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44화
내가 고른 선물은 결국 셔츠였다.
500골드 정도의 셔츠면 상당히 고급품이었다.
어차피 더 고급품 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예산도 없었다.
셔츠를 고른 것은 세밀한 디자인을 보는 눈이 없어도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에르안은 기성복 따위는 입지 않아도 되는 대귀족이었지만, 안에 받쳐 입는 건 많을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뭐, 그냥 환영 선물 겸 기념품의 의미지 대단한 뜻은 없었다.
“선물 받는 분의 체격이 어떻게 되세요?”
“좀 마르고……”
나는 기억 속의 19살 에르안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원래라면 비쩍 마른 약골이었으니 여기서 가장 작은 셔츠를 사야 했다.
하지만 웨데릭이 없는 남부에서 자랐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렇 게까지 뼈만 남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게다가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테니 굳이 가장 작은 사이즈를 살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 다.
“키는 뭐, 많이 크지는 않지 만…… 아니, 많이 커 봤자 여기 있는 디엘 