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50화
아르가는 북쪽 땅에서 딸을 찾 아 헤매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북부는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 꽤 멀었다. 게다가 땅이 넓어서 인구 밀도도 낮아 이동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디엘이 조사해 준 명단 의 반 정도밖에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어두웠는데, 사실은 며칠 전 리체의 편지를 받고 나서부터 계속 그랬다.
평범한 내용 끝에 담담하게 덧 붙여진 내용이 자꾸만 머리를 맴 돌았던 것이다.
[하녀를 매수해 제 머리카락과 손톱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왔었어요.
자작님도 사기 조심하세요. 페 렐르만 상단의 외동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한둘이겠어요? -리체]
아르가라고 그런 일을 겪지 않 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리체의 말대로, 페렐르 만 상단의 부를 노리고 처음부터 계략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18년째 딸을 찾고 있었고, 이런 조작은 셀 수 없이 많이 겪어봤다.
무작정 아르가의 딸이 틀림없다 며 억지로 우기는 경우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물론, 시오니의 여동생 머리카락과 손톱을 구해서 사기를 치던 경우도 있었 다.
결국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최종 검사에서 다 걸러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아르가는 가슴이 울컥울컥 베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친자 검사가 시행되는 오랜 시 간 동안 사람이기에 기대할 수밖 에 없고, 기대가 꺾이고 사기라 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당연히 허탈함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차가운 성격이 된 데에는 그런 여러 가지 상황적 배경이 있었 다.
“바보 같기는.”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리체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열여덟이 감당하기에는 꽤 씁쓸한 경험이었올 것이 뻔했다.
“그런 사기를 당하다니.”
직접 당해 봤기에 이해할 수 있 는 아픔이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둣이 썼지만 심 리적 타격이 말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뭐 어떻게 해 줄 수 있 는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신경이 쓰였다.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은 그런 기분을 절대 모를 거야. 제대로 된 위로도 못할 텐데.”
그는 씹씹함을 어쩌지 못하며 목적지였던 마을에 내렸다.
그때, 페렐르만 상단 북부 지부 에서 일하는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자작님.”
그가 아르가에게 깍듯이 인사하 고 편지를 건넸다.
“공작령에서의 편지입니다.”
리체의 이름이 적힌 편지는 아 주 짧았다.
지난 편지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되었는데, 급한 사안인가 하여 아르가는 그대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어요. 대 부님이 되어 주세요.
리체]
아르가는 씰룩이는 볼을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빠르게 답장을 썼다.
[그래. - 대부]
“이건 짧고 급하니까, 비둘기를 통해 보내.”
지부 사람에게 쪽지 비슷한 편 지를 건네고나서 그가 하인들에게 말했다.
“돌아간다.”
“……네?”
하인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아직 일정이 절반이나……”
“나도 딱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아르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 대녀에게 아주 안타까운 일이 생겼는데, 대부로서 내버려 두면 안 되지.”
“대, 대녀가 있으셨어요?”
“이곳은 다시 올 수 있지만, 위로는 시기를 놓치면 평생 못하는 법이니.”
“잠시만요, 자작님”
“내가 대부만 아니었어도 무시 하고 내 할 일 하는 건데 말이 야.”
하인들은 서로 난감한 표정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아주 성가셔. 귀찮아 죽겠어. 그러니까 왜 속아 넘어가고 그러는지.”
아르가가 마차에 다시 올라타며 투덜거렸다.
“천하의 썩을 놈들, 그딴 사기를 쳐? 인간 말종 같으니……”
그리고 마부에게 눈을 부라렸다.
“얼른 출발해. 당장.”
***
“아론이 28개의 꽃을 피우는 데에 성공했어.”
디엘의 말에 나는 해맑게 웃으 며 대답했다.
“그러면 열 개 더 추가해야지.
총 32개의 씨앗올 다시 주면 되겠다.”
“거의 미쳐 가던데. 제발 한 명 만 더 붙여 달래. 잠을 못 자서 너무 힘들대.”
“절대 안 되지.”
옛날에 나는 씨앗 50개가 아니 라 500명도 넘는 환자들을 돌봤 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고, 더 조심스럽게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었다.
심지어 나는 물과 비료만큼은 충분히 주었으니 상당히 자비로운 축이었다.
“28개의 꽃은 잘 따서 말리고, 유리병에 넣어 놓으라고 해.”
“알았어.”
“그리고...”
나는 디엘에게 몇 마디 더 말했고, 디엘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온실이 터가 좋은가 봐.”
“응?”
“사람 여럿 잡겠어.”
“아무래도 그렇지?”
디엘은 신나서 휘파람을 불면서 방을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아론 정도의 사람이 투입될 정도면 뭔가 큰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르안이 돌아오니까 마음이 급한가 봐.’
지나치게 튼튼해져서 온 에르안을 보면 더 마음이 급해질 텐데.
‘내가 과자의 성분을 알아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이렇게 모르겠는 건 또 처음이네.’
웨데릭이 에르안에게 과자를 먹 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만 해도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고 생 각했다.
