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 3화
에르안 역시 배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호아킨 단장은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케인 같은 애송이에게 급습을 당할 위인은 아냐. 그건 본인이 더 잘 알 테니, 암살 같은 건 아예 시도하지 못할걸.”
시원시원한 대답이 흡족스러웠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둘 중 하 나지.”
에르안은 내 눈을 바라보며 명쾌하게 말했다.
“첫째, 무기에 독을 바르는 것. 다만 바로 용의자로 지목될 테니까 바로 튀어야 해.”
“홈.”
“둘째, 무기에 살짝 문제를 일으킨 뒤, 누군가의 실수를 기다리는 것. 호아킨 단장은 아침 훈련 때 꼭 대련을 직접 하거든.”
에르안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진검을 사용하니 평소와 다르게 호아킨 단장이 큰 실수를 하면 순간적으로 상대가 큰 부상을 입힐 수 있지.”
“아마도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것 같은데요.”
나는 침착하게 결론을 내렸다.
5년 동안 세르이어스 공작성은 새로운 사람을 받지 않았다.
페렐르만 자작의 조수가 계속 바뀌니 사람 심는 것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고 있지 않다가 나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아론을 급히 투입할 정도로, 아마 그들이 꽂아 놓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들키지 않고 오래 있을 전략을 짤 것이 분명했다.
“설명 감사합니다, 에르안 님.”
역시 에르안을 찾아온 것은 좋 은 선택이었다.
“조언해 주신 덕분에 대충 할 일이 보이네요.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나중에 뭘 부탁드릴지도 몰라요. 그럼 저는 이만……”
내가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에르안이 내 말을 끊고 눈을 접어 예쁘게 웃었다.
“리체, 뭘 어떻게 하려고?”
“어…… 일단은 잠복 수사요.”
“혼자? 위험해. 아무리 그저 그 런 실력이라고 해도 기사단의 일원이야.”
“아뇨, 디엘도 있고……”
“나랑 하자.”
내가 디엘의 이름을 꺼내자 갑자기 에르안이 내게 허리를 굽히 며 빠르게 속삭였다.
“네? 안 바쁘세요?”
“디엘 몰레킨이 기사단 구조에 대해서 뭘 알겠어.”
“음..........”
“할 거면 나랑 해야지. 안 그 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는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하니 까.
그리고 에르안을 낀다면 계획을 세우는 것이 굉장히 쉬워졌다.
“그러면.. 이런 작전은 어떨까요?”
“말만 해.”
그의 긴 속눈썹 밑에 자리 잡은 검은 눈동자에 흐뭇함이 보였다.
이상하게 왠지 뭔가 걸려든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생각해 낸 계획을 이야기하 기 시작했다.
***
에르안은 5년 만에 리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옛날에는 올려다봐야 했지만, 지금은 그녀가 그의 어깨보다도 키가 작아서 한참을 내려다봐야 했다.
이렇게 작고 귀여웠나 싶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다니, 그에게 그런 대상은 리체가 유일했다.
예전에 리체가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사이’라는 말은 역시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총명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옛날 처럼 그 당당한 매력에 홀리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처럼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붙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예전에 그녀가 해 준 것처럼, 그도 똑같이 해 주고 싶었다.
식사를 하면서 골고루 잘 챙겨 먹나 계속 봐 주고, 심심하면 함께 놀아 주고, 잠이 안 온다며 칭얼대면 언제까지고 손을 잡아 준 채 토닥여 주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 본 그 순간부터 확신을 얻었는데, 정작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열기 가 없었다.
게다가 5년 만에 다 큰 모습으 로 만나니 다소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데.’
또 하나의 문제는 지금이 정말 애매한 시기라는 점이었다.
제국은 상호 미성년 시절의 약혼이 아닌 이상, 성년과 미성년의 교제를 법적으로 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봄과 여름의 사이, 정확히 에르안의 생일과 리체의 생일 중간이었다.
성년인 에르안은 마음 놓고 리체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는 시기였다.
에르안 혼자만의 일이라면 법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리체가 얽혀 있는 한 흠이 될 만 한 그 어떤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공작 부인은 ‘오누이 같은 사이’라는 끔찍한 소리를 해가며 양녀로 삼아 좋은 집안의 영식 과 결혼시키겠다는 말까지 했다.
물론 세트이어스의 후계자인 자 신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그래도 공작 부인이 독단적으로 일을 칠까 두려워 에르안은 빠르게 취임식올 올려 공작 위를 받기로 했다.
게다가 리체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던 무리의 정체도 밝히지 못했다.
시체를 성에 걸어 두는 것 외 에, 그 끝의 끝까지 캐내어 다 없애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취임식을 서두르고 있는 데에는 그 외에도 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에르안은 돌아오자마자 기사단의 문제를 빠르게 파악했다.
제국은 평온했고 긴장감이 풀어진 기사단은 세력 다툼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호아킨이 절대적인 리더 십으로 이끌고 있는 데다가 딱히 위기 상황이 없어서 문제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공작성에 남아 있던 기사단은 5 년 만에 돌아온 에르안을 주군으 로 받아들이긴 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지 못한 시간이 긴 만큼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매일 아침 훈련을 함께하는 것 만으로는 이르비아에서 함께 지낸 기사단들처럼 될 수 없었다.
