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2화
에르안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 다고 하니, 디엘은 치사하게 자신은 빠진다고 즉시 선언했다.
“난 에르안 님 무서워.”
“꼬맹이 때부터 봐왔던 분이야. 물론 지나치게 커 버리긴 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디엘이 매정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난 에르안 님이 열세 살이셨던 시절부터 이 미래를 예측했어.”
“..............”
“성장하시면 나의 안위를 위협 하실 정도로 무시무시해지실 거 라고.”
“하, 디엘…… 이 겁 많고 하찮은 영혼아.”
“하여튼 난 빠질게. 잘해 봐, 리체.”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에르안을 만나러 혼자 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자, 딱딱하면서도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
기분이 나쁠 때 찾아왔나 싶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안으로 들 어가 보니, 에르안은 누가 들어 온 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저기, 에르안 님.”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다가 보고 있던 서류를 떨어트릴 뻔했다.
“바쁘세요?”
무뚝뚝했던 그의 얼굴이 바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니, 전혀.”
그가 곱게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네가 이 시간에 올 줄은 몰랐지 뭐야. 내가 부족했어. 앞으로는 늘 대비하는 마음을 가질게. 무슨 일이야?”
“음…… 부탁이 있어서요.”
“응, 말해.”
아까 들어오라고 대충 말하던 어조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순식간에 기분이 바뀌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내가 그의 건강 상태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손을 부드럽계 이끌었다.
“뭐든지.”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옛날에 부드럽고 작았던 아이의 손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다 들어줄게.”
워낙에 성의 분위기가 흉흉하여, 혹시 몰라 긴장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에르안은 싱긋 웃으며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흔쾌히 대답했다.
‘이런 걸 보면 어린 시절의 상냥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 은데……’
물론 그때의 귀여음은 찾아보려 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의자에 기대어 서류를 읽고 있던 권태로운 표정에 미소가 걸리자 이상하게 본능적으로 흠칫하 는 기분이 들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치명적인 거지?’
특유의 그 분위기 때문에 공작 성에 ‘에르안 무감정설’이 돌고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올 하 며, 나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요. 아, 그 전에.”
예전에는 참 손을 자주 잡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손을 맞잡고 있자면 그때와 다른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아이가 아니니까 이렇게 여자의 손을 쉽게 잡고 그러시면 안 돼요.”
“여자의 손이라니.”
에르안이 나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손 아니면 안 잡았는데. 다른 여자 손 잡아 본 적 없어.”
“어…… 네?”
“어린 시절부터.”
“아, 그러면 이제 제 손도 쉽게 잡으시면 안 돼요.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왜?”
“공작령을 다스리실 분이 체통 머리 없게 주치의의 조수 손이나 붙잡고 졸졸 따라다니실 거예요? 어린 시절에야 병약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조수…… 손이나 붙잡고?”
에르안의 황당하다는 시선이 그의 큰 손에 감싸듯 잡혀 있는 내 손에 닿았다.
“이젠 당당하게 혼자 걸으셔야죠. 언제까지나 제가 끌고 다닐 수는 없는 거예요.”
“뭐,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에르안은 아주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그 동작이 얼마나 느린지, 마주 한 살결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난 그런 게 체통이라고 생각하 지 않으니 네가 잡고 싶을 땐 언제든지 잡아.”
“네, 진료하려면 당연히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진료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그럴 때가 있겠어요? 다 큰 남의 손을 왜 이유도 없이 잡아 요?”
“글쎄.”
그가 턱을 괴고 나를 가만히 바 라보며 웃었다.
“난 언제든 잡고 싶은데. 어릴 때도, 지금도.”
절대 친오누이 같은 사이는 아 니라고 못 박았던 그의 냉담한 말이 떠올라 나는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공작령 관리 일을 열심히 배우 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고생 많 으세요.”
“아, 응. 얼른 공작 위를 받고 싶어서 좀 무리하고 있어.”
에르안은 서류를 옆으로 밀어내 며 말했다.
“어쨌든 살기 좋은 영지를 만들어야지.”
나는 감동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성이 나쁘다느니, 이상해져서 돌아왔다느니 하는 말들은 역시 그냥 좀 무시무시해진 인상 때문 인 듯했다.
“그래야 리체가 세르이어스에서 천년만년 행복하지. 다른 데 안 가고.”
“네, 저는 생명 존중 사상이 넘 치는 평화주의자라 그건 아주 중 요한 요소예요.”
