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60화
나는 케인즈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굳이 올 필요가 없는데, 이상하게 에르안이 따라왔다.
나와 케인즈 모두 에르안이 왜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왜 여기 있냐고 묻지는 않았다.
케인즈는 그때 빌려주었던 「이르비아의 희귀 안과 질환」이라는 책을 직접 건네주었다.
나는 다소 당황해서 책을 받아 들었다.
기껏해야 책이 시종 편 으로 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사실 귀족 영애인 줄 알았는데……”
케인즈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민망해하지 않으려고 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이미 내가 세르이어스 공작성 주치의의 조수 라는 것을 알고 온 듯했다.
하기야, 황실에서 알아내려면 그쯤이야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가씨가 귀족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더군요.”
“예.”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혹시나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케인즈는 그저 이 모든 것이 재 미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사실 내가 평민이라 반말을 써 도 되는데, 예전처럼 존대를 써 주는 것만 해도 굳이 나를 추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대부가 되신다는 건……”
“네, 대부가 되어 주셨어요.”
비록 비둘기가 전해 준 ‘그래. - 대부’라는 말이 다였지만.
그 말에 에르안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언제?”
“얼마 안 됐어요. 마님께는 말씀드렸는데.”
에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까지 들어가 지 않은 걸 보니, 아직 마님과의 사이가 회복이 되지 않은 듯했 다.
“흠.”
대부는 보통 귀족의 문화였지만 평민이라고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사실은 하나 더 드릴 게 있습 니다.”
케인즈는 품속에서 금색 봉투를 하나 꺼냈다.
‘설마 돈인가?’
사실 풍족하게 지내고 있어서 돈이 크게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직접 왔으니 액수가 클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케인즈가 신사답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예상하고 계셨겠지만, 아가씨 덕분에 황태자님 눈을 잘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 다행이에요.”
“만일 자유 도시에서 아가씨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황태자님은 한쪽 눈을 실명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랬겠지요. 제 공이 큽니다.”
나는 차를 마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황태자님께서는 다시 리체 양을 만나고 싶어 하신 답니다.”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다.
‘들이밀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잠깐 당황해하는 사이, 케인즈가 말을 이었다.
“리체 양도 황태자님을 다시 꼭 뵙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에 즉시 반응한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 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정말이야, 리체?”
“아, 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안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케인즈는 내게 금빛 봉투를 내 밀며 웃었다.
“사실 황태자님께서는 승전 연회 때, 리체 양이 오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계셨는데…… 평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봉투를 받아 들고 살짝 열어보니 안에 돈이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평민이 숭전 연회 때 참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방법뿐이지요. 황족의 초청입니다.”
나는 화려한 연회 초대장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족을 구하신 공로로, 황태자 님이 친히 승전 연회에 초대하오니 꼭 참석해 주시길 부탁드립니 다.”
내가 연회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까 귀족 영애들이 승전 연회에서 춤 신청을 받는다, 안 받는다 싸우던 것들이 기억났다.
‘에이비크 자작가는 무조건 참석한다는 거지.’
연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여러 귀족가가 다 참석하는 황실의 커다란 행사라면 분명히 명백한 증거를 잡을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승전 연회 때, 영지 구석에서 조용히 의원을 하던 내게도 들릴 만큼 대단한 사건이 하 나 일어나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아버지가 반란군임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던 베티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황금색 봉투를 가만히 매만졌다.
‘잘만 이용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네.”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리체, 참석하겠다고?”
에르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안 되나요?”
“아니…… 네가 가고 싶으면 가 는데……”
어딘가 멍해 보이는 그의 목소 리를 덮으며 케인즈가 흐뭇하게 웃었다.
“황태자님이 좋아하시겠습니다.”
“왜요?”
“눈이 완치되시고 리체 양 이야 기를 자주 하셨거든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 다. 에르안이 들고 있던 찻잔을 깨트려서였다.
하녀가 혼비백산하여 치울 동안, 에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뭐라고?”
어제부로 선대 공작 부인이 된 이사벨 마님은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승전 연회 때 황태자님이 널 초청하셨다고?”
“네.”
손님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하고, 마님은 피곤하다며 신경 안정제 처방을 위해 나를 불렀다.
그러고 나서 이어진 가벼운 티 타임에 내가 가볍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자 그녀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유 도시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마님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 손을 잡았다.
