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4화
“괜찮아?”
그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 고, 나는 정말로 하나도 다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에르안보다는 조금 늦 었지만 인기척을 느꼈다.
이 밤중에 누가 무기고를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직 케인이 움직일 때는 아니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바닥에 겹 쳐 누워 서로 긴장한 시선을 주 고받았다.
“아무도 안 오는 것 맞지?”
한 무리의 기사들이었다.
“케인이 오늘 밤은 괜찮다고 했 습니다. 내일 밤은 안 된다고 했고요.”
“내일은 왜 안 된대?”
“모르죠. 몰래 만나는 하녀라도 있나.”
“취임식 전날이니까 저희도 몸을 사리는 게 좋긴 할 거예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 은 에르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혹시라도 우리가 몸을 숨긴 방 패들 사이에서 소리가 날까 봐, 나는 안겨 있다시피 한 그의 몸 에 밀착하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내 허리를 감은 손을 풀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두 얼굴이 너무 가까워 숨소리 까지 귓가에 모조리 들릴 지경이었다.
내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코 가 마주치는 바람에 더 몸이 굳었다.
“그러니까 지켈 쪽을 견제하는 게 맞는다니까요.”
“그놈들이 에르안 님과 계속 같이 있었다고 은근히 뻣뻣합니 다.”
“우리는 그동안 세르이어스 성 을 지켰습니다. 쉽게 어울려 주면 안 돼요.”
“베르킨 경은 모두가 하나라는 데…… 그러다간 우리 입지가 위험해져요.”
에르안의 눈에 차분한 분노가 일렁거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텃세’를 부리는 일당들이었다.
멋대로 회담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준 케인도 한 패거리임에 틀림없었다.
에르안이 내 귓가에 대고 한심 하다는 어조로 속삭였다.
“몸이 아주 편한가 봐. 기사단 안에서도 쓸데없는 정치질을 하는군.”
그의 입술이 귓불에 닿아서 간지러 웠다.
“참으셔야 해요.”
나 역시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들키면 잠복이 망해요.”
“……알아.”
그들이 나갈 때까지 이대로 있 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릴 때도 이렇게 온몸이 맞닿 은 채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의 몸집이 하도 커서, 나는 거의 폭 안겨 있는 모양새였다.
“리체, 안 불편해?”
“괜찮아요.”
에르안은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 밑의 애교살을 끌어올린 그의 눈매가 교태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기사들이 쓸데없는 말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내 시선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 과 목울대, 드러난 쇄골을 가만 히 훌었다.
“보기 좋아?”
“……네.”
나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내 허리에 있던 손을 더 끌어당겼다.
“아침마다 벗고 칼질한 보람이 있네.”
나는 그 말에 대련 때마다 그가 상의를 탈의했던 이유를 알아챘다.
“일부러 대련할 때 벗었어요?!”
“네가 다른 놈들 볼까 봐.”
조심스럽게 그는 나를 고쳐 안았다.
다리가 얽히면서 그의 체 향이 나를 가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흐릿한 눈빛으로 보면 더 꽉 끌어안고 싶어져.”
“……저도 제가 이렇게 시각과 촉각에 약한지 처음 알았어요.”
나는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어린 시절하고 많이 다르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이렇게 과한 신체적 접촉은 삼가는 것이……”
“왜, 나보다 더 잘생기고 몸 좋 은 놈이 필요해?”
“좋으면 좋을수록 좋지만, 어쨌 든 그게 논점은 아니고요.”
“리체.”
그가 긴 손가락을 들어 내 눈가를 쓸었다.
그의 새까만 눈이 어딘지 모르 게 많은 감정을 참고 있는 듯했 다.
저 멀리서 기사들이 토로하는 목소리가 응응거리며 뭉개졌다.
서로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져 민망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 으면서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 다.
“내가 열아홉이 되었으면 좋겠 다고 생각한 날들이 있었는데……”
그의 느릿한 손길이 목덜미를 쓸자 체온이 순식간에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젠 네가 얼른 열아홉이 되었으면 좋겠어.”
짙은 호흡이 깊어서 귓가에 울 리는 속삭임도 선명했다.
“안겨 있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 지만, 그래도 이것 좀 놔 주셔도 될 것 같은데.”
“놓으라고?”
에르안이 여유 있게, 그러나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려운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라도 방패들이 무너질까 꼼 짝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가 속삭였다.
“네 말이 맞아, 리체.”
“뭐가요?”
“역시 어린 시절하고 좀 다른 것 같아.”
