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1화
“그러니까…… 저희도 사정은 잘 모르는데, 옆 테이블에 있던 황태자님께 리체 아가씨가 도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군의관들도 잘 몰랐던 황태자 님의 눈병을 진단해 주셨거든요.”
자유 도시에 리체의 호위로 갔던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말을 안 하면 더 큰일이 날 것 같 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아무 말도 하 지않고 듣고 있던 에르안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리체가 황태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한 게 사실이야?”
기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결국 가장 나이 많은 기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에르안이 이마를 짚고 열은 신음 소리를 냈다.
다들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욕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잔뜩 굳어 있는 기사들에게 낮게 물었다.
“제이드 황태자를 실제로 보니 어때.”
그는 열셋까지는 공작성에서 앓 느라 남들과 교류가 없었고, 그 이후에는 이르비아에 있었기 때 문에 당연히 황태자를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이번 승전 연회 때나 처음 보게 될 예정이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나보다 잘 생겼는지 몸은 더 좋은지 말해.”
리체가 시각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르안은 추궁하듯 물었다.
공작성에 온 뒤로 이렇게 난감 한 상황은 없었다고 생각하며 기사들이 대답했다.
“음.. 스타일이 다르시죠. 황태자님은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이 시고……”
“키는 공작님보다 더 작으시지만, 어쨌든 오랜 전쟁을 치르셨 으니 몸은 좋으십니다.”
“본디 푸른 눈이 유리알 같다는 소문이 있으신지라……”
“언행이 무거우신 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순진한 소년 같으신 면이 보였고요.”
에르안의 뒤에 서 있던 지켈이 몰래 고개를 저었다.
눈치껏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순식간에 입을 다문 기사들 앞 에서 에르안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가 봐.”
기사들은 예를 갖춘 뒤에 누구 보다도 빠르게 물러났다.
지켈과 둘이 남은 에르안은 잠 시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말했 다.
“리체가…… 다시 만나고 싶다 는 말을 직접 했다고? 난생처음 본 황태자에게? 받아들일 수가 없군.”
“음......”
지켈은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뭐, 황태자님도 승전 연회에 초청하시기까지 하셨잖아요. 일방의 호감은 아닌 듯합니다. 첫 춤을 리체 아가씨와 추시겠다는 뜻인데요.”
“아, 첫 춤……”
에르안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는 둣이 중얼거렸다.
“그놈이 리체의 허리를 안고 빙 빙 돈다고? 젠장.”
“ 음........”
“말도 안 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나하고도 리체는 춤을 춘 적이 없었어.”
“공작님, 그게……”
지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취임식 저녁에 리체 아가 씨를 데려오며 몇 마디 나눠 봤는데 말입니다.”
그나마 에르안에게 이 정도 말 할 수 있는 사람도 지켈뿐이었다.
“그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는 의미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더 말해 보라는 둣이 에르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체 아가씨는 공작님을 어릴 때 정말로 ‘키웠다’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그건 맞아.”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아마 계속 공작님을 남자로 보지 않을 겁니다.”
“……왜지?”
“어린 날의 칭얼대는 아기 같던 시절만 떠올리시니까요.”
지켈은 물 흐르듯이 설명했다.
“게다가 리체 아가씨는 평민입 니다. 애초에 공작님과 잘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없으실텐데 공작님을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겠어요?”
“그럼 황태자는.”
“황족들은 부인을 여럿 둘 수 있고, 정비가 아니라면 평민도 괜찮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르안의 꽉 쥔 주먹에 핏줄이 섰다.
“다른 놈한테 리체가 가는 것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데, 심지어 측실?”
“그렇다고 해도 그 자리에 가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닥쳐.”
그가 벌떡 일어섰다.
“리체가 날 남자로 보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자가 되는 건 아니지.”
“그거야 그렇지만.....”
“리체의 성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어.”
“..............”
“그때까지 남자로 보이면 되는 거야.”
“끝까지 남자로 안 보시면요?”
“그럼 내가 정말로 남성적인 매력이 없는 거겠지.”
에르안이 참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리체는 무조건 옳아. 정말 그렇다면 내가 부족한 거야.”