그런데 5년이 다 지났는데도 성분을 못 알아채고 있다니.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보다 더 겸손해지기로 마음먹고 있는데,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 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비둘기 한 마 리가 부리로 창문을 쪼고 있었다.
‘비둘기? 정말 급한 전갈?’
비둘기는 아주 짧은 서신밖에 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동안 이르비아에 있는 에르안에게서도 우리는 정말 짧은 메시지밖에 받 지 못했다.
내게 급한 전갈을 쓰는 사람이 누가 있나 싶어서 빠르게 창문을 열었다.
발목에 묶인 쪽지를 열어보니 페렐르만 자작의 필체로 [그래. - 대부]라는 말만 쓰여 있었다.
“이게 뭐 그렇게 급하다고……”
어쨌든 내게 대부가 생긴 순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몇 가지 보여주기 식 절차가 있긴 한데, 나는 귀족 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았다.
성년을 바로 앞에 두고 대부가 생긴 게 뭐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어쨌든 황태자 앞에 서 거짓말은 한 게 아닌 셈이 되었다.
‘뭐 바뀐 거야 없지.’
어차피 페렐르만 자작은 계속 딸을 찾아 헤멜 것이고, 나는 공 작성에 남아 있는 상황이 이어질 테니까.
먼 북부로 떠난 페렐르만 자작 이야 몇 달이 지나야 돌아올 것 이다.
‘그래서 비둘기로 보냈나 보다. 어쩌면 내 성년이 지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빠르게 납득하고 [감사합 니다.]라는 말을 적은 뒤 비둘기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창문을 닫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비둘기가 다시 날아가자마자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은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와 함께 들어온 하녀가 커 다란 트레이에서 티 푸드를 직접 세팅해 주었다.
“아…… 마님.”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부르셨다면 직접 제가 갔을 텐데요”
내 방의 테이블에는 향기로운 차와 형형색색의 티 푸드들이 순 식간에 가득 찼다.
“굳이 발걸음까지 하시고……”
“아냐.”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앉으며 말했다.
“에르안이 요새 일을 많이 하고 있단다. 덕분에 내가 아주 한가 로워.”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따뜻한 찻잔을 쥐었다.
하녀가 나가자 공작 부인이 한 숨을 섞어 말을 이었다.
“일이라도 못하면 화풀이나 할 수 있지……. 망할 자식.”
“에르안 님이 학습 속도가 빠르 신가 봐요.”
“이르비아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워 온 모양이더구나.”
“덕분에 세르이어스 영지가 계속 평온하겠어요.”
“요즈음 사교계에서는 반란 세력이 있다는 말도 돌아서 불안했는데, 에르안이 중심올 잘 잡아 주면 다행이겠지.”
“그런 말이 도나요?”
“그냥 소문일 뿐이란다. 황태자 님이 워낙에 수도를 오래 비우셔 서 생긴 헛소문일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야.”
‘헛소문 아닙니다.’
“황태자님이 승전하고 다시 돌 아오셨는데 누가 반란군에 몸을 담겠니.”
‘마님 동생이요.’
나는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을 속 으로만 대답했다.
“어쨌든 내가 찾아온 건……
공작 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공작성에 도는 소문을 익히 알 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널 양녀로 맞이하고 싶어 했고, 에르안이 아주 거세게 반대했다 는 것 말이야.”
“……어차피 저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니, 나 역시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혼자서 잘 살 수 있고, 양부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어요. 게다가 저는 평민이니 언감생심 귀족의 지위를 바라지도 않아요.”
“하지만 내 마음이……”
공작 부인은 말을 이으려다가 어차피 결론이 정해져 있음을 알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서 말인데, 양어머니로 지내는 건 힘들지라도…… 혹시 대모라도 괜찮겠니?”
“대, 대모요?”
“그래, 네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 꼭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구나. 네게 귀족의 신분을 주 지 못하더라도 여러모로 내가 유 용할 거야.”
그녀가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허튼 사람도 꼬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공식적인 지원도 해 주 고 싶고……”
“어……”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 답했다.
“사실…… 제게 이미 대부님이 계셔서요.”
“뭐? 대체 누구? 언제부터?”
공작 부인의 눈이 커지며 입이 벌어졌다.
“페렐르만 자작님이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세상에.”
그녀의 검은 눈이 아쉬움과 분 노에 번득이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은 에르안을 못마땅하 게 얘기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눈매만은 꼭 닮은 것 같았다.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먼저 선수를……”
“뭐, 제가 귀족도 아니고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니.”
공작 부인은 부들부들 떨며 테이블을 광 쳤다.
“이제 내가 에르안을 어떻게든 설득한다고 해도, 널 양녀로 삼으려면 페렐르만 자작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아, 그래요?”
어차피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나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내팽개 쳐 놓고서 대부라고? 이 염치없 는 인간……”
공작 부인이 이를 갈았다.
“이번엔 한 발짝 늦었지만, 앞 으로 두고 보라지.”
까눌레를 하나 집어 먹으며 나는 에르안이 공작 부인을 꽤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