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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51화 (5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1 화

[......안 됩니다, 케인즈 경.]

흐릿한 시야로 꼬장꼬장하면서 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집안에 가기엔 리체가 너무 똑똑합니다. 가족 식사 때 대화가 안 통할걸요. 적어도 저 정도 로는 영리해야 리체와 소통이 되죠]

이렇게 뚱하면서도 까칠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아, 거기도 안 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이었다.

[그림이 안 그려지잖아요. 리체가 지나치게 귀엽습니다. 초상화라도 남기신다면 그 이질감을 어쩌시려고. 과욕이십니다, 호아킨 단장님. 적어도 페렐르만 만큼은 생긴 집안이어야 합니다. ]

기분이 잔뜩 상한 사람들이 항의하려고 할 때, 그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가 얘 대부입니다.]

그렇구나, 역시 페렐르만 자작이었다.

[제 심기를 거스르시면 어차피……. ]

지금 내 대부라는 자리를 이용 해서 사람들을 협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대단한 권력이라도 되는 양 그가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안?’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눈썹이 잔뜩 치켜을라간 와중에도 눈매에 이상한 광채가 맴돌았다.

''페렐르만 자작.”

낮은 목소리가 섬뜩했다.

[적당히 하시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니면 내가 반역을 일으키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건지. ]

뭐라고? 반역?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세르이어스 영지에 반란군 못 들어오게 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네가 반역?

아무리 눈이 돌아갔다고 해도 그 단어만큼은 참아 낼 수 없었다.

내가 그의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리체! 리체! 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밤, 절대 잠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잠시 졸아 버렸다.

“아냐, 들어와.”

황급히 정신을 추스르며 나는 문을 열었다.

디엘이 신난다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이 됐어. 가자.”

“그래.”

벌써 한밤중이었다.

나는 디엘과 함께 조용히 온실로 향했다.

분명히 아주 황당한 꿈을 꿨는데, 벌써 거의 모든 내용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기억하자. 분명히 미래에 벌어질 일일 거야.’

하지만 에르안이 반역 운운하며 페렐르만 자작과 대립한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부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반역…… 에르안…… 이런 젠장.’

내가 필사적으로 꿈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정원 구석 에 있는 온실에 도착했다.

나와 디엘은 온실 옆에 있는 수풀 속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실에서 페렐르만 상단 직원 하나가 빠져나 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온실에 아론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기다렸다.

***

아론은 인내심 있게 20분 정도를 기다렸다.

항상 페렐르만 상단 사람들은 교대로 여섯 시간씩 자신을 감시하다 떠나곤 했다.

그중 가장 최악은 디엘 몰레킨으로, 그와 대화하고 있자면 약이 올라 팔짝팔짝 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조건 공작성에 침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빌어먹을……’

첫날과 새싹이 났을 때, 딱 두 번 본 리체의 얼굴을 떠을리면 이가 저절로 갈렸다.

‘웨데릭 님이 이 공작성을 차지 하시면…… 그 반반한 얼굴에 칼부터 그어 주지.’

그는 몰락했지만 그래도 귀족 출신이었다.

대의를 위해 참고 있지만 이런 허드렛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 분노는 모두 리체에게 향했다.

평민 주제에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눈빛과 이런 고된 작업을 시키는 거만한 태도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냐, 굳이 기다리지 않고 그냥 기회가 되면 바로 죽여 버리는 게 낫겠어.’

웨데릭과 로만도 리체의 존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 다.

어쨌든 그녀 때문에 에르안이 손쓸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건 사실이었다.

당연히 웨데릭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지금 아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며칠째 못 잤고, 눈을 붙인다고 해도 잠자리가 영 불편했다.

다행히 오늘은 눈이라도 좀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 전, 디엘이 처음으로 예쁜 짓을 좀 했기 때문이었다.

“아론, 미안한데 앞으로는 제가 좀 땡땡이를 치려고 하거든 요‘? 다음 감시자가 혹시나 물어 보면 내가 꼭 있다가 갔다고 말해 줘요. ”

“제가 왜요?”

“아, 사례는 할게요. 애인이 생겼는데 시간을 도저히 뻘 수가 없어요…. 원하는 거라면 뭐는 들어줄 테니 꼭 좀 부탁해요. 혹 시라도 리체한테 들키면 나를 가 만두지 않을 테니까. ”

“그럼, 고기 파이를 먹고 싶으 니 그것 좀 부탁해요.”