속삭임은 예전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데, 난생처음 겪어 보는 극한의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휘 감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간절 해.”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어서 차 라리 대화를 멈추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의 떨리는 숨결을 느끼는 시 간이 미친 듯이 길기도 하고, 또 짧기도 했다.
붉은 입술이 내 살에 닿을락 말 락하여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었다.
그 와중에 한바탕 떠들던 기사 들이 나가고, 이상한 한밤중의 잠복은 그렇게 끝났다.
디엘과는 여섯 시간 동안 꼬박 밤을 새며 붙어 있어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에르안과는 너무 급격히 일어나 당황스러웠다.
나는 무기고를 나오며 이성을 되찾고 말했다.
“내일일 것 같죠?”
그냥 잠복이었고 피치 못할 사고로 좀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
옛날에는 한 침대에서 잠이 든 적도 있었으니 이 정도쯤이야 해 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취임식 전날이기도 하고.”
내일은 취임식 전날이었다.
공작성은 손님 맞을 준비를 비 롯한 여러 가지 행사를 위해 바쁠 예정이었다.
어차피 내 일은 없었기 때문에 나야 상관이 없었다.
케인은 그날 움직일 것이다.
분명 아까 기사들이 ‘내일은 케인이 안 된다고 했다’라는 말을 했고, 내가 케인이라고 해도 취임식 아침 당일의 대련을 노릴 것이다.
에르안에 의해 호아킨이 크게 다친다고 해도 공작성 전체가 바 빠 응급 처치가 어렵고, 손님들 이 많아 자세한 조사가 힘든 날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취임식 날 일어난 불미 스러운 일이니 호아킨 스스로가 사건을 덮을 가능성도 높았다.
큰 부상을 입으면 이미 많이 늙 은 호아킨은 당연히 은퇴를 선언하게 될 테고, 분위기가 좋지 않은 기사단은 쉽게 약해져 와해될 것이다.
에르안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
공작성은 취임식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로 분주했다.
늦은 밤, 케인은 몰래 무기고로 향했다.
그는 로만 영지의 대장장이 출신이었다.
요 며칠간 관찰한 결과, 에르안은 정말로 오른쪽 힘을 잘 조절 하지 못했다.
게다가 호아킨은 혹시라도 에르안이 다칠까 봐 전력을 다해 대 응하지 않았다.
‘운이 좋아.’
가뜩이나 에르안의 실력은 뛰어 난데, 강약을 조절하지 못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에르안에게 크게 부상을 입는다면 조사도 제대로 안 들어 갈 것이 뻔했다.
은근슬쩍 기사단에 내분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부추겨 모 임도 만들어 주었다.
몇 년간 엎드려 살다가, 드디어 웨데릭에게서 받은 지령을 충실 하게 이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론 크릴소만 없었더라도....’
일은 잘되어 가고 있는데, 요즈음 짜중 나는 대상은 바로 아론 이었다.
꼴에 몰락 귀족 출신이라고 자꾸만 자신을 아래로 보는 것이 짜증 났다.
리체가 시킨 일을 기회만 닿으면 자신에게 시켜대는 통에 고까워서 죽올 것 같았다.
고기 파이 밑에 숨겨진 비밀 쪽지에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기에 급한 줄 알고 갔더니 결국 꽃을 돌보는 일이나 시키려고 부른 것이었다.
‘내가 이번 일을 잘 해내서 그 인간보다 더 인정받고 만다.’
그리고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에게는 그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
지금껏 첩자로 들어와 있던 하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이다.
조용히 목숨을 끊은 두 하녀의 가족들은 지금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만일 한 마디라도 불었으면 모 두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어린 여자애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해서 온실에 갇혀 있는 주 제에……’
요 며칠간 연무장에 나타난 작은 갈색 머리 여자애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에르안이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제대로 쳐다본 적은 없었지만 그 특유의 도도한 분위기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부터 웨데릭이 거슬려 한 소녀였으며, 자주 바뀌던 조수 자리에서 끝끝내 나가지 않는 바 람에 이시더 남작과의 연락도 서로 어려워졌다.
에르안이 오기 전에 처치하기 위해 수를 썼다고 했으나 들켜서 에스더만 죽었다.
‘왜 이렇게 일을 다 어렵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이시더 남작은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었다.
‘힘도 하나도 없어 보이던데 그 냥 쫓아가서 죽이면 될 걸.’
그의 입장에서는 그냥 가는 목 을 꺾어 버리고 도망가면 그만일 것 같은데, 높으신 분의 시야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호아킨의 방어구 왼쪽을 손상시키고 검의 내구도를 손보고 있을 때였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케 인은 잠시 도구를 떨어트릴 뻔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리체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