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6화
4. 나의 빛나는 사람
에르안이 오고 난 바로 다음 날, 나는 여러 가지 상태를 검사하기 위해 그를 연구실로 불렀다.
5년 동안 제대로 몸이 잘 회복 되었는지 살펴봐야 했다.
주사기로 피를 뽑고, 여러 가지 시약 반응을 검출하는 동안 에르안은 그저 나를 보며 웃고만 있었다.
솔직히 어릴 때 웃는 모습도 귀여웠는데, 지금은 웃음을 머금은 눈매가 그윽하기까지 해서 보기 좋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이랑 너무 딴판이야……. 너무 낯설어 서 완전히 남 같은데.’
물론 내가 선물한 셔츠를 또 다 시 입으려고 하기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는 과 정이 있긴 했다.
만일 그가 그 셔츠를 입고 다닌다면, 누구나 내가 그의 지능 검사를 제대로 했는지 의심할 판이 었다.
“역시……, 이제 정말 건강해지셨어요.”
모든 검사에서 에르안은 ‘매우 건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 그래도 뿌듯하다.’
나는 새삼 그의 딱 벌어진 어깨 와 잔근육이 잡힌 팔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키우다시피 했는데……’
몸에 좋은 약은 다 챙겨 먹이 고, 잘 자라고 매일 밤 토닥여주었던 옛날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 갔다.
내 덕분에 완치된 환자를 볼 때 마다 느꼈던 보람의 몇 배나 되 는 기쁨이었다.
물론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에 는 예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놀라고, 차갑게 나와 오누이 같 은 사이가 아니라고 일갈하는 것을 듣는 바람에 슬폈지만…….
“살살이풀의 해독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
이번에도 내 진단과 처방이 맞았다는 뿌듯함에 입꼬리가 자꾸 만 올라갔다.
“효과가 있었겠지.”
그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 보았다.
아주 옛날처럼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누구 처방인데.”
“그건 그렇죠.”
맞는 말이라서 나는 냉큼 대답 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계절이 바쩔 때 한 번 더 정밀 검사를 해 봐야 해요. 계속 온난한 곳에 계셨으니, 찬바람이 불면 몸의 환경이 변할지도 몰라서요.”
본디 무사히 에르안이 성년이 되고 공작 위를 물려받으면 떠나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사후 처리까지 서비스해 주기로 했다.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이 그 전 에 잡혀가더라도, 가을까지 상태를 보면서 날이 추워져도 괜찮을 지 살펴봐야지.
‘가을에 반란군들이 모습을 드 러내기 시작하니까…. 그때까 지만 버티면 에르안도 세르이어 스 영지를 뺏길 가능성은 없겠지?’
이번 해 가을. 막 성년이 지나 의원을 열었을때 창궐하던 반란군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식사는 잘 하셨고요?”
시약 반응을 살펴보며 나는 무 심하게 물었다.
“잘 못 잤어.”
하지만 어쩐지 에르안은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잠자리가 바뀌셔서 그런가 봐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그 방에서 항상 너와 같이 자던 생각이 나더라.”
“말은 바로 할까요? 손만 잡고 잔 거예요.”
“음…… 그럼 너랑 손만 잡고 자고 싶어서?”
“이제 건강해지셔서 며칠 좀 못 주무셔도 괜찮아요.”
나는 에르안의 어리광을 사전에 방지했다.
어렸을 때야 몰라도 지금 같이 손을 잡고 자면 무슨 소문이 날지 모른다.
“리체, 좀 냉담해졌네. 못 본 새 에 페렐르만 자작 같아졌어.”
에르안은 실망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투덜거렸다.
페렐르만 자작 같아졌다니. 그 말에 나는 정색했다.
“세상에, 그런 욕을 하시다니 너무하세요.”
내가 도끼눈이 되자 에르안이 달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났어? 사실 그래도 예뻐 죽겠어.”
“그건 사실이고요. 근데 왜 이렇게 빤히 바라보세요?”
나는 시약 반응에서 눈을 떼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볼 뚫리겠어요.”
“그동안 못 본 거 자꾸만 보고 싶어서……. 불편했어? 미안.”
수줍게 웃으며 괜히 주변을 둘 러보는 그의 모습은 온순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어릴 때 내 말을 잘 듣던 그 부드러운 성향은 여전한 듯했다.
‘그럼 나를 양녀로 들이겠다던 공작 부인의 말에는 정말로 화가 났던 거겠지?’
그날 그 대화를 엿듣지 못했더라면, 그가 그렇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에르안이 보존 액에 담긴 과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리체, 저건…… 옛날에 나한테 가져간 과자 아냐?”
“예, 웨데릭님이 주신 거요.”
“저게 아직도 남아 있어? 썩는다며 먹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서 보존액에 담가 두었어요.”
나는 아직도 저 과자의 성분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냥 원액이면 쉬울 텐데, 과자 를 구우며 성분이 뒤섞여 버려서 추론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문제는 그 과자가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5년 내내 조금씩 부수어 검사를 하다가, 결국엔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어쨌든 에르안 님이 드셨던 건데, 제가 성분을 완벽히 알고 있어 야죠.”