“여기서는 고기 파이를 아무도 안 먹는데……. 식성이 촌스러우시군요. 어쨌든 알았어요.”

고기 파이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 다른 첩자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아론은 하녀가 가져온 고기 파 이를 반쯤 남기고, 몰래 숨겨 온 마법 아이템과 쪽지를 고기 속에 넣어 다시 하녀 편에 들려 보냈다.

잘 전달되었다면 분명히 디엘이 없는 이 시간에 그가 찾아올 것이다.

아론은 신중하게 몇 번 참았지만, 정말로 디엘은 자신의 담당 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 뻔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20분을 기 다렸지만 디엘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좋아. 그 뺀질거리는 놈은 오늘도 정말 안 올 셈이군.’

페렐르만 상단의 사람들과 밥을 가져다주는 뚱한 하녀 외에는 아 무도 온실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 았다.

이 한밤중에 고작 주치의의 조 수가 쓰는 작은 온실에 누군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론은 잠을 못 자서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새 소리를 두 번 냈다.

어차피 이 속도라면 남은 기일 내에 꽃을 다 피울 수 없었다.

그렇게 열흘마다 열 개씩 늘어 난다면 그는 아마 미쳐 버릴 것이다.

이렇게 개고생만 하다가 그 싸 가지 없는 어린 여자애에게 쫓겨 나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하려면 누군 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온실의 문이 열렸다.

그는 이제 좀 오랫동안 눈을 붙 일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

온실 안에서 새 소리가 두 번 들렸다.

과연, 저 멀리서 누군가 온실로 걸어오고 있었다.

디엘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현장을…… 현장을 덮칠까?”

“아니.”

그가 온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 인한 디엘이 숨죽여 묻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꼬리를 찾았으니 목적을 밝혀 야지. 에스더처럼 혀 깨물게 할 셈이야?”

애초에 현장을 덮칠 거면 디엘 과 단둘이 오지도 않았다.

원래 목적 자체가 다른 첩자를 찾아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었 다.

나는 아론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인간은 절대로 자기가 고생 하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몰락 귀족 주제에 반드시 아래 에 사람을 부려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내가 그렇게 치료소에서 한 시간만 도와주시면 상황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빌었어도 약초 더미 한 번 들어다 주지 않은 인간이었다.

나름 한계까지 몰아 붙였으니, 분명히 틈만 생기면 누군가 부려 먹으려고 부를 것이 뻔했다.

베르칼리아 꽃 재배는 끊임없이 손이 가서 그렇지 엄청난 노하우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으니까.

과연 여섯 시간 동안, 몰래 들어간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아론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또 다른 첩자에게 일을 시 켜 놓고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동이 틀 무렵 어스 름 사이 온실에서 남자가 다시 나왔다.

한밤중에는 실루엣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새벽빛에 형체 확인이 가능했다.

나는 공작성에서 본디 활동 반경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회색 머리의 젊은 남자 를 확인했어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디엘을 툭 치며 조용히 물었다.

“누구인지 알아? 하인이야?”

디엘은 다소 충격받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냐.”

“그럼?”

“케인 아스힐즈.”

“그게 누군데?”

“……기사단 소속이야. 정식 기사는 아니고, 그래도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기사단이라면 내가 아예 모르는 영역이었다.

공작 부인도 호아킨 단장만 믿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집단이기도 했다.

‘잠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호아킨 단장님만 믿는다는 얘기는…… 단장님이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재빨리 회귀 전을 떠올려 보았다.

반란군의 꽤 높은 사람도 치료 한 경우가 제법 있었는데 호아킨 단장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분명 초기에 제거한 것이다.

나는 잠시 나와 호아킨 단장의 친밀도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해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서로 분야가 달 라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잡아낸 사람들을 책임지고 심문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내 망할 생명 존중 사상.’

이왕 희생정신으로 공작성에 몸 담고 있는데, 당연히 살려 드려야 했다.

게다가 나를 거하게 엿 먹이려 고 했던 이시더 남작의 계획이라니.

어떻게든 망쳐 주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기사단에 대해 아 는 것도 없고, 친목도 없다는 것 이었다.

디엘 역시 그냥 심부름을 많이 다녀서 사람들을 많이 아는 거지 친분은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사람 중에 기사단과 좀 관계가 있는 사람은........’

나는 한숨을 쉬며 결론을 내렸다.

‘..........에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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