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8화
“들었지, 디엘?”
아론에게 씨앗을 쥐여 주고 온 실에 가두다시피 한 뒤, 나는 디엘에게 속삭였다.
“간이 샤워실, 화장실, 그리고 침대를 마련해 줘. 안 좋은 것일 수록 좋아.”
나는 치료소에서의 내 복지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침대는 삐걱거려서 허리가 엄청 아플 정도의 싸구려가 좋겠어. 샤워실은 당연히 온수가 나 와서는 안돼. 그리고 화장실은 배수가 별로 좋지 않도록.”
그래 봤자 나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리체.”
디엘이 질렸다는 둣이 대답했 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도저히 혼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야.”
“응,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이유 가 있어.”
“이유?”
“큰 그림 그리는 중이니 기대 해.”
그 말에 디엘은 또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분명히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없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거짓말이지.”
나는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그걸 잡아내야 해.”
바로 첩자 하나를 가지고 다른 첩자 하나를 잡아내겠다는 계획!
“그럼 그 아론 크릴소라는 사람…”
“응, 에스더나 한스 같은 인간 이야.”
“뭐?”
디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의 난장판을 그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언제나 똑같지, 뭐. 내가 똑똑 해서 알아챘어.”
내 대답에 디엘은 바로 납득했다.
나는 디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디엘, 미안하지만 감시 좀 해 줘야겠어. 부탁할게.”
“무슨 감시?”
“도와준다는 명목 아래 누구와 도 접촉하지 못하게 해 줘. 페렐르만 상단의 믿을 만한 사람들을 교대로 붙이면 되겠지.”
나는 신중하게 조건을 붙였다.
“대신, 절대로 말 걸지 않도록. 반복되는 작업을 하면서 외로움 으로 반쯤 미칠 때까지 몰아붙여야 해.”
“그래.”
디엘은 신나서 대답했다.
“나도 가끔 가서 구경해야지. 나는 말 좀 걸어도 돼?”
“옹.”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내 친구니까 괜찮아. 특별히 말이야.”
그 말에 디엘은 자유 도시에서의 서운함이 다 날아갔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리체가 아론의 면접을 보고 있 을 동안, 공작성은 상당히 시끌 벅적했다.
에르안과 함께 갔던 기사단과 사용인들이 돌아온 것이다.
원래 성대한 환영식을 하려고 준비했던 공작성은, 이미 홀로 빠르게 돌아온 에르안과 하루가 지나 뒤따라 온 다른 사람들 때 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결국 어영부영하게 환영식 없이 지나가게 되었지만 에르안은 별 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딴 게 중요한 적은 없었으니까.”
에르안은 지켈에게 성의 없게 말했다.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지? 3 일은 걸린다면서.”
“에르안 님이 먼저 가셨는데, 어떻게 저희가 미적거리며 읍니 까. 최대한 추슬러서 왔죠.”
지켈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하루 일찍 오시니 좋으셨습니까?”
“응”
에르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지겔은 그가 아주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아챘다.
“너무 좋아.”
그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턱을 쓸었다.
딱히 변한 것이 없는 에르안의 방을 둘러보던 지캘은 침대 맡의 다 찢어진 셔츠를 발견하고 고개 를 갸웃했다.
“저건 됩니까? 제가 가면서 버려 드릴까요?”
“네 목숨까지 버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에르안은 책상에 쌓여 있던 서 류를 집어들며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이 성에서 가장 소중한 거니까.”
“어…… 예, 뭐.”
지켈은 굳이 그 이유를 묻고 싶 지 않았다.
다만 실패한 인성 교 육에 대하여 다시 한번 체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너처럼 생각하면 괜한 피를 볼 수 있겠군. 하인을 시켜서 전용 유리 전시장을 만들라고 해야겠어. 지적 고맙다.”
지켈이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때마침 공작부인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기 때 문이었다.
지난 저녁 식사 이후 두 모자의 사이는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그 소문은 성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래서 지켈은 굳이 두 사람 사 이에 낄 생각이 없었다.
역시 기대했던 성대한 환영식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며, 지켈은 인사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지켈이 나가자마자 공작 부인은 에르안의 앞에 앉아 팔짱을 꼈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다 봤니?”
“네.”
에르안은 쌓여 있는 서류들 속 에서 태연히 대답했다.
“이르비아에서 배운 것이랑 별 다르지 않아서 어렵지 않았습니 다.”
공작 부인이 에르안에게 넘긴 것은 그동안의 영지 관리 내역이었다.
에르안은 성년을 넘겼으므로, 이제 그가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공작 위를 정식으로 받을 예정이었다.
“네가 충분히 준비가 된 것 같다면 열흘 안에 취임식을 하도록 하자꾸나.”
제국법에 따르면, 작위는 성년이 되어야만 정식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가신들과 친지들을 모아 취임식을 올리고 황제에게 보고하면 에
르안은 드디어 세르이어스 공작이 되는 것이었다.
