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6화
내가 간 곳은 온실이었다.
“어?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온실을 지키고 있던 페렐르만 상단의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나는 생긋 웃으면서 마주 인사한 뒤 벌게진 눈으로 베르칼리아 새싹에 물을 주고 있는 아론에게 다가갔다.
“어, 리체 님.”
아론은 퀭한 눈으로 나를 을려 다보며 일어섰다.
“오랜만입니다.”
어느 정도는 날이 서 있는 어조 였다.
이딴 일 시켜 놓고 들러 보지도 않았다는 불만이 느껴졌다.
‘앞으로 제발 들르지 말라고 하게 해 주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새싹들을 살 펴보았다.
아론이 점점 더 마르고 수척해 질수록 어쨌든 꽃을 피울 만한 새싹들은 늘어나 있었다.
그 고생 싫어하는 성질에 벌써 28개나 피웠으니 정말로 내 조수가 되고 싶긴 한 둣했다.
“제가 요즘 연구를 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나는 팔짱을 끼고 다짜고짜 용건을 말했다.
“그러려면 잘 손질된 케르폰 풀뿌리가 필요해요.”
“.....네?”
“저기 오른쪽 구석에 있는 포대 보이시죠? 저게 다 케르폰 뿌리 거든요.”
케르폰 뿌리에는 가시가 많았다.
그리고 뿌리 손질에는 당연 히 가시 제거가 필수였다.
“하루에 100개씩 손질해 두도록 해요. 디엘이 매일 받아 갈 거예요.”
“리, 리체 님.”
아론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지금 하는 일도 버겁습니다. 베르칼리아가 워낙에 손이 많이 가는데, 제가 케르폰 뿌리를 다 듬다가 손이라도 베이면……”
“저도 요새 손이 좀 거칠어졌어요.”
나는 희고 매끈한 내 손을 내밀며 새침하게 말했다.
“손에 바를 보습 크림 재료로 쓸 거니까 잘 다듬어 줘요.”
나한테 미용 시약을 명령하던 그의 태도가 떠올라 나는 도도하 게 팔짱을 꼈다.
“왜요, 못하겠어요?”
“그, 그건 아닌데……”
“저는 조수 없이도 지금껏 잘 살았어요.”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못할 것 같으면 나가시든가요. 그 정도 능력 없는 조수는 필요 없으니까.”
아론은 진심으로 갈등하는 눈빛 이었으나 결국에는 분노를 감추고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나는 내가 나름 자비롭다고 생각했다.
회귀 전에, 아론은 나를 보내 주지도 않았다.
지금 나는 심지어 선택권까지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축 늘어진 어깨로 케르폰 뿌리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흡족하게 의자에 앉았다. 이 좋은 구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감시 중인 페렐르만 상단의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온실에서 그가 케르폰 뿌리 가시에 찔렸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베르칼리아 꽃에 물을 주는 광경을 신나게 직접 지켜보았다.
그가 끊임없이 내 치료소에 온 갖 병자들을 밀어 넣고 천재의사니까 어떻게든 살려 보라고 닦달했던 것을 생각하니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아론.”
나는 드레스 장식을 매만지며 놀리듯 말했다.
“천재를 부려먹는 건 쉬워도, 천재의 조수가 되기란 이렇게 어렵답니다.”
어차피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리고 어차피 나를 없애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눈에 흰히 보여서 불쌍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없앨 순 없을걸.’
나는 휘파람을 불며 미소 지었다.
‘고작 나 하나 죽이려고 들어온 게 아니니까.’
그가 고생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도 잘 흘러가서, 나는 다음 페렐르만 상단의 감시인이 올 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바깥이 아까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은 것을 보니 이제 슬슬 취임식도 끝나 가는 것 같았다.
물론 거의 다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내일 티타임까지 마친 뒤에 떠나겠지만.
그때까지는 조용하던 공작성이 손님들로 꽤 붐빌 것이다.
내일도 연구실에 박혀 있다가 심심하면 온실에 나와 아론이나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수고해요.”
나는 온실을 벗어나면서 베르칼 리아 새싹 하나를 ‘실수로’ 밟는 것을 잊지 않았다.
