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9화
‘막상 취임식에 오니 웨데릭보다 에르안이 마음에 들어서 단독 행동을 하고 싶어 하나 보다.’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치료소에서 바빠 죽겠는데, 피부 미용 약을 만들라는 명령을 자꾸 내린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귀족 영애들이 알음알음 내게 미용 시약을 얻어 간다는 걸 어디서 듣고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얼른 만들어서 자기한테 도 달라고 난리 쳤었지.’
웨데릭의 약혼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던 아론이 나를 들들 볶았던 걸 생각하면 또 열이 올라 왔다.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은데, 신분의 한계 때문에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일단 부상을 깔끔하게 치료한 나는 태연하게 끼어들었다.
“다 됐어요. 곧 진통 효과가 있는 연고를 하녀 편에 보내 드릴 게요.”
어차피 내게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일어나며 증상과 처치를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나는 허리를 굽힌 채로 고개를 돌렸다.
에르안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에르안이 아침 훈련을 마치는 시간이었다.
베티아가 옷매무새를 재빨리 다듬더니 말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아까 목청이 떠나가도록 짜증을 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조였다.
“실비나 영애가 저를 밀치는 바 람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실비나가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아뇨, 먼저 제 발을 밟은 것은 베티아 영애……”
에르안은 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리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 어?”
“아.”
나는 완전히 허리를 펴고 일어 나며 말했다.
“이분이 발목을 삐셨다고 해서.”
“누가 부탁했는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누가 너한테 손님의 발목까지 봐 달라는 헛소리를 했지?”
목소리가 얼마나 섬뜩한지, 나를 불러온 하녀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녀의 눈에 공포감과 함께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그렇게까지 겁먹을 건 없는데, 상당히 마음이 약한 하녀인가 보다 생각했다.
“지나가다가 그냥 제가 온 거예요. 어쨌든 공작성의 손님이시고, 저는 주치의의 조수……”
“네가 성년이 되지 않아 조수 신분인 것이지 사실상 넌……”
그가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모두에게 말한다는 둣이 낮게 선언 했다.
“넌 내 주치의야.”
시끄럽게 서로를 욕하던 베티아와 실비나조차 입을 다물었다.
“다른 그 누구의 상처도 볼 필요 없어. 가자.”
하녀가 고맙다는 둣이 내게 울먹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차가울 것까진 없는데, 귀족 영애들조차 싹 다 입을 다문 상황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진통 효과가 있는 연고를 하녀 편에 보내겠다며 연구실로 향하는데 에르안이 졸졸 쫓아왔다.
“리체, 어디 가?”
“연구실이죠, 뭐. 저는 연구실하고 제 방 외에는 잘 나다니지 않아요. 디엘 외에는 공작성 안에 딱히 친한 사람도 없고.”
나는 하녀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같은 평민이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다.
사실 내 위치는 하녀들과 비숫해야 하는데, 페렐르만 자작이 처음부터 너무 좋은 방을 주고 심지어 개인 하녀까지 붙여 주는 바람에 위치가 어설퍼졌다.
물론 살면서 한 번도 친구가 필 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생애에서 나는 딱히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 았다.
친구도, 부모도 그냥 ‘없어도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아무도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었나 싶기도 했다.
어쩌면 혼자라는 외로움이 그때 사무쳐서 혈연을 찾기로 마음먹은 것일 수도 있었다.
“데려다줄게.”
그는 햇빛이 쨍쨍한 쪽에 서서 내게 그늘을 만들어 주며 말했다.
“외부인이 많아서 위험해.”
“대낮에, 공작성에서요?”
“내가 악몽을 꿨어.”
“공작님이 악몽을 꾸셨는데 저 를 왜 데려다주세요?”
“케인이 망치를 들고 네게 달려드는 꿈.”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게는 그게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어. 다음번에는, 아무리 네 말이어도, 너를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 대할 거야.”
“공작님, 그건……”
내가 대꾸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조차도 오랜만에 보는 웨데릭 이었다.
“에르안.”
웨데릭은 나를 잠시 쳐다보고 나서 에르안에게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공작 위 받은 것 축하한다. 어제는 네가 너무 정신이 없어 보여서 말도 못 걸었어.”
