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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47화 (4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7 화

회귀 전, 그러니까 내가 열아흡 성년이 되고 좀 지났을 때의 일 이다.

세르이어스 공작령 구석에서 의원을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웨데릭이 공작령을 점령했다.

어차피 위의 일이겠거니, 하고 신경 쓰고 있지 않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불려 갔다.

주근깨가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네가 이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 맞아?”

“맞는데요.”

“그럼 따라와.”

키우던 가축도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혀서 반문했다.

“네?”

“넌 우리 군대의 의무병으로 차출되었어.”

“뭐라고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권위적으로 명령하자, 나는 허리에 손 을 얹고 따졌다.

“그럼 제가 운영하고 있는 의원은 어떡하고요? 그리고 저는 제국법에 의하면 병역의 의무가 없 는데요.”

“우리 군대에는 있어. 세르이어스는 이제 웨데릭 님이 다스리고……”

“공문 주세요.”

“까다롭게 굴면 징계 내릴 줄 알아. 이제 내가 네 상관이야.”

“상관이라뇨? 다짜고짜 와서 갑자기 끌고 가는데,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청년이 검을 뽑아 내 목 에 들이댔기 때문이었다.

“건방지게 말대꾸하지 말고 목 숨 아까우면 따라와.”

그렇게 나는 갑자기 생긴 ‘상관’ 을 따라 반란군 기지에 차출되었다.

아주 나중에야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이 ‘아론 크릴소’고, 나보다 한 살 많을 뿐이며 뭐 대단한 위 치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몰락 귀족 출신인 그는 반란군 에 껴서 신분 상승을 노리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웨데릭과 꽤 가까운 사이였고, 내게 이것저것 시킬 ‘상관’의 위치는 되는 사람이었다.

“물자가 부족한데요.”

막상 반란군 기지에 가자, 상처 입고 온 사람들은 거의 다 세르이어스 영지의 주민들이었다.

보육원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부터, 의원의 평범한 손님들까지 나처럼 마구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된 끼니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의사도 부족해요. 의사가 없으면 조수라도 좀 붙여 주세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부상자들은 아무리 내가 천재라도 다 살려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 었다.

하지만 내 말을 아론은 언제나 무시했다.

“천재 의사잖아? 알아서 좀 해.”

“지금도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고 있는 걸요.”

그 즈음 나는 약초 분류부터 청소까지 혼자 도맡아 하고 있어서 손까지 모두 튼 상태였다.

청소를 해 줄 인력조차 없었지만, 치료소에서 위생은 가장 기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두 시간으로 줄여.”

“아니, 뭘 주면서 사람을 고치라고 해야죠. 적어도 약초 분류 라도 할 어린애라도 주시면.........”

“지금 거기 붙여 줄 인력이 어디 있어?”

아론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침 을 탁 뱉었다.

어느 날은 더 짜증나는 업무를 던지곤 했다.

“웨데릭 님의 약혼녀분이 미용 시약을 찾으셔. 네가 그쪽에서 좀 유명했다며?”

“뭘 유명해요. 몰래 찾아오시는 귀족 영애분들이 부탁해서 몇 개 만들어 드린 거지.”

“어쨌든 오늘 오후까지, 얼른 일주일 치 만들어 와.”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치료소 상황에서 그건 정말 말도 안 되 는 이야기였다.

“지금 환자들한테 쓸 약초조차 도 없는 걸요?”

“뭐가 중요한지 몰라? 혹시 모 르잖아. 약혼녀분이 네 시약을 받고 기분이 좋으셔서 지원금이 라도 더 줄지.”

그 말에 나는 사람이 옆에서 죽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잠을 줄여 가며 미용 시약을 만들어야 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말도 못했다.

하지만 혹시나 지원금이 늘어나 붕대라도 더 살 수 있을까 싶어 묵묵히 일주일 치를 만들어 바쳤다.

그러나 그 약혼녀한테 들은 말은 ‘다음 일주일 치도 부탁해.’라는 뻔뻔한 대답이었다.

당연히 지원금 같은 것은 없었다.

“공작성의 여주인이 되실 분이 야. 그분이 널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것만 해도 어디야?”

“그게 말이 돼요, 지금?”

내가 분노에 몸을 떨자 아론이 달랜답시고 한마디 했다.

“그래도 네가 맡고 있는 치료소 가 제일 완치율이 높아.”

“완치 아니에요. 다 휴식을 취 해야 할 사람들이라고요. 또 바 로 전쟁터에 내보내시면 어떡해 요?”