돌아온 그를 바라보는 리체의 초록색 눈에는 아무런 열기가 없었다.
정말 작정하고 유혹할 때만 적나라하게 흔들리는 표정을 보여 주곤 했다.
그나마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 면 바로 추스르고 다시 또렷한 눈빛으로 돌아와 버려서 더 분위 기를 잡기가 어려웠다.
서로를 보는 감정이 다르다는 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이 그를 얼마나 안달 나게 하는지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5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그리웠는지도, 그러다 막상 만난 순간 에 번개를 맞은 것처럼 짜릿했다는 것도.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더욱 더 선명해지는, 그녀에게만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감정까지.
적어도 제국법에 따라서, 그녀 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잡아야 했다.
성년이 되면 교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약혼을 거쳐 결혼까지 하고 싶었다.
제국법이 결혼을 막는다고 해도 당연히 수많은 대안을 생각해 놓 은 상태였다.
물론 지금 혼자 조급한 마음을 무작정 드러낼 때는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리체가 성년이 되기만 하면 그 는 곧바로 고백하고 교제를 신청 할 참이었다.
그 전에 차분히, 여유롭게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그의 목표 였다.
그런데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황태자까지 끼어들다니.
그는 공작 위를 이양받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리체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다짐을 더 굳혔다.
반면 지켈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좀 이상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더 눈이 돌아가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에르안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지켈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차피 귀족 과 평민은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 지 않았다.
그에게 리체는 너무 절대적이어서,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기조차 꺼려졌다.
그렇게 지켈은 리체의 미래를 걱정하고, 에르안은 자신의 미래 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연무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계셨군요.”
호아킨이 었다.
그는 케인의 심문을 위해 취임식에도 짧게 얼굴만 비춘 터였다.
“급히 보고해야 할 것 같아 왔 습니다.”
초승달이 걸린 늦은 밤이었다.
호아킨의 목소리가 심각하여, 에르안 역시 굳은 표정으로 일어 섰다.
“케인의 심문이 끝났습니다. 고 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심장마 비로 죽었습니다.”
“……최대한 죽이지 말았어야지.”
“예상 외로 심약했던 모양입니 다.”
“배후를 말하긴 했나?”
“아뇨. 직접적인 배후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습니다.”
일전에도 결국 소득 없이 심문을 끝낸 경우가 많아서, 호아킨은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다.
뒤에 누가 있든, 붙잡히더라도 뒤처리를 잘할 수 있는 첩자들만 골라 넣은 것이 분명했다.
케인을 10년 넘게 봐 왔다.
조용히 숨죽여 있다가 결정적일 때 드러나게 한 것을 보면 심문 둥으로 입을 열게 하기는 어차피 어렵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간접적인 배후는 찾았습니다.”
“간접적 이라고?”
“수면향을 피우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을 포착했거든요.”
호아킨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 을 쉬었다. 그 역시 믿을 수 없 는 결과였다.
“공작님.”
“말해.”
“……반란군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에르안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 다.
“반란?”
반역의 무리가 있다는 것은 그 냥 떠도는 소문일 뿐이었다.
황태자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돌아온 데다가 제국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시기에 대체 누가 반란을 꿈꾼단 말인가.
“정말로 반란의 무리가 있다고?”
“만일 맞는다면 아주 오래전부터 조직되어 있을 겁니다. 케인은 굉장히 오랫동안 공작성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반란군이 오래전부터 세르이어스를 노려 왔단 말이 지.”
“공작님께서 어리셔서 말씀 안 드렸었지만, 5년 전에 마님을 독살하려던 시도도 있었습니다. 리체 아가씨가 키푸르츠를 이용하셔서 밝혀냈죠.”
“아, 그 사건이……”
에르안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 다음이 리체, 그 다음이 호 아킨 단장이었다는 뜻이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나도 포함이겠지.”
그 모든 것을 리체가 밝혀냈다.
그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리체는 에르안 역시 지키고 싶어 할것이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리체 가 다칠까 봐, 에르안은 그것만 이 두려웠다.
“반란군이라.”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