공작 부인은 지금까지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예상보다 기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아들이 너무 낯설게 커 버린 탓일까.
그가 돌아오자마자 공작성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에스더? 그런 끄나풀들이 어디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대놓고 성벽에 경고의 의미로....]
[부족하죠. 감히 리체를 속이려고 들다니, 시도도 하지 못하게 기강을 잡아야 합니다. ]
공작 부인도 싸늘한 성격이었지만, 에르안의 위압감에 비할 바 는 못 되었다.
돌아온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말을 들어 보니 역시 친절하고 부드러운 인성으로 큰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웃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고, 사람을 귀찮아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는 일관적인 평가가 쏟아졌다.
“리체 얼굴은 봤니?”
“네.”
“여전히 네 생각에는 변화가 없어?”
공작 부인이 이를 갈면서 에르 안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에르안은 더 이상 이 화제에 대 해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둣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로 개 차반이다.’
공작 부인은 화를 눌러 참으며 재차 말했다.
“6년간 이 영지를 지켜온 내 마지막 부탁인데도 안 되는 거 니?”
“네, 안 됩니다.”
“리체는 말이 조수지, 여기서 주치의로 6년간을 헌신했어. 또래 여자애들처럼 즐겁게 지내지 도 못하고 늘 내 건강만 살펴 주었단다.”
에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원하는 건 가족이고, 난 정말로 그 애를 딸처럼 생각 해. 혹시나 돈만 노리는 평민 부모가 나타날까 봐 내가 얼마나 안달복달했는지 아니?”
“..............”
“그러니 리체가 성년이 되는 이 번 여름, 누구보다도 성대한 데 뷔탕트를 열어 주고 싶어. 많은 귀족들이 감탄할 정도로 예쁘고 귀엽게 꾸며 줄 거고.”
공작 부인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어렸다.
“그럼 우리 리체에게 반한 귀족 영식들이 생길 수도 있고, 내가 잘 알아봐서 집안과 성격이 훌륭 한 청년에게……”
“어머니.”
에르안이 이를 갈았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 데, 생각만 해도 아주 끔찍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전부가 귀 에 너무나도 거슬릴 만큼이요.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
“절대 안 되니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논하지 마세요.”
“너는…… 너는 리체한테 그러 면 안 돼. 너를 이렇게 건강하게 만들어 준 사람은 리체야.”
“그건 절대 안 잊습니다.”
그가 검은 머리카락을 한번 쓸 고 단호하게 화제를 돌렸다.
“취임식은 일주일 뒤로 하겠습니다. 가신들과 친지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주세요.”
***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마는군.”
로만은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온 초대장을 집어 던지며 짜중을 냈다.
이제 성년을 훌쩍 넘긴 그의 아들 웨데릭은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이르비아에 있던 5년간 전혀 손을 쓰지 못했으니까요. 계다가 그 리체 에스텔이라는 애가 워낙에 고모님의 옆에서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무슨 주치의의 조수밖에 안 되 는 애의 실력이……”
“페렐로만 자작이 인정한 천재라던데요.”
갈색 머리의 새침한 조수를 떠 올리는 웨데릭의 표정이 구겨졌다.
처음 만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열세 살의 에르안을 옆에 끼고 바락바락 대들던 꼴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래도 적절한 때에 에스더를 통해 제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아론을 투입했습니다.”
웨데릭이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 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론 크릴소는 한낱 하녀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그의 측근 인력으로, 웨데릭으로서는 상당히 고급 인재를 투입한 것이었다.
에르안이 돌아왔으니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래서 더 강하고 은밀하게 움직이기로 결정한 결과였다.
“다행히 잠입은 성공했으니 기회를 기다리면 됩니다.”
“어차피 평민이야 뒤처리가 쉽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력부 터 악화시켜야 한다.”
로만은 펜을 들고 종이에 ‘호아킨’이라는 이름을 썼다.
웨데릭이 작은 탄성을 질렀다.
“누님은 공작 영지를 꽤 잘 다스렸지만 기사단에 대해서는 무지해. 스스로도 그쪽에 별로 흥 미가 없기도 하고, 호아킨 단장이 워낙에 잘 해내고 있기 때문 이지.”
“하지만.......”
“호아킨 단장이 사라지면 2인자 가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부 정보가 있었다.”
“아!”
“게다가 지금 에르안과 함께했던 기사단과 공작령에 남았던 기사단이 다르기 때문에 분열도 쉬워”
로만은 씩 웃으며 호아킨의 이름이 적힌 종이에 팬을 꽂았다.
“그나저나, 곧 에르안을 보겠구나.”
웨데릭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봤자 애송이죠.”
자신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꼬맹이를 떠올리니 비웃음이 절 로 났다.
끼고 돌면서 아껴 주던 리체와도 멀어졌으니 분명 남부에서 5 년간 질질 짜다가 왔을 것이다.
공작 위를 물려받기 전에 세상 을 떠나게 하려는 작전은 실패했지만, 공작 위를 받는다고 해서 못 죽일 이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