웨데릭이 내민 손을 잡는 에르 안의 키가 그보다 훌쩍 컸다.
“고마워.”
“조수 아가씨도 오랜만이네.”
에르안의 짧은 대답에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고, 웨데릭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제 취임식에서 안 보이던데.”
“제가 갈 자리는 아닌 것 같아 서요.”
“왜 아니야.”
웨데릭의 친절한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릴 때부터 에르안이라면 끔찍했잖아. 나랑 놀 때마다 에르안만 응원하고.”
“그거야 당연하죠. 저는 공작성의 사람인 걸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때에는 웨데릭 님이 자꾸 에르안 님보고 공놀이도 못 한다, 달리기도 못한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서 제가 속이 상했었어요.”
에르안 앞에서 대놓고 먹이고 싶어서,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잘 크실 수 있으신 분인데 자꾸만 부정적으로 평가하셨잖아요. 그 나이에는 가뜩이나 가까운 사람한테 영향을 많이 받는데.”
웨데릭이 힐끗 에르안을 보았다.
다소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표정에 나는 약간이나마 후련함을 느꼈다.
“설마 내가 하나뿐인 사촌 동생을 정말 그렇게 생각했겠어?”
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음을 섞어 말했다.
“다 장난인 거지.”
“웨데릭 님은 장난이셨겠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그게 그 당시 에르안 님께도 장난이었을까요?”
내가 살짝 비꼬자 웨데릭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조수 아가씨, 주제를 넘지 않 는 게 좋을 거야.”
냉담하게 우리의 대화를 듣고있던 에르안이 끼어들었다.
“형이야말로 주제를 넘지 않는 게 좋겠어.”
깜짝 놀랄 만큼 살기 어린 목소 리였다.
역시 웨데릭이 어릴 적 나름대 로 학대했다는 것을 알아챘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내가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리체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아니, 거기서 왜 내 이름이 나 와.’
정말로 함부로 대해진 건 자기 자신이면서.
“에르안.”
웨데릭이 어이가 없다는 둣 혀 를 찼다.
“이 평민 출신 조수가 귀족인 나한테 함부로 대한건안 보여?”
“리체는 그래도 돼. 적어도 여기서는.”
뭔가 점점 더 핀트가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 나 역시도 약간 어안이 벙벙하여 에르안을 바라 보았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이고, 내가 이곳의 주인이니까.”
자연스럽게 말하는데도 오만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그래.’
나는 부들부들 떠는 웨데릭을 앞에 두고 간절히 생각했다.
‘절대 뺏기지 마라.’
“뭐, 옛날에 내게 어떻게 했든 그땐 형도 어렸으니까 별로 중요 하지 않은데……. 다시는 리체에 게 평민 출신 조수니 뭐니 하며 그딴 표정 짓지 마.”
무심코 올려다본 그의 옆모습에 선명한 분노가 보였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공기를 얼려 버릴 것 같이 냉랭했다.
“너, 너……”
“그리고 다음번에는 내게 예를 좀 갖추도록 해.”
그가 차갑게 말했다.
“리체의 위치를 지적할 시간에 형의 위치도 좀 알고.”
고소해 죽을 것 같았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팽팽한 기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에르안의 냉랭한 기운만 가득한 분위기였다.
그가 웃지 않으면 이렇게 공기 자체가 무거워진다는 걸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녀들이랑 디엘이 자꾸 에르안이 무섭다고 오해하나 봐……’
그때 였다.
“리체 양?”
누군가가 반갑다는 둣이 내 이 름을 불러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어……”
내 눈이 커졌다.
여기서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사람이었다.
“케인즈 경?”
자유 도시에서 제이드 황태자의 눈을 치료해 주었을 때 대화를 나누었던 군의관이자 황태자의 주치의였다.
“한참 찾았습니다.”
케인즈가 에르안에게 예를 표하고, 바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취임식 때문에 오신 건가요?”
혹시 내가 모르던 가신 집안인가 싶어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손님 신분으로 오늘 도착했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제이드 황태자님께서 보내셨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