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8화
5. 치료의 나비 효과
세르이어스 공작성은 이토록 많은 손님을 받는 것이 굉장히 오랜 만이었다.
각지에 퍼져 있던 가신들은 혼 자만 오지 않았다.
성년을 앞두 거나, 성년이 막 지난 딸들을 모두가 대동하고 온 것이다.
새로 공작 위를 물려받는 에르 안에 대해서는 다들 기대가 별로 없었다.
가신들의 기억에 에르안은 매일 병석에만 누워 있는 의기소침하 고 깡마른 소년이었다.
그나마도 요양이 필요하다며 5 년간 남부 지역에 내려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래도 광활한 공작령과 황실에 비견할 만한 대귀족의 지위는 누 구나 탐낼 만한 배경이었다.
그래서 가신들은 영 탐탁지 않 아 하는 여식들을 밑져야 본전이 라는 마음으로 끌고 왔다.
하지만 에르안이 취임식에 나타난 순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끌 려온 영애들의 생각은 거의 하나 로 수렴했다.
‘성격은 좀 더러워 보이고 인상이 좀 무섭지만 인생을 걸 만하다’
크고 화려하며 고풍스러운 공작 성은 누구나 탐낼 만한 웅장함을 지니고 있었다.
취임식에 나타난 에르안은 표정이 딱딱하고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것이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풍채가 좋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올 갖고 있었 다.
전혀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더 감탄스러웠다.
다정함이나 상냥함 같은 것을 포기하더라도 얼굴만 보면 뿌듯 하게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시어머니 자리도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동안 공작성의 안주인 자리를 지켰던 이사벨 역시 싸늘한 얼굴 로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남편 대신 영지를 맡고 나서 초 반 몇 년 동안 소위 말하는 ‘피의 통치’를 했던 그녀의 검은 눈 만 마주쳐도 섬뜩했다.
이사벨과 에르안도 묘한 관계인 것 같았는데, 성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양녀를 맞는 문제에서 크게 부딪친 뒤 서로 필요한 말만 하는 상태라고 했다.
어쨌든 그는 취임식 내내 날카 로운 눈으로 누군가를 찾는 듯했고, 가신들의 축하 인사에도 듣 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거 알아요? 내 하녀가 여기 하녀들에게 엿들은 얘기인데…… 성격이 이사벨 님을 닮아 아주 잔인하대요. 뭘 잘못하는 꼴을 못 본다는데.”
“하긴, 눈빛 봐요. 그 어떤 사람 도 안 좋아한다는 표정이야. 항 상 기분도 나빠 보이고.”
“오늘같이 좋은 날, 웃는 모습 한 번을 안 보이잖아요.”
“공작성 분위기 봐요. 완전 딱딱하고 팽팽해. 며칠 전에도 참수한 시체가 걸렸다는데요.”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단점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 여론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만나고 있는 영애들조차 없었다.
그 말은 즉, 모두가 시작이 같다는 뜻이었다.
취임식 날 저녁 만찬이 끝나고 에르안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려던 영애들 몇몇은 허탕을 쳐야만 했다.
만찬에서도 그는 나온 디저트만 노려보더니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기에 바빴다.
그 후 누구와도 별 대화를 나누 지 않고 바람과도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햇빛이 쏟아지는 아침, 영애들은 정원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며 두 번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감히 이사벨에게 말을 걸어 함께하자 청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영애는 없었기에, 에르안이 연무 장에서 새벽 훈련을 하고 난 뒤 꼭 지나쳐야 하는 정원에 자리
잡은 것이다.
베티아 엘리 에이비크는 에르안을 마음에 들어 하는 영애들 중 에서도 가장 자신감이 넘쳤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또래 영애는 없었다.
반짝거리는 금발에 푸른 눈은 언제나 칭송받아 왔다.
큰맘 먹고 수도에서 맞춘 은색 드레스는 여기서 가장 화려했다.
언제나 외모에 자신이 있던 그 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신분 상숭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인 에이비크 자작 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자꾸만 자신을 웨데릭에게 붙이고 싶어 했다.
‘꿈을 크게 가져야지, 아버지도 참.’
웨데릭은 고작 남작가의 영식이었고, 외모도 에르안에게 댈 것 이 못 됐다.
대체 왜 그런 남자를 주기적으로 만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 다.
‘막상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것 같다고 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물론 어제 하루 동안 관찰한 에 르안을 보아하니 딱히 좋은 남편 감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말 한 마디 붙이기도 어려워 보 이는 차가운 얼굴은 멀리서 보기 에만 좋았다.
게다가 기사단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니 말버릇도 험한 것 같 았다.
‘남부에서 교양 없게 자랐으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공 작 부인이 되면 누릴 수 있는 게 얼마야.’
물론 그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티타임 중 신경전은 대단했다.
“베티아 님은 웨데릭 님과 좋은 관계라고 들었어요.”
“그렇지는 않아요.”
베티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아버지들끼리 친분이 깊으신 것뿐이죠. 그나저나 실비나 님은 약혼 얘기가 나오고 있는 영식들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요.”
“다 말만 돌고 있는 거랍니다. 저는 아직 마음을 준 사람이 없고요. 하지만 베티아 님은 웨데릭 님과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신 다고……”
실비나가 웨데릭을 자꾸만 언급 하는 이유가 눈에 보였다.