뒤에서 아론이 고통의 신음 소 리를 홀렸다.
***
내 하루의 끝은 거의 연구실이었다.
대체 웨데릭이 에르안에게 먹인 과자의 성분은 무엇인가.
온갖 책을 뒤져 보고 약초를 끝도 한도 없이 배합하느라 바빴다.
‘이시더 남작이 이렇게 천재인 가. 말도 안 되는데.’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혼자 열 받곤 했다.
내가 인정하는 나 정도, 혹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은 페렐르만 자작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생에 도, 현생에도 없었다.
그런데 못 찾아내니 자존심이 상해 죽을 것만 같았다.
‘딱 이것만 밝혀내면 모든 게 다 끝나는데 어째서……’
한 발짝만 더 가면 되는데 그걸 못 가고 있으니 답답했다.
그때, 누군가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이런 밤중에 연구실에 들어올 사람은 디엘뿐이라서 성의 없게 대답했는데, 놀랍게도 붉은 머리의 기사 하나가 쭈벳거리며 밖에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지켈 경 맞으시죠?”
그래도 요 근래 기사단 아침 훈 련에 나갔다고, 다는 아니어도 꽤 많은 수의 기사들을 외웠다.
굳이 외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머릿속에 박힌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지켈은 당연히 잊을 수가 없었다.
에르안의 첫 검 스승이자, 바람 둥이니 어른들의 사정이니 그런 것들을 가르친 작자였기 때문이 다.
“네, 알아보시는군요.”
지켈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제 에르안이 드디어 ‘공작’이 된 것이었다.
나도 이제 그를 ‘공작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어머, 어디 아프세요?”
“아뇨.”
지켈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아가씨를 부르 시는 겁니다.”
“왜요?”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지켈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서 여쭤보시는 게 어떨까 요?”
“어쨌든 알았어요. 어디로 가면 돼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네?”
“밤중이라고, 혼자 공작성을 돌 아다니게 할 수 없다며 저를 직접 보내신 겁니다.”
“저는 지금껏 혼자서 마음껏 돌아다녔는데요?”
“그래도 오늘은 외부인도 많고,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십니다.”
“뭐.”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는 것 같 아서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요.”
기껏해야 늘 갔던 그의 방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켈은 나를 외진 후원 쪽으로 안내했다.
후원까지는 꽤 멀어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공작님께서 취임식 때 아가씨 가 안 계셔서 꽤 서운하신 눈치 였습니다.”
“제가 거길 왜 가요.”
“덕분에 계속 저기압이셨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 한 번 웃 지를 않으셨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오는 취임식이다 보니 많이 긴장했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긴장을 좀 풀 어 주는 약이라도 지어 줬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지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십니까. 그런 것에 긴장하실 분이 전혀 아니십니 다.”
“그럼 왜 안 웃으셨겠어요. 어 릴 때부터 잘 안 웃는 분은 아니셨는데. 아, 하긴 선대 공작님이 생각나서 슬프셨을 수도 있고 요.”
지켈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그는 잠시 이마를 짚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이렇게 자라신 데에는 제 탓도 있으니 일말의 죄책감으로 말씀드리 겠습니 다.”
“뭘요?”
“아가씨는 아가씨 스스로가 굉 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시죠?”
“네.”
“그래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실 겁니다. 사람은 의학과 달라서, 상황에 따라 자꾸만 변해요.”
“의학도 시대에 따라 변해요.”
지켈은 답답하다는 둣이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 다.
“남쪽의 마물이 어린 배우자를 키울 때 어떻게 키우는지 아십니 까? 다른 이에게는 이빨을 드러 내도 상대에게는 세상 다정한 모습으로 그르렁거리죠.”
“흠.”
“그러다가 혹시라도 잘 키운 배우자가 도망이라도 가려고 하면 어마어마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지켈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 며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켈 경도 아시잖아요? 어린 공작님을 키운 건 저예요. 저는 혼자 크고 있고요. 누가 누굴 키 워요?”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 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걸로 저의 얄팍한 양심은 평생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