에르안은 취임식을 얼른 마치고 기사단을 진정으로 장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큰 경고를 준다거나 기선을 제압하는 사건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 리체가 기사단의 위기를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가히 운명적이군.’
안 그래도 리체가 옛날처럼 아프지 않으니 자신에게 관심을 덜 두는 것 같아 상심하던 와중, 다 시 유대감을 쌓고 서로 돈독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물론 리체가 그의 단단한 몸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사단과 함께하는 아침 수련도 절대 빼놓 을 수 없는 기회였다.
‘……리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최대한 마음을 얻어야 해.’
조금이라도 그녀의 호감을 끌 수 있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
평소와 비슷했던 어느 날 아침, 기사단은 아침 훈련을 하다가 에 르안과 함께 온 리체를 보고 모 두 당황하고 말았다.
갈색 머리의 저 소녀가 공작 부 인의 총애를 받는 주치의의 조수 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지라 기사단과의 친분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5년 전의 소공자님을 생각하고 돌아오실 때에 건강 보조제를 선물로 드렸었는데……”
리체는 살짝 민망하다는 둣이 덩치가 큰 에르안을 흘끗 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거짓말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 역시 평소보다 훨씬 딱딱 했지만 에르안 외에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에르안은 어설픈 거짓말이 한 눈에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자꾸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 다.
“보시다시피 지나치게 건장해지셔서 돌아온지라, 살짝 부작용이 생겼어요.”
아무리 리체의 말투가 어색했어 도 그 설명에는 모두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의 근육이 단기간에 과 하게 발달하셨는데 그래서 힘 조절을 잘 못하셔요. 제가 좀 지켜 봐야 할 것 같아서 당분간 따라 올게요.”
기사단은 그 말에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리체가 앉아 있을 편안한 의자를 직접 준비해 주는 에르안의 모습에 모두 입올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웅, 리체. 다리 아프니까 여기 앉아 있어.”
“네.”
에르안과 이르비아에서 함께 있었던 기사단은 크게 놀랐다.
5년을 넘도록 매일 같이 지냈는 데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심심할 텐데, 간식이라도 가져 다줄까?”
“아뇨, 필요 없어요.”
“발 시리면 털 실내화를……”
“봄이에요, 에르안 님.”
그리고 그 다정함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리체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에르안은 리체의 무릎에 담요까 지 덮어 준 다음, 뒤를 돌아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이런 사정으로, 호아킨 단장의 아침 대련은 당분간 나만 하도록 한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괴리감이 상당했다.
“내가 힘 조절을 못하는데 받아쳐 줄 사람은 호아킨 단장뿐이 니. 그리고……”
그가 검을 빼어 들며 섬뜩하게 말했다.
“리체 쳐다보지 마. 아무리 귀 엽고 예뻐도.”
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괜히 말 걸지도 말고. 특히나 어디 다치면 절대로 기웃거리지 말고 의무실로 가.”
에르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표 정을 짓고 있는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리체는 몰랐다.
***
나는 아침마다 에르안과 호아킨 의 대련을 보러 기사단에 출근했다.
에르안은 내가 지시한 대로 오 른쪽으로만 과하게 힘을 몰아붙였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호아킨은 그 불균형한 공격에 대체로 능숙하게 잘 대처했지만 가끔 버거워 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자유자재로 검을 다루는 에르안 을 보면서 나는 이상한 감상에 휩싸여야 했다.
‘옛날엔 한 바퀴 뛰는 것도 힘 들어 했는데.’
어린 시절과 너무 다른 모습에 위화감이 들었지만 눈은 즐거웠다.
여전히 이르비아의 습관 때문에 더우면 거의 상체를 탈의한 채로 검을 휘두르며 호아킨을 상대하 는 모습은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몰래 케인을 관찰 했다.
사실 에르안보다는 케인의 특징 을 보기 위해 매일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그는 다른 기사들과 대련 을 하는 척하면서도 계속해서 에 르안과 호아킨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대련이 끝나면 직접 호아킨의 무기를 받아다가 무기고에 보관하곤 했다.
무기고 열쇠는 단장인 호아킨과 관리자인 케인 그리고 공작성의 주인인 에로안만 가지고 있다고 했다.
현장을 덮치려면 잠복이 필요하 다는 내 말에 에르안은 밤중에 몰래 나를 데리고 무기고로 안내 했다.
“와, 신기하네요.”
나는 드넓은 무기고를 보며 속 삭이듯 감탄했다.
그 와중에 호아킨의 무기들은 가장 안쪽, 단독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공작성의 전력은 나쁘지 않아.”
에르안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다소 체계가 없어서 문제 지.”
“에르안 님의 무기는 어디에 있어요?”
“나는 직접 손질해.”
“왜요?”
“호아킨 단장처럼 늙지 않았으니까.”
잠복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으며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어디든 가까운 데 있는 게 마음이 놓여서.”
내가 대답하려는데 순간적으로 에르안이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내 몸을 그대로 끌어안아 함께 쓰러지며 방패들 사이로 순식간에 몸을 숨겼다.
그 와중에 자신의 둥으로 바닥 에 떨어져, 나는 위에서 그를 덮 친 꼴로 안겨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