뭣도 아닌 것이 성질을 긁자, 베티아는 실수인 척 실비나의 발 을 꾹 밟았다.
꽤 굽이 높아 아플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사 과했다.
“어머, 실비나 님. 죄송해요. 자세를 바꾼다는 게.”
“괜찮아요.”
문제는 실비나 역시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잠시 잡아 주시겠어요? 상처를 좀 봐야 할 것 같네요.”
실비나는 허락도 받지 않고 베티아의 어깨를 짚은 뒤 실수인 척 거세게 밀쳤다.
베티아는 나동그라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내, 내 발목! 악!”
차를 내오고 있던 공작성의 하 녀들이 깜짝 놀라 달려온 후 그 녀를 부축했다.
“저 여자가 날 밀쳤어! 난 정말로 실수였는데 말이야!”
베티아가 소리를 질렀다.
“의사! 의사 불러와!”
“자, 잠시만요. 일단 방으로 돌아가시면……”
“나 꼼짝도 못해! 의사를 여기 로 불러오라고! 얼른!”
베티아 나름대로는 에르안이 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계산한 행동 이었다.
에르안 앞에서 이렇게 실비나의 탐욕을 밝히고 자신은 불쌍하게 당해버린 가여운 부상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상에 순진하고 처연한 영애로 기억에 남으면 더 좋았다.
하녀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때마침 구세주 같은 사 람의 모습올 보고 가슴올 쓸어내 렸다.
오전부터 아론의 속을 뒤집기 위해 여유 있게 온실로 향하던 리체를 발견한 것이다.
***
“다리가 삐었다고요?”
하녀 하나가 난감해하며 내게 달려왔다.
그동안은 손님이 잘 오지 않았기 때문에 손님의 부상까지 내가 봐 주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그래도 귀족 영애가 다쳤다는데 기사단의 의무실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별것 아닌 부상 정도야 봐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하녀 를 따라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하던 정원은 귀족 영애들의 티타임 때문에 테이블이 죽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난장판이 된 테 이블에 다가갔다.
“꾀병 부리지 마세요, 베티아 님.”
붉은 머리의 영애 하나가 씩씩 거리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공작님의 눈에 띄고 싶어서 이 러시는 거, 모를 줄 알아요?”
“그러는 실비나 영애는 왜 절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이시죠?”
확실히 둘 다 목청에는 이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만 더 지켜봐도 재미있는 싸움 구경이 되겠지만, 나는 사명감으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공작성 주치의의 조수, 리체 에스텔입니다. 실례지 만 누가 다치셨는지요?”
“나.”
베티아라고 불린 금발 머리의 영애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발목 을 내밀었다.
“내가 다쳤어. 실비나 님이 얼 마나 세게 밀었는지 걷지도 못하 겠어.”
“……걸을 수는 있으실 것 같은 데.”
나는 화려한 치마 속에서 그녀 의 발을 잡고 뼈의 위치를 확인 했다.
“일단 급한 대로 뼈만 좀 맞추고, 곧 진통 효과가 있는 연고를 처방해 드릴게요.”
물론 실컷 싸우고 있는 그들의 신경은 내게 쏠려 있지 않았다.
내가 세심하게 뼈의 위치를 보 는 동안 그들은 말싸움을 계속했다.
엿들어 보니 에르안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영애들의 기 싸음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니 엄청난 신랑감이구나.’
이전 생애에서는 오늘내일하며 자리보전을 하느라 취임식도 못 할 지경이었으니 결혼 같은 건 말도 나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기저기서 탐낼 만하지. 무려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안주인이 되는 건데.’
곰곰이 생각해 봐도 에르안의 단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훌륭한 외모, 넘치는 부유함, 공작이라는 대귀족 신분, 다정하고 상냥하면서도 선을 잘 긋는 성격 까지.
뭔가 아주 뿌듯하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한 기분이었다.
“두고 보세요, 실비나 님. 그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에르안 님께 춤 신청 한 번 못 받을걸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영애도 곧 있을 황태자님 승전 연회 때 에르안 님과 춤을 추기엔 그른 걸요.”
베티아는 싸우느라 눈이 돌아갔 는지, 내가 발목뼈를 맞춰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아까 죽겠다고 난동을 피우던 건 확실히 엄살인 게 분명했다.
“아무리 에르안 님이더라도, 사 촌 형과 염문설이 있는 영애에게 눈길이나 주시겠어요?”
“헛소문 퍼트리지 마세요, 실비 나 메리엔 케르하이먼.”
베티아의 살벌한 목소리에 실비 나도 벌떡 일어나 질 수 없다는 둣 경고했다.
“먼저 날 모욕한 건 당신이에요, 베티아 엘리 에이비크.”
발 뼈를 다 맞추고 일어나려던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에이비크?
에이비크 자작가?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베티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름만 알고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회귀 전, 웨데릭이 공작령을 점령했을 때 그의 약혼녀로 발표된 이름이었다.
그리고 에이비크 자작가는 반란군이 궐기하자마자 발표된 명단 에 있던 가신 가문이기도 했다.
‘베티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미 반란군 쪽에 있는 걸 모르는 구나.’
일부러 다 고친 그녀의 발목을 한 번 더 매만지며 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