부디 회귀 전 같은 일이 벌어지 지를 않길 바라며 나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부탁이 뭔데?”
“그러니까……”
아무리 친절해 보여도, 어쨌든 나는 그에게 있어서 한낱 평민이었다.
도저히 중거도 없이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의 이름을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교묘히 숨겨 대답했 다.
“케인 아스힐즈라고 아세요? 기 사단 사람이라는데.”
“아, 대충 얼굴과 이름만.”
기사단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래도 에르안은 그 인원을 다 파악하고 있는지 즉시 대답했다.
“남부로 함께 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던 사람이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냐. 평민 출신이라 딱히 계급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는 문득 말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혹시 마음에 들어?”
“네?”
“키가 좀 작은 남자가 취향이야? 그렇다고 내 다리를 자르면 네가 고생할 텐데…”
“아뇨! 아니에요! 개인적으로는 키가 큰 게 취향이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서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다행이야. 그럼 혹시 회색 같은 애매한 색깔의 머리를 좋아하나?”
“아뇨, 저는 그런 지극히 개인 적인 취향보다는 이목구비의 심미적 가치를 추구합니다.”
“염색은 안 해도 되겠군.”
“하여간, 그런 쪽은 아니고 요……. 왜 대화가 그쪽으로 가요?”
“혹시 지금도 옛날처럼 바람둥이일까 봐 경계를 좀 한 것뿐이 야.”
나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더 이상 대꾸할 의지를 잃어버 린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소 어딘가 이상해진 건 사실이므로 말려들면 안 되었다.
“어쨌든, 그 케인 아스힐즈라는 남자가 수상해요.”
“그래? 그럼 죽여 버리면 돼?”
“네?”
‘아니, 지금 평민 출신이라고 이렇게 쉽게 막말해도 되는 건가?’
하긴, 귀족들이 평민을 하찮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론 같은 몰락 귀족 출신도 기회가 되니 케인을 홀라당 불러 부려먹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내 동그랗게 뜬 눈을 바라보며 에르안이 아차 싶었다는 둣이 급 히 말을 바꿨다.
“아…… 맞아. 생명 존중 사상……. 그럼 쫓아내 버릴까?”
“왜냐고, 무슨 일이냐고는 안 물어보세요?”
“네 말이잖아.”
그가 너무 예쁘게 웃어서 나는 살짝 소름이 끼쳤다.
내가 그냥 ‘죽여 주세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망설이지 않고 딱 저 표정으로 사람을 벨 것만 같 았다.
“너는 언제나 옳다고, 네가 말 해 놓고서.”
내가 마른침을 삼키자, 그는 고 개를 살짝 모로 꼬며 말했다.
“하지만 이유를 들어 볼게. 왜 수상한 것 같아?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거든.”
“큰일이라뇨? 왜요?”
“케인은 호아킨 단장의 무기 손질 담당이거든. 얼마 전에 바뀌었어.”
“원래 무기 손질 담당자는요?”
추궁하듯 묻자 에르안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고향에 일이 생겼다던데.”
역시 내 추론이 맞았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랫입술 을 깨물었다.
내게서 제니를 떠나가게 해서 에스더를 심을 때도 비슷한 레퍼토리 였다.
적절한 시기에 원래 있던 측근의 신상에 문제를 만들어 자신의 사람을 심는 것.
“에르안 님, 아무리 수상해도 중거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증거를 잡더라도 배 후를 알지 못하면 말짱 헛것이고요.”
“다짜고짜 잡아들이지 말라는 얘기지, 결국?”
에르안은 내가 무슨 뜻으로 말 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네, 한스도 에스더도 잡아냈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었잖아요.”
“그건 그렇지.”
“만일…… 케인이라는 사람이 호아킨 단장님을 해하려고 한다면……”
에르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죄송하 지만 제가 기사단이나 검술, 뭐 이런 것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별것도 아닌 케인이 대체 왜 호아킨 단장을 해치려고 하지?”
“세르이어스에 도움이 되는 사 람이니까요……. 어디의 끄나풀 아니겠어요?”
에르안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세르이어스를 노리는 사 람들이 있다는 건 그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공작 부인이 배후를 지목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적이 있다는 것도.
“물론……”
에르안은 섬뜩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예상이 가는 쪽이 있긴 한데, 네 말대로 중거가 없으니 이참에 내가 나서야겠군. 확실히 배후를 캐야겠어.”
나 역시 바라는 바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예상하고 있다는 상대가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내가 그의 혈연을 의심하는 발언을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