에르안은 느릿하게 내 손을 꼭 잡아왔다다.
“……날 가장 생각하는 사람은 리체뿐이야.”
깍지를 낀 손가락 사이로 이상 하게 전기가 올랐다.
어릴 땐 내 가 먼저 잡곤 했던 손이라 뿌리치기도 이상했다.
커다란 엄지손가락이 내 손등을 쓸자 어깨가 움찔했다.
“네 덕분에 내가 살았고.”
그의 눈이 나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둣이 반짝여서 민망했다.
하긴 그의 말대로 나는 그를 살려 준 사람인데, 나에게 고마워 하는 건 당연했다.
“뭐……”
그래 봤자 평민과 귀족의 선을 딱 그어 버리던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이건 그냥, 일 잘하는 고용인에 게 주는 칭찬인거겠지.’
아무리 어릴 때처럼 다정하고 온유해도, 우리 사이에는 분명한 벽이 있다는 걸 떠올리며 나는 애써 시선올 돌렸다.
“의사로서 당연한 거예요. 감동 받으실 필요 없어요.”
나는 천천히 손을 빼고 알코올 솜을 제거하며 최대한 사무적으 로 말했다.
“이제 가셔도 돼요.”
“더 있고 싶은데…… 어머니께 서 부르셔서 일단 가 볼게. 저녁 때 또 봐.”
“안 보셔도 되고요.”
“봐도 되겠지.”
에르안은 소매를 걷어붙였던 셔 츠를 다시 내리고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가 연구실을 나간 이후 나는 다시 시약 반응을 노려보았다.
다행히도, 지능 발달은 정확히 정상이었다. 어딘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긴 했지만 사람은 모두 조 금씩 이상하니까 이해하기로 했 다.
물론 에르안이 정상 범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에르안이 돌아오고 나서, 공작 성의 분위기는 오히려 더 험악해졌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과 에르안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도 한몫 했다.
식당 안에 있던 하녀들 때문에 그날의 대화는 성 전체에 순식간에 퍼졌다.
‘에르안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이 폭풍의 당사자였고, 아무도 내게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입올 다물고 있었지 만 에르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이 양녀지, 고아에게 대귀족 의 성을 준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여전히 에르안은 내게 친절하고 다정했기에, 나는 그에게 별로 실망하지도 않았다.
5년간 타지로 보낸 것에 대해서는 ‘리체는 훌륭한 의사니까 그 말을 들어야지.’라며 시원스럽게 넘어가 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의 제안을 반대한 건 개인적인 감정도 아니 라는 소리였다.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오후에 찾아온 디엘에게 내가 이런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그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냐, 리체.”
에르안의 귀환이 나름 충격이었는지, 디엘은 자유 도시에서의 서운함을 더 이상 토로하지 않았다.
“그 문제를 떠나서, 에르안 님이 돌아오시고 반나절 만에 성 전체가 몹시 살벌해졌어.”
“그래?”
“넌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서 모르는 거야. 뭐 하나 잘못하면 바 로 저세상 갈 분위기라고.”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디엘이 답답하다는 둣 가슴을 쳤다.
“들리는 말로는, 에스더와 한스의 일을 들으시고 성의 기강을 더 세워야겠다고 하셨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에스더는 여기서 10년 이상 일한 하녀 였잖아.”
나 역시 이시더 남작의 수족들 이 분명히 더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 르안의 경계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근데 그게……. 리체, 진짜 못 느끼겠어? 에르안 님이랑 둘이 있으면 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그 기분을?”
디엘은 어찐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뭐, 옛날처럼 작고 귀여우시진 않지만 무난하시지 않아? 잘 웃고, 다정하시고.”
나는 수줍게 웃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 성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 람은 너뿐이야, 리체.”
디엘은 나와 대화하는 것을 포 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에르안 님이 널 좋아하셔서 넌 그 특유의 위압감을 모르나 보다”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눈치 보는 게 억울하면 일을 잘하면 되지. 난 내 일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 그런 거잖아.”
“그럼 난 왜 싫어하시는데?”
디엘이 눈을 부릅 뜨고 물었다.
“그건…… 글쎄다.”
합리적인 추론은 하나뿐이었다.
“널 어릴 때부터 이유 없이 싫어하시긴 했어. 아무래도 생긴게 정말 취향이 아니신가 봐.”
실제로 에르안은 내게 충분히 다정했기 때문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재회한 후의 모습을 보면, 꼭 필요할 땐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잘 컸다.
유능한 사용인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까다로운 귀족으로 성장 했을 뿐이겠지.
“근데 왜 왔어?”
내 질문에 디엘이 씩 웃으며 말 했다.
“네 조수가 내일 온다고 했거든. 그거 알려 주려고.”
“아론 크릴소?”
나는 눈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그 사람이 온다고?”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디엘, 부탁인데 구해다 줄 것이 있어.”
“뭔데?”
“베르칼리아 씨앗 50개.”
“뭐?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 쓸모없고 예민하기만 한 식물을 대체 왜…”
내가 산뜻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신나서 대답했다.
“새로운 조수의 능력 좀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