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5 화
“단장님 갑옷이랑 검을 망가트리고 계신 것 같은데.”
“관리 중 하나이니 신경 끄쇼.”
케인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근데 여기는 아무나 못 들어오는데.”
“제가 무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갑옷의 왼쪽을 내려치시는 건 봤어요.”
리체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대로라면 오른쪽 힘을 조절 못하시는 에르안 님께 크게 부상을 입으실걸요.”
그녀가 차분히 걸어서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저는 검은 잘 못쓰지만 수술용 칼은 꽤 쓰거든요.”
어두운 밤, 그녀의 초록색 눈이 여유 있게 빛났다.
“이건 분명 무디게 하는 건데.”
“..............”
“왜 호아킨 단장님에게 부상을 입히려고 하시는지 이유를 물어 봐도 될까요? 너무 명백한 상황이라.”
“닥쳐. 시끄럽긴.”
케인은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망치에 힘을 주었다.
그는 요리조리 변명을 해 대며 부드럽게 상황을 넘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해결책을 택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이렇게 작은 여자애 하나 죽이는 건 일 도 아니었다.
한밤중, 외진 무기고에서 목을 부러트려 버린 후 어디 아무데나 묻으면 되는 것이었다.
“배후를 말해 봐요.”
그러나 리체는 어쩐지 전혀 겁 먹지 않은 채 싱긋 웃었다.
“제가 생명 존중 사상이 있어서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고문당하기 전에 부드럽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말할 기회.”
“건방진 계집애, 검 하나 못 드 는 체구로 목숨 아까운 줄을 모 르는군.”
그가 성큼성큼 걸어 리체에게 다가왔다.
호아킨에게는 조금의 상처도 낼 자신이 없었지만, 이깟 체구가 작은 여자애 하나는 순식간에 끝 낼 수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폭 쉬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살려 드릴 지.”
그러나 그가 망치를 들어 리체 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입에 단단히 채워진 재갈 때 문에 더 이상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 물론 생사를 결정하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에르안 님이고요.”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서 무릎을 꿇리는 에르안의 검은 눈을 보며 케인은 자신도 모르게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고 말았다.
에르안의 온몸에서 진정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르안의 뒤에 있던 호아킨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애초에 친절하셨으면 제가 선처를 부탁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리체가 발랄하게 말했다.
“저는 검 하나 못 드는 체구를 가진 건 맞는데, 그걸 무기로 삼을 줄은 알거든요.”
***
에르안은 잠시라도 나 혼자 나서는 것에 대해 상당히 반대했다.
그런 수상한 놈과 단둘이 대 화를 나누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잠시라도 타이밍이 안 맞아 조금이라도 다치면 절대 안 된다며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내 계획을 강하게 밀어 붙였다.
에르안과 호아킨이 함께 급습을 하면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변명을 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가장 약해 보이는 내가 혼자 그의 의도를 밝히는 것 이 중요했다.
내가 그동안 관찰한 케인은 말 이나 생각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성격상 이러쿵저러쿵 변명 을 하느니 그냥 나를 없애려고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열심히 떠든 ‘호아킨 단장님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를 인정하는 셈이었다.
에르안은 절대 혀를 깨물지 못 하도록 재갈부터 물리라는 내 조언을 따랐다.
이제 나머지를 밝혀내는 것은 기사단의 몫이었다.
이시더 남작의 이름이 나오면 다행이고, 아니면 아론을 통해 다른 계획을 세우면 되는 것이었다.
아론은 케인이나 에스더와 달리 꽤 수뇌부라 로만과 직접 접촉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아론을 끝까지 곁에 두고 있으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은 케인을 잡아낸 것만 해도 뿌 듯했다.
“리체 양.”
호아킨은 모든 설명을 에르안에 게 듣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케인이 수상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저는 보통 연구실과 온실에만 있잖아요.”
나는 그럴듯하게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은 없었다.
“기사가 올 곳이 아닌데,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수상하다고 생각 했어요. 호아킨 단장님도 아시겠지만, 지금 공작성에 불순한 세 력들이 있다는 걸 끊임없이 의심 중이었던 지라.”
“그렇죠.”
벌써 그가 심문한 사람만 해도 셋이었다.