만일 환자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다 때려치우고 죽음을 무릅쓴 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마저 없으면 죽어 나 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바보야? 지금 제이드 황태자가 몰아치고 있는데 그 사람들 멀쩡 해질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어디 있어?”

물론 아론은 내 말을 귓둥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금 잘하고 있으니 그냥 그만 큼만 해. 정 불만이면 웨데릭 공작님께 내가 말씀드려 보지.”

나는 바보같이 그 말을 믿고 또 기다렸다.

웨데릭 공작님께 말씀을 드린다 는 걸, 당연히 치료소 환경 개선 으로 알아들은 탓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내게 온 것은 웨데릭의 이름이 박힌 표창장이 었다.

누구보다도 반란군의 치료와 회 복에 앞장서고 있으므로 타의 모범이 된다는 내용의 종이 쪼가리 였던 것이다.

‘아, 대환장…….’

나는 그 쓸모없는 표창장을 정 확히 8등분하여 약초를 싸는 데 에 썼다.

그 당시는 약초를 분류할 수 있 는 물자조차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표창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제이드 황태자가 결국 이 땅을 점령했을 때에는 ‘리체 에스텔’의 공로로 바겢되어 버렸다.

그 표찬장이 없었더라면 사형 선고까지는 안 박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 생애 정말 조금도 도움이 안 되었던 자식’

그러니 내가 아론 크릴소의 이름을 잊을 리가 없었다.

***

“안녕하세요.”

다음 날, 아론은 내 앞에 서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새로 온 조수님의 조수, 아론 크릴소라고 합니다.”

콧잔등에 펼쳐진 주근깨와 붉은 머리카락을 보니 옛날 일이 새록 새록 생각나는 것 같았다.

“리체 님을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네.”

나는 평소에는 쓰지도않는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바람을 만들며 거만하게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을 거예요. 잘할 수 있나요?”

“네, 시켜만 주십시오.”

무조건 세트이어스 공작성에 남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달고 쓴 것을 상관할 처지가 아닐 것 이다.

“아직 정식 고용은 아니고요, 일을 잘하는지 아닌지부터 판단 할게요.”

내 거드름 떠는 말투에 뒤에서 디엘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 역시 페렐르만 자작님에게 시험을 받았던 처지라.”

물론 여러 가지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한 것이 다였지만.

사정을 모르는 아론은 이해한다 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디엘에게서 받은 베르칼리아 씨앗 50개가 담긴 주머니를 건넸다.

“베르칼리아 꽃을 50송이 다 피 우도록 하세요. 기한은 일단 열 홀 드릴게요.”

“……네?”

“아, 그리고 온실이 좀 지저분 해요. 베르칼리아 꽃은 주변 환경이 깨끗해야 잘 피는 것 알죠? 청소부터 하셔야 할 거예요.”

아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베르 칼리아 씨앗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못 하시겠으면 나가요.”

베르칼리아는 꽃을 피우기 정말 로 까다로운 식물이었다.

두 시간마다 한 번씩 물과 비료를 줘야 하는 것은 물론, 조금이 라도 노란 잎이 생기면 바로 떼어 줘야 했다.

주변 환경이 멸균 상태에 가까워야 그나마도 꽃봉오리를 맺을 수 있었으며, 벌레라도 꼬이기 시작하면 하나하나 손으로 잡아 주어야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속 온실에 붙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꽃 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까다로우면서도 딱히 효능이 없고 예쁘지도 않아서, 베르칼리아 꽃은 시장에서의 가치가 거의 없었다.

어디서 돈 주고 구할 수도 없다는 얘기였다.

“아닙니다.”

아론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열흘 안에 50개를 못 채운다면 열 개씩 개수를 늘릴게요.”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론이 살짝 한숨을 쉬 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혼자 그 꽃들을 다 피우려면 온실에서 계속 먹고 자야 할 텐데요……”

“간이 샤워실과 침대를 설치해 드릴게요. 식사도 거기서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마치 악마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론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문제 있을까요?”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잘 텐데……”

“두 시간은 잘 수 있겠죠.”

역시 굴러 본 사람이 굴릴 줄 안다고, 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은근히 떠보았다.

“혹시,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아, 아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생긋 웃었다.

“꽃을 정해진 수량만큼 다 길러 내면 정식 조수로 채용되고, 많은 권한과 자유를 누리게 될 거예요. 가치를 중명할 수 있을 때 까지만 좀 참아 봐요.”

부채를 탁, 하고 접으며 덧붙이 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보상 까지도 약속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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