 붙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페렐르만 영지를 관리 해야 하긴 할텐데, 그게 누군지 지금까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누구긴 누구야, 페렐르만 자작님의 아버님이시지. 우리는 뒤에서 펠릭스 어르신이라고 불러.”
하긴, 페렐르만 자작도 부모와 형제가 있을 것이다.
“어르신이라고 해서 자비롭고 인자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상당 히 괴팍하셔.”
“그 집 핏줄이 다 그런가 보지, 뭐.”
나는 페렐르만 자작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페렐르만 자작의 딸도 그를 닮았다면 한 성깔 할 것 같았다.
“페렐르만 상단의 시작을 다지신 분이야. 그리고 페렐르만 저택에는 펠릭스 어르신 외에도 페 렐르만 자작님의 여동생, 세이린 경도 계셔.”
“경?”
“응, 정식 기사 서임을 받으신 분이야. 독신주의자셔서 남편과 자식이 없으셔. 나는……”
디엘이 몸을 한 번 떨었다.
“그분의 눈을 마주치는 것만 해도 무섭더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열세 살 에르안의 눈빛도 ‘무섭다’던 디엘의 말이 별달리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멀지 않다고 알고 있어.”
공작성도 아니고, 번잡스러운 황궁에서 누군가를 추적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기구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와야 했다.
“방문 서신을 보내 줘.”
나는 디엘에게 싱긋 웃으며 말 했다.
“내가 페렐르만 자작저에 갈 거라고.”
6. 페렐르만 자작저와 승전 연 회
“난 진짜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디엘은 옆에서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뭐 시키지, 아니 부탁하지 마.”
“알았어. 절대 연기 같은 거 안 시켜.”
아침부터 출발해서 꼬박 달렸으 나 저녁 즈음에야 도착한 페렐르 만 자작저는 그 규모가 공작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성이라기보다는 고급 저택에 가까웠고, 웅장한 멋보다는 아기자기한 세공이 돋보였다.
그러나 상단으로 이룩한 부가 워낙에 대단해서 저택 입구부터 섬세하게 세공된 대리석이 죽 깔 려 있었다.
‘산책로에 대리석이라니.’
게다가 정원에는 온갖 희귀한
관상용 식물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딱 봐도 이 지역의 식물들이 아 니고, 멀리서 꽤 돈을 들여서 가 져온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영지는 작고 작위도 낮은 편이나 어지간한 귀족가보다 더 많은 부를 쌓고 있다는 것 을 보여 주는 저택이었다.
내 생각을 눈치겠는지, 디엘이 옆에서 속삭였다.
“그때 시오니 님만 돌아가시지 않으셨어도…… 페렐르만 자작님은 황실 연구진에서 끝까지 실적 올 내셔서 백작 위는 받으셨을 거야.”
어쩐지,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꽤 가까이 위치한 자작저면서 가신 가문이 아니라는 것이 신기했 는데.
어딘가 소속되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한 집안인 것 같았다.
“연락 받았습니다.”
마차는 후문으로 보내고, 안내 에 따라 저택에 들어가자 깔끔한 초록색의 복장을 갖춘 하녀가 우리를 맞았다.
“리체 에스텔 님과 디엘 몰레킨 님이시죠?”
“네, 맞아요.”
“가주님과 세이린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녀가 안내하는 대로 자작저의 응접실로 가자, 과연 두 사람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나는 고풍스럽게 꾸며진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공간같지가 않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않았다.
물론 내가 페렐르만 자작저에 온 적이 없는 건 확실했다.
원래 나는 무언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답답했다.
여기서 아주 난감했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체 에스텔 입니다.”
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래, 오라버니의 조수라고? 앉아.”
키가 크고 늘씬하며, 가죽 바지를 입고 있는 여자가 고개를 까 닥했다.
나와 디엘은 맞은편에 앉았다.
예상했둣이,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세이린 리즈 페렐르만이었다.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노인은 아직 가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펠릭스 오리온 페렐르만이었고.
디엘이 경고했듯이 결코 손님을 받는 분위기가 부드럽지 않았다.
나는 맨 처음 페렐르만 자작을 봤을 때가 떠올라 의연하게 앉아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두 명 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 성질 더러운 놈의 비위를 5 년간 맞춘 건 대단하지만.”
하녀가 차를 내오고, 몇 모금 마신 뒤에야 펠릭스 어르신의 입 이 열렸다.
“그렇다고 해서 네 말만 믿고 개인 열 추적기를 줄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인사말도 없이 단호하게 이어지는 본론이었다.
“돌아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황실에서조차도 몇 개 배포되지 않은 물건이고 심지어 일회용 이야. 한낱 조수에게 넘길 수 있 는 물건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있을 텐데.”
펠릭스 어르신은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갈색 눈이 차갑게 빛났다.
“다루기도 까다로워서 엄청난 실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 악용 될 소지가 있어 그에 걸맞은 인성도 필요해.”
아무리 노인이어도 자비라곤 조 금도 없다는 디엘의 말이 맞았다.
디엘은 역시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굳어 있었다.
“그런데 보증되지 않은 조수에게 내가 그걸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가방에서 천천히 작은 쪽 지 하나를 꺼냈다.
“페렐르만 자작님은 제 대부님이시기도 하세요.”
내밀기가 민망할 정도로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래. - 대부’ 라 는 쪽지를 본 펠릭스 어르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들의 필체는 알아볼 수 있는 지, 그가 열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렇게 긍정적인 어조를 사용 하다니.”
쪽지를 함께 본 세이린 경도 혀 를 차며 중얼거렸다.
“무슨 변덕으로 이런 일을……. 지금 누구를 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면서.”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큼 제 실력도, 인성도 믿으신다는 얘기지요.”
“어쨌든.”
펠릭스 어르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이 대부가 되어 준 아이고, 세르이어스 성에서 온 손님이니 그에 걸맞은 대접은 해 주겠다만 개인 열 추적기는 안 된다.”
세이린 경 역시 냉담하게 대답 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방을 내 주도록 하지. 저녁을 먹고 여독을 푼 뒤 내일 여유 있게 떠나도록 해.”
디엘과 내게 차갑게 덧붙인 뒤, 세이린 경은 펠릭스 어르신을 부축하며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 보며 조용히 앉아 남은 차를 마 셨다.
디엘이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거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 었다.
“내일까지 가 봐야 아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