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5 화
디엘은 에르안에게 재빨리 고개 를 숙이고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가 버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대놓고 핑계인 것이 눈에 보이는 퇴장이었다.
‘이렇게 치사하게 둘만 두고 즉시 튀어 버리다니.’
괘씸했지만,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에, 에르안 님 맞으시죠?”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서 손을 모았다.
여러 모로 내가 생각한 재회와 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어린 시절 이목구비에서 간신히 그의 정체를 유추해 낸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꾹 눌렀 다.
아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회귀 전 에르안이 전혀 아니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한 뼘 정도 더 컸겠지 싶었는데, 한참 올려다봐 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역시 남부는 진짜 신기한 땅인 가 봐……. 신기한 풀이 크는 것처럼 사람도 예상 외로 쑥쑥 키 우나 보지.’
게다가 어깨는 얼마나 벌어졌는 지, 예전처럼 뒤에서 꼭 안아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미래를 바꿨으니 에르안 역시 바뀌는 건 당연하지만 이렇게까지 바뀔 줄이야.
완전히 남을 보는 기분에 내 몸 이 뻣뻣하게 굳었다.
“리체.”
그가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매력적으로 휘어지는 눈 꼬리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언제 디엘을 죽일 듯이 노려보 았냐는 둣, 그는 성큼성큼 내 앞에 걸어와 내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보니 덩치만 컸지 다정한 말투는 옛날과 똑같은 것 같 기도 했다.
“왜 이렇게 예뻐진 거야? 상상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뻐.”
“어……, 오늘 열심히 꾸며서 그래요. 내일은 다를 걸요.”
내 손이 폭 감싸일 정도로 그의 손은 크고 두꺼웠다.
옛날에는 내가 꼭 잡으면 딱 맞을 정도로 작고 가날폈는데…….
“그리고…… 원래 이렇계 몸이 작았던가? 귀여워……”
“에르안 님이 커졌다는 생각은 못 하세요? 그게 객관적인 사실 이에요.”
차분하게 대답한 나는 이상하게 화끈거리는 손을 간신히 뺐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 몸은 좀 괜찮으세요? 5 년간 어디 아프신 곳은 없었지요?”
“네 덕분에 늘 건강했어. 발작도 없고, 갑자기 열이 나서 쓰러 지지도 않았고.”
그가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짙게 웃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아까 식당에서 엿들었던 위협적인 어조와 완전히 달랐다.
“네 덕분이야, 리체.”
물론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걸 절대로 잊지 않고 살 거 야. 평생.”
“5년 동안 낯선 곳에서 홀로 계셨을 테니……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정말 힘들었지.”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날아갈 것 같이 좋아.”
그를 높이 올려다보는 것이 낯 설어서 나는 시선을 피했다.
예전에 에르안과 지낼 때와 대 화는 비슷한데 뭔가 적응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리 다정하고 반갑다는 말투여도, 칭얼거리면서도 내 옆에 꼭 붙어 있던 어린애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상하게 어색하고,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가 이제 아주 다른 사람 임을 또 한 번 인정해야 했다.
그는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주치의를 공작 가계에 올릴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할 권리를 가진 사람.
“이렇게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 지…… 짐작도 못할걸.”
“네. 뭐, 사실 제가 굳이 짐작할 필요는 없죠.”
자유 도시에서 디엘은 평민이라 는 이유로 카페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에르안과 나에게는 이제 엄청난 신분의 격차가 있었다.
귀족과 평민은 서로 법률상 결혼도 못할뿐더러, 길거리에서 마 주치면 평민이 먼저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달라진 그의 외형만큼, 그는 이제 성년이 지나 있었다.
잘 키우겠답시고 거리낌 없이 어울렸던 어린 시절과는 이제 달 라졌다.
그가 아무리 예전처럼 대해 준다고 해도 나는 내 분수를 잘 알고 선을 지켜야 했다.
예전처럼 달리기를 하라느니, 더 먹으라느니 잔소리를 할 위치 가 아니었다.
“어쨌든, 늦었지만 성년 축하드려요……”
“아, 그래.”
