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9화
아론이 야심찬 첩자의 꿈을 안고 공작성에 온 지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그는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일단 사람이 잠을 못 자니 머리 가 빙빙 돌았다.
하지만 그는 반 란군 명단에 이미 이름을 올린 진정한 첩자였다.
대충 끄나풀로 섭외한 한스 같은 남자와는 급이 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성공해야만 했다.
반란군이 궐기만 해도 감투 하나는 톡톡히 쓸 예정이었으며, 반란이 성공하면 몰락 귀족 출신인 그는 신분 회복을 거하게 해 낼 것이다.
‘50송이만 피워 내면…… 그러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아론은 얄입게 말하던 리체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고작 평민 어린애 주제에 거만 하기는……. 기회가 생기면 내가 너부터 먼저 죽이고 만다.’
그녀는 지금까지 딱 한 번 온실 에 들러서 성의 없이 주변을 둘 러보더니, ‘이 정도면 정말 지낼 만하네.’라고 사람 속을 뒤집는 소리를 했다.
꽃을 돌보는 사람은 허리가 아파 미칠 지경인데, 그 옆에서 ‘역 시 나는 자비심이 넘친다…….’라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온실을 둘러보다가 높은 구두 굽으로 새싹 하나를 밟아서 아론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
그래 놓고 한다는 소리가 ‘어머, 미안해요. 하지만 저한테 조심하라고 하셨어야죠.’ 였다.
한 송이를 돌보는 데에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 잘 알면서..........
베르칼리아 꽃은 딱히 식용도 아니고 약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재라고 칭송받는 리체가 시켰으니 그가 모르는 어떤 용도가 있나 싶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정량의 물을 주고, 혹시나 벌레라도 꼬일까 봐 눈이 빠지도록 잎을 훌었다.
작은 온실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청소를 하는데도 벌써 새싹 네 개가 비실비실하더니 꺾여 버렸다.
“이런.”
개인 의자에 앉아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있던 디엘이 어깨를 으쑥했다.
“저기 저, 32번째 베르칼리아 잎사귀가 갈변하기 시작했는데요.”
아론은 25번째 베르칼리아의 잎을 바라보고 있다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디엘의 말대로 32번째 베르칼리아 잎사귀가 노랗게 변해 있었다.
빠르게 캐내지 않으면 옆의 꽃 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한 시간 전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론은 울 것만 같았다.
벌써 50개 중 여섯 개의 새싹을 망쳤다.
“뭐, 모자라면 다시 심으면 되 잖아요.”
디엘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말이 열흘이지, 늦어질 때마다 열 개씩 더 키우면 되는 것이니 기한은 무한정인 거죠.”
“그게 문제지요.”
아론은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계속해서 양이 늘어나는 상태라면 빨리 끝낼 자신이 없습니 다.”
“그러면 아론 님이 부족한 거고요.”
아론을 더 미치게 하는 것은 늘 페렐르만 상단의 사람들이 그에 게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도와준다는 명목이었지만 그들 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 히려 아론은 자신이 감시받는다 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아론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단 한 명, 디엘만이 가끔 와서 깐족거리긴 했으나 절대 개인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저놈도 내가 직접 죽인다.’
아론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분홍 머리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30분만 일찍 말해 줬어도 잎사 귀 하나만 뜯고 살려 낼 수 있었 는데……’
자신을 노려보거나 말거나, 디 엘은 여유롭게 아론이 고군분투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대체 리체 님은 왜 첫날 이후 여기 발걸음도 안 하시는 겁니까?”
“리체는 바쁩니다. 조수가 될 지 안 될지 모르는 사람 격려하러 올 시간 없어요”
“게다가 이 온실에는 왜 당신들 외에는 아무도 안 오는 거죠?”
“위치를 보세요. 완전 구석이잖아요. 누가 당신을 보러 여기까지 옵니까?”
디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관심에 목 마르신가 봐요. 하지만 공작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실에 당신이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당연하죠!”
아론이 짜증을 냈다.
“저한테 배정된 방도 없지 않습니까. 성 안에 방 하나도 안 주 시는 겁니까? 저는 안 쉬어요?”
“네, 아직 심사를 통과 못하셔서요. 그리고 쉴 시간이 없지 않 나요?”
디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 온실이 제 유일한 거처란 말입니까?”
“혹시 필요한 것이 더 있으세요? 의식주가 다 제공되는 것으로 압니다만……”
“당신이라면 여기서 며칠이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가 그걸 생각할 필요는 없죠”
아론은 약이 오르는지 펄쩍펄쩍 뛰었지만 디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리체의 조수나 하인이 아니거든요.”
“그럼 왜 저를 감시합니까? 저랑 당신이 리체 님에게 있어서 다른 게 뭔데요?”
디엘은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 친구죠.”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쏙 했다.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지.”
***
나는 에르안을 위해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건강 보조제를 들고 연구실에서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건강 보조제를 먹일 필요가 있을까?’
셔츠를 벗을 때 보았던 그의 몸 을 생각하니 굳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공작 부인이나 디엘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계단을 걷고 있을 때였다.
“리체, 무겁지 않아?”
갑자기 손이 가벼워졌다.
“들어 줄게.”
에르안이 다정하게 말하며 내 손에 들려 있던 건강 보조제를 가져갔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보니, 역시 며칠 동안 디엘과 하녀들이 계속해서 떠들던 ‘에르안 인성 거지설’은 사실이 아닌 듯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공과 사를 잘 구분할 뿐이었다.
“아, 음……”
이렇게 된 이상 건강 보조제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나 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에르안 님 거예요.”
“응?”
“몸이 많이 약해지셨을까 봐 지어 놨는데, 별로 필요 없으시다면 디엘에게……”
“아니.”