“리체, 승전 연회라면 얼마 안 남았다. 지금 유명한 재단사들은 예약이 다 꽉 차 있을 거야. 내 일부터 우리도 서둘러야겠다.”
“네? 저 옷 많은데요.”
“황태자님의 직접 초청이잖니.”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첫 춤은 황태자님과 춰야 해. 그게 관례야.”
“뭐라고요?”
나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펄쩍 뛸 뻔했다. 춤이라니, 나와 가장 안 어울리는 용어였다.
“저 춤 못 춰요……”
“당연히 배워야지. 내일부터 가정교사를 바로 붙여 주마. 혹시 모르니 예법 선생과……”
연구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갑자기 번거로운 일이 끼어들고 있었다.
내 울상인 얼굴을 잘못 해석했는지, 마님은 혀를 끌끌 차며 한 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내가 그렇게 너를 양녀로 만들고 싶었는데.”
그녀의 눈에 또 다시 분노가 일렁거렸다. 그 상대는 당연히 에르안이었다.
“네게 어떤 일이 생기든, 적어도 신분이 발목을 잡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단다.”
“어떤 일이라뇨?”
“황태자님께서 네가 좋다고 하 셨을 때에 황태자비가 될 수 있.........”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귀족과도 혼인이 불가능한 평민 신분인데 황태자비라니, 언급하 는 것만도 몹시 불경스럽게 느껴 졌다.
“마님, 그럴 일은 없어요.”
“왜 없니?”
그녀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둣 말했다.
“너만큼 예쁘고 귀엽고, 똑똑하 고 착한 애가 어디 있다고. 여러 가신 집안들의 영애들이 잔뜩 몰려왔지만 너만 한 애는 없더구나.”
“제가 오늘 베티아 영애의 발목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분의 금발이 정말 반짝이던데요. 제 흔 한 갈색 머리랑은 비교도 안 되게요.”
“네가 왜 에이비크 영애를 치료 하니?”
마님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러면서 번득이는 눈으로 재차 물었다.
“누가 너한테 그런 하찮은 일을 시키던?”
“..............”
“안 되겠다. 에이비크 자작가에 당장 연통을 넣어 정식으로 사과-”
“아, 아니에요.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하여간 좀 이상한 핀트에서 화 를 내는 건 에르안도 마님도 똑 같았다.
갑자기 사나운 표정으로 변하는 것도.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어쨌든 승전 연회 때, 마님이 상상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글쎄.”
마님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태자님은 이번 승전 연회의 주인공이야. 넌 첫 춤의 상대고. 평민 신분이라는 걸 알면 뒤에서 상당히 물어뜯길 거야. 그 꼴 나지 않도록 내가 최대한 지원해 주마.”
“음, 사실 뒤에서 상당히 물어 뜯겨도 괜찮지만 세르이어스에 흠이 가면 안 되니까, 열심히 할게요.”
“그래.”
여전히 내가 평민 신분으로 승전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마뜩잖 은지,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여간 내 배로 낳았지만 에르안, 이 답도 없는 파렴치한 녀석……”
공작 부인이 냉정한 얼굴로 말 했다.
“공작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나는 웅얼웅얼 대답했다.
“그 미친 놈 편들지 마라. 보면 볼수록 이상해져서 돌아왔어. 차라리 비실비실하던 때가 나았나 싶을 정도니.”
“에이…, 그래도 건강하신 모습이 좋죠. 게다가 엄청 잘나지셔서 돌아오셨잖아요, 여러모로. 영지민 입장에서는 그냥 일 잘하 시고 관리 철저한 공작님이 좋죠”
“제가 잘난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만한 데다가, 사람들에게 곁도 안 주고……”
“그래도 영애분들께서는 공작님 께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시던데요.”
“저 성질머리를 어떤 여자가 맞추겠니. 어미인 나도 속이 터지는데. 누가 며느리가 될지 모르 겠지만 불쌍해 죽겠어.”
음. 그 정도는 아닌데.
어쩐지 나 때문에 사이가 너무 나빠진 것 같았다.
‘너무 아드님을 후려치시는....’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한숨 을 쉬었다.
“어쨌든 승전 연회는 걱정하지 마라.”
‘걱정 안 했는데.’
“이제 나도 영지 관리에 손을 뗐으니, 내가 영혼을 갈아서 어떻게든……”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