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난 아주 오래전부터 열아흡이 되고 싶었어.”
그가 나를 뻔히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서 정말 좋아.”
이상하게 둥골이 서늘했다.
딱히 할 말도, 나갈 생각도 없 어 보이는 그를 보며 내가 상냥 하게 물었다.
“제게 인사하러 오신 것 맞죠?”
“당연히 널 보러 왔지.”
“오랜 여독에 피곤하시겠어요. 얼른 가서 쉬세요.”
“내 방을 하녀들이 아직도 치우고 있어.”
그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오늘 올 줄 몰랐나 봐.”
“예…… 뭐, 아무도 몰랐죠.”
“넌 왜 아직 연구실이야? 방에 안 가?”
“뭐 좀 정리하려고요. 디엘이 도와주다가 지금 도망가 버려서.”
“내가 도와줘?”
“아니에요!”
나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이건 어디다 두면 돼?”
에르안이 내가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선물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누가 봐도 정돈이 되지 않은 물건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선물 상자의 상호를 보던 에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성용…… 셔츠? 이게 왜 여기 있어?”
“서, 선물로 샀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 선물?”
아주 느릿한 질문이었다.
나는 민망해져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에르안 님이요.”
“내 거라고?”
“예, 오늘 자유 도시에서 사 왔어요. 늦었지만 성년도 축하하는 셈치고, 또 성에 돌아오신 걸 환 영한다는 의미에서……”
갑자기 에르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그 환한 미소가 너무 예 삐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바라보며 초롱초롱하게 빛 나는 검은 눈과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못 드릴 것 같아요.”
“왜?”
“사, 사이즈를 .........제가 잘못 샀어요.”
이렇게까지 클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나름 잘 컸을 것까지 생각해서 가장 작은 사이즈를 안 샀는 데—.
나는 벌써부터 선물 상자를 꼭 안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다음에 나갈 때 바꿔 올게요.”
“아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리체의 환영 선물인데 평생 간직할 거야.”
“셔츠를 간직깨서 대체 뭐하는데요?”
“그럼 입을게.”
“못 입으실 텐데요.”
“어떻게든 입으면 되지.”
그가 절대로 벳길 수 없다는 듯 이 내게서 물러난 뒤, 상자를 풀어 셔츠를 꺼냈다.
디자인이랄 것도 없이 아무 무늬 없는 횐 셔츠였는데 그가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감탄했다.
“아, 너무 마음에 들어, 리체.”
“어…… 에르안 님의 옷장에 이 비슷한 셔츠는 열 개도 넘게 있을 텐데요. 그것도 잘 맞는 것들 로요.”
“이것도 잘 맞을 거야. 봐.”
“에르안 님!”
그가 그대로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거침없이 상의를 탈의했
‘몸 봐. 미, 미쳤다.’
잔근육이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그의 상체를 보며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딱 벌어진 몸이 보기에 상당히 좋았다.
그의 손에 쥐여 진 내 셔츠는 말 그대로 너무 작아 보여서 민망할 수준이었다.
“이거 봐.”
나는 멍하니 그 작은 셔츠에 몸을 끼워 넣는 그를 바라보았다.
“잘 맞잖아.”
그가 두 팔을 끼우자 벌써 솔기가 뜯어지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어울리고……”
차마 단추가 채워지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
“아, 안 돼. 단추 하나라도 소중 한데……”
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샀어 요.”
“무슨 소리야, 리체. 넌 절대 잘 못하지 않아.”
“..............”
“내 팔이 긴 게 잘못이지. 등이 너무 넓은 게 문제야. 년 잘했는데, 내가 문제야.”
제대로 단추조차 잠기지 않는 셔츠를 소중하게 입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멍하니 말했다.
셔츠에 가려지지 않은 그의 맨 몸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는 필사적으로 옷이 찢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물론 나 도 내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애 썼다.
“좀 쉬시고…… 내일은 여러 가지 검사 좀 해 볼게요.”
“검사?”
“……네. 아무리 지금까지 건강 하셨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 을지 모르니까요.”
예를 들어 머리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