에르안은 한숨을 폭 쉬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많이 약해졌어.”
“……어디가요?”
“공작성에 오고 나서 뭔가 몸이 안 좋아.”
“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 에르안은 그동안 자기 증상보다 괜찮으면 괜찮다고 했지, 아프다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디엘에게는 단 하나도 줄 수가 없어.”
“몸이 안 좋으면 건강 보조제로 안 돼요.”
나는 걱정이 되어 그의 손목을 이끌었다.
“제가 한번 봐 드릴게요. 일단 들어가요.”
그의 손을 이끌고 들어간 그의 방은 예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열세 살, 처음 이 방에 왔을 때 에는 아이 방 치고 너무 넓다고 생각했는데, 에르안이 들어서니 방이 그다지 커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돌아온 뒤, 함께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 이었다.
“어…… 저건……”
새삼 방을 둘러보던 나는 그의 머리맡에 놓인 유리 상자를 보며 멈칫했다.
고급스럽게 세공된 유리 상자 안에 거의 넝마가 된 셔츠가 놓 여 있었다.
“네가 준 귀중한 셔츠를 아무 곳에나 넣을 수 없어서, 부족하 지만 케이스를 급히 제작했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셔츠는 쓰레기 같고 유리 상자는 무슨 고대 유품 같은데.’
나는 정상이었던 그의 지능 검 사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사람은 작은 이상함을 품고 살기 마련이었다.
“기다려 줄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네? 네……
그가 드레스룸에 가서 실내복으 로 갈아입고 올 동안, 나는 건강 보조제를 꺼내어 그의 책상 옆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공작 부인의 방에서 보았던, 온 갖 서류들이 쌓여 있는 책상을 보니 정말로 공작 위를 물려받긴 할 모양이었다.
‘지난 생애에선 몸이 약해서 성년이 지나도 공작 위를 못 받더니……. 잘했다, 리체 에스텔.’
공작 위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어 쨌든 미래가 확실히 바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데에는 나의 공이 지대하다 할 수 있었다.
곧 취임식이라던 말까지 떠올라 새삼 뿌듯해져서 살짝 미소 짓고 있는데, 그가 드레스룸에서 실내 복을 걸쳐 입고 나왔다.
“어……”
“응? 왜?”
“이렇게까지 벗으실 필요는 없는데요.”
“나 이렇게 자.”
“대체 왜요?”
“이르비아는 덥거든. 습관이 됐 어.”
가운을 살짝 풀어헤쳐 걸친 그 는 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네가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길래.”
“네? 제가 언제요?”
“셔츠 벗을 때 표정이 괜찮던데”
“어…… 그건 그랬죠.”
나는 빠르게 인정했고, 에르안이 씩 웃으며 눈을 접어 보였다.
길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은근히 사람을 홀리는 것 같아서 괜히 목덜미가 붉어졌다.
회귀 전의 에르안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의 그 꼬맹이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감사합니다.”
그가 침대에 누워 온순하게 나 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그의 옆에 앉은 뒤 손을 잡았다.
마력 흐름이나 상태를 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도 했다.
“음…… 별로 이상한 중세는 없 으신데요.”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모든 것 이 지나치게 건강했다.
“요 며칠간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불면은 만병의 원인이기도 하죠. 그래도 적응될 거예요. 더 지내보세요.”
“말했잖아.”
에르안의 까만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기 누우면, 같이 있었던 네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온다고.”
“그럼 지금 자요. 손잡아 줄 테니까.”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가 천천히 내 손을 감쌌다.
이제 내가 그의 손을 잡은 게 아니라, 그가 내 손을 잡은 형상 이 되었다.
“너만 불편하게 이렇게 앉아 있 게 할 수는 없어.”
“그럼요?”
“같이 누울까?”
“아뇨.”
“손만 잡을게, 진짜로.”
눈웃음을 치며 속삭이는 것이 의도가 아주 불순해 보였다.
분명히 그동안 누군가가 못된 것을 가르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세모꼴로 눈을 뜨며 다그 쳤다.
“그런 말은 누가 가르쳤어요?”
“……지, 지켈?”
“남부에서 그럼 이런 말을 하고 다니셨던 거예요? 대체 어떻게 사신 거예요?”
“아, 아냐.”
당황한 에르안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해.”
그가 내 손을 꽉 쥐고 자신의 가슴께로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의 가슴 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너 무 당황해서 뭘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내 귓가로 그가 속삭였다.
“난 너밖에 없는걸.”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볼에 맞닿은 그의 체온 때문에 내얼굴 역시 벌겋게 달아올랐 다.
“나, 진짜 열세 살 때하고 달라 진 거 없어. 네 말이라면 다 기억해. 나는 여전히……”
그의 숨이 귓바퀴에 닿자 나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가 지나가다 보면 크게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일단 내가 오해하게 생겼다.
하지만 제국법은 평민과 귀족의 결혼조차 금하고 있었다.
에르안은 그냥 어릴 때 들었던 말만 반복하는데 내가 너무 멀리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완전히 멀쩡하신 것 같습니다, 에르안 님.”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 밤도 잠이 안 오시면, 수면에 좋은 차를 내일 가지고 올 게요.”
“리체?”
“저, 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 니다.”
그의 체온이 남은 볼 한쪽이 홧홧해서, 나는 그의 눈도 더 마주 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열세 살 때에는 같이 잠들기도 했는데 왜 이렇게 어색한지 나조 차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거북해하지 말자……. 좀 이상 해져서 돌아온 내 고용인이야. 그게 다야.’
나는 너무 깊은 생각을 하지 않 으려고 다짐하며 혼자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