“다 리체 양이 잡아냈으니, 오 래도록 공작가를 지키는 의무를 지닌 저희가 면목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죠.”
나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제가 남들보다 영리한 걸요. 기사단이 잘못한 건 아니에요.”
“대체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 해야 할지……”
“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잘 표현해 보세요.”
그는 잠시 너털웃음을 짓더니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검을 집어 내 앞에 꽂았다.
“왜, 왜 이러세요?”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검을 두 손으로 잡은 채 갈색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기사 호아킨 리암 키싱턴, 오늘 리체 에스텔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에르안을 바라보았지만, 에르안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노장이라 무릎도 안 좋을 텐데, 그의 자세는 꼿꼿했다.
“맹세하건대 오늘 일을 잊지 않고 사는 동안 보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기사의 맹세 인가 싶었다.
굳이 내가 호아킨의 보은을 받 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고개 를 끄덕였다.
“어, 네……. 잘 부탁드려요.”
나는 호아킨에게 ‘기사의 맹세’ 를 받은 사람은 선대 세르이어스 공작뿐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 았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공작 부인과 에르안을 위해 늙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 던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 줄 알 았더라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 리며 바로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밤새 있었 던 일 때문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공작성은 상당히 분주했다.
창밖 을 보니 벌써부터 화려한 마차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에르안이 결국 공작 위를 받긴 받는구나……’
물론 이시더 남작이 포기하지 않는만큼 나 역시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 뭔가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취임식 에 참가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가신들과 친지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평민인 내가 낄 곳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하녀들처럼 가서 일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게는 그냥 공작성이 많은 손님을 받는 평범한 날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도 얼마나 화려하게 잘 꾸며 놨나 보고 싶어 정원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순찰을 하고 있던 기사 한 무리와 마주쳤다.
“리체 님!”
“안녕하세요!”
자유 도시에 나갔을 때 나를 호 위해 주던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다소 사무적이었던 그때 와는 다르게 나를 보는 표정이 너무나 밝아서 당황스러웠다.
“아…… 네.”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어디 가십니까?”
“취임식이라 장식해 놓은 정원의 꽃이 오늘따라 예뻐서 구경할 겸 산책 나왔어요.”
적당히 인사하고 지나치려는데, 그들이 내 앞에 서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네?”
“오늘 아침에 호아킨 단장님께서 다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뭘요?”
“리체 님 덕분에 기사단 속에 숨어 있던 첩자를 밝혀냈고, 지 금 공작성에 숨어든 목적을 심문 중이라고요. 리체 님이 아니었다 면 호아킨 단장님이 큰일 날 뻔 하셨다고……”
“그래서 기사의 맹세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으므 로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 스럽긴 했지만.
“제가 잘 잡아냈죠.”
내 대답에 기사들은 탄성을 지르며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 더니 환히 웃으며 말했다.
“호아킨 단장님이 맹세하신 분이라면 저희의 충성도 받으실 만 합니다.”
“자유 도시에서 리체 님을 호위 한 것을 모두가 부러워하고 있습 니다.”
“그 사기꾼 집시를 잡을 때 이미 알아보긴 했지만, 역시 대단 하십니다.”
“어…… 네, 고마워요. 그럼 이 만.”
나는 지나친 찬양이 민망해서 후다닥 빠져 나왔지만, 결국 정원 산책을 마저 하지 못하고 돌 아오고 말았다.
지나치는 기사들 마다 내게 한 마디씩 했기 때문이었다.
나름의 파벌은 있을 수 있더라도, 모두가 호아킨 단장을 상당히 존경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모두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감사를 표시하 는 터에 나는 오늘 그냥 돌아다 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구실로 향하는데, 저 멀리 웨 데릭과 이시더 남작이 보였다.
유일한 친지로 취임식에 참석한 그들은 누가 봐도 부드러운 미소 를 짓고 있었다.
마치 혈연이 무사히 공작 위를 받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는 얼굴로.
‘뱀 같은 작자들.’
나는 케인이 내게 달려들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케인이 잡힌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온화한 얼굴을 보니 이번에도 케인이 이시더 남작의 이름을 불기에는 글렀다 싶었다.
그들을 보니 산뜻했던 기분이 다시 더러워져서 나는 화풀이할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