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7화
새삼 뒤를 돌아 공작성을 보니 꽤 많은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손님들이 많이 오긴 많이 왔구나.’
공작 부인이 사교 활동을 즐기 는 편이 아니라서 공작성에 손님이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귀족들로 북적이 는 성을 보니 이상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호의호식한 것들은 역 시 아무 의미 없는 껍데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취임식, 에르안, 화려한 방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들이 ‘진짜’ 귀족들의 세상이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온 사용인이나 마차, 뭐 그런 것들의 세상에 속 해 있었다.
지켈을 따라 후원에 도착한 나 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아……”
“저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지켈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작은 후원에 온갖 아름다운 꽃 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꽃 사이에 있던 에르안 이 다가와 내 품에 가득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리체, 왔어?”
아득히 풍기는 꽃 내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게 다 뭐예요?”
“기사들에게 들었어.”
에르안은 짙게 웃으며 말했다.
“취임식 꽃들이 예쁘다고 정원 산책을 나왔었다며.”
“아..그랬죠.”
화려한 꽃들 사이에는 테이블과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 블에는 내가 좋아하는 달콤한 케이크와 쿠키들이 가득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원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 들을 다 모으라고 했어.”
“왜요?”
“네가 정작 취임식에는 안 와서. 저녁 식사도 방에서 했다며.”
“제가 거길 갈 이유는 없죠. 가신들과 친지들이 오시는 자리인 데요.”
나는 진심으로 저녁 만찬에 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물론 공작 부인이 맛있는 음식이 많으니 당연히 와도 좋다고 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
하지만 내가 거기 앉아 있었다면 유일하게 귀족들 사이에 자리 잡은 평민이 되었을 것이다.
내게 쏠릴 시선을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근데 나는 계속 네 생각을 했어.”
그는 케이크를 잘라 내 입에 넣 어 주며 말했다.
“네 덕분에 세르이어스 공작이 될 수 있었다고, 정말 계속해서.”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 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예쁜 것을 봐도 네 생각, 맛있 는 것을 봐도 네 생각뿐이고.”
“잘 키운 보람이 있네요.”
나는 달콤한 케이크를 삼키고 뿌듯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에르안 님을 처음 봤을 때 정말 툭 쓰러질 정도로 약하셨거든요. 제가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온갖 약초 다 쏟아부어 가며 키웠는데.”
“맞아.”
그가 케이크 한 조각을 내게 한 번 더 먹여 주며 예쁜 눈으로 웃었다.
“그래서 그때 내게는…… 네가 정말 커다란 내 세상이었어.”
저녁 만찬 때 나온 케이크인지 상당히 맛이 좋았다.
어쩌면 내 가 우물거리며 먹는 것을 보는 에르안의 얼굴이 해사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아프다고 투정 부리면 누구나 다 비위를 맞춰 주지만, 끝없는 어둠과 고통과 외로움이 가득하 던 내 세계에 너는 유일한 빛이 었던 거야.”
뭐 그렇게까지…….
하긴, 예전에도 아픈 병을 치유 해 주면 과하게 감사 표현을 하는 환자들이 있긴 했다.
심지어 칸시아는 시간까지 돌려 주지 않았는가.
이런 보람으로 의사를 하는 거 지.
“어떻게 이렇게 똑똑하고, 예쁘고, 멋지고, 눈부신 사람이 죽어 가고 있던 내게 어느 날 갑자기 왔을까.”
“뭐.”
나는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세요. 살아 날 운명.”
“응.”
그가 피칸 파이 한 조각을 또 다시 먹여 주며 웃었다.
내가 내 손으로 먹을 수도 있는 데, 내 앞에는 포크가 아예 없었다.
“리체, 있잖아. 오늘 아침에 기사단에서 몇 명을 공작령 외곽으로 보냈어.”
“아…… 혹시 그때 무기 보관소 에서 떠들던 그 사람들이요?”
처음에는 분명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 간부터 안 들었던 것 같았다.
에르안에게 안겨 있던 그 순간 을 떠올리니 갑자기 귀에 열이 올라오는 듯했다.
얼른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나 는 황급히 차를 마셨다.
“응, 있어 봤자 분위기만 흐릴 것 같아서. 그리고 똑똑히 말했지.”
역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나 뿐인지, 에르안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여유로웠다.
“이제 진정한 기사단의 주인이 돌아왔으니, 파벌과 정치질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잘하셨네요.”
“요 며칠 호아킨 단장과 계속 대련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줬더니 공작성에 계속 있었던 기사들도 바로 고개를 숙이더라고.”
그가 피식 웃었다.
“원래 검이라는 게 그래. 결국에는 센 것에 무릎을 꿇는 것 말이야.”
기사단을 하나로 모아 장악했다 는 건 굉장히 기쁜 소식이었다.
회귀 전에는 정말 유야무야 하 다가 웨데릭의 손에 넘어간 뒤 허접한 반란군이 되었을 뿐이었 는데.
“네 덕분이야, 리체. 이번에도.”
“네, 사실상 그렇죠.”
“혹시나 내가 어린 날의 환상으로 너를 너무 우상화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에르안 이 천천히 손올 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입술에 느릿하게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내 입술에 묻어 있던 생크림을 닦아 낸 그는 살짝 그의 긴 손가락을 할았다.
별것도 아닌 행위인데, 그의 눈 빛이 농염해서 이상하게 야릇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행동이 아 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속으 로 되뇌었다.
맨 처음 그가 돌아온 날, 공작 부인이 나에 대한 화제를 꺼내자
냉담하게 반응했던 것을 잊지 않 고 있었다.
그때의 그 귀족 중심적인 어조 를 떠올리면 평민인 나를 대상으 로 남녀 간의 성적인 의도를 나 타낼 리가 없었다.
그냥 나와 떨어져 있던 5년간 생긴 이상한 버릇이라고 생각하 고 넘기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는 어릴 때와 확연히 달라진 에르안을 인정하고 그 요염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아니야, 여전히 너는 똑같더라고.”
“뭐, 뭐가요?”
“세상에서 제일 영리하고, 나를 가장 위해 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제가 옛날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거짓말 안 한다고.”
나는 이상하게 깊어진 그의 눈 동자를 피하며 괜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양녀라니, 오누이라니. 그딴 소 리 하실 거면 하루라도 빨리 공작 위를 받겠습니다. ]
그래 봤자 사는 세상이 다른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어쩌면 나는 상처를 받았던 것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 우리의 세계는 확 실히 더 갈라졌다.
그는 이제 정 말로 공작이 되었으니까.
사용인으로서 자신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저렇게 다정하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아니면 내심 내게 미안하거나.
역시 어릴 때 잘 키워두니 은혜를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맞아, 너는 틀리지 않았어.”
그가 이번에는 호박 파이를 잘 라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입에 들어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 오랜 그리음과 기다림도 안 틀렸어.”
눈이 호강할 만큼 예쁜 꽃과 쏟아질 것 같은 별들, 달콤한 것들 올 쉴 새 없이 먹여 주는 잘생긴 남자까지 눈앞에 있으니 마치 꿈 을 꾸는 것 같았다.
“네가 촉각과 시각에 약한 건 의외였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 말에 반박하려다가, 거 짓말을 못하는 올곧음 때문에 결국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얼른 커라, 리체.”
그가 웃음을 잔뜩 머금고 속삭였다.
“그때까지 내가 정말 잘해 줄 게.”
그리고는 초코 쿠키를 하나 입 에 넣어 주어서 나는 우물거리다 가 반문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먼저 열아흡이 되었잖아. 성년도 되고, 공작도 되고. 이제 너만 기다리면 돼.”
에르안의 생일은 봄, 내 생일은 여름이니 별로 멀지는 않았다.
“뭐, 제가 성년이 되면 이제 정식으로 공작가의 주치의가 될 수 있겠네요. 지금은 조수 신분이지만.”
나는 어깨를 으쪽하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새삼 공작님 되신 거 축하해요.”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턱을 괴고 활짝 웃었다.
마치 어릴 때처럼 순수하고 예쁘게 웃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리체, 취임식은 정말 화려하고 성대했거든. 사람들도 많고, 절차도 복잡하고.”
오랜만에 보는 정말 기쁘다는 듯한 얼굴에 나 역시 마주 웃어 보였다.
“근데 네게 축하를 받은 지금에 야 내가 정말 공작이 된 것 같고… 그래서 너무 기뻐.”
“저도 에르안 님이 공작 위를 무사히 이양받으셔서 정말 좋아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 마 치 어린 시절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때와 변한 것들이 많 이 있다고 해도, 서로에게 유일 하자고 약속했던 어떤 날의 유대 감이 솟아오르는 밤이었다.
나만 먹는 달콤한 디저트들과 술 한 잔 없는 작은 테이블뿐이 었지만 꽃과 별에 둘러싸인, 우 리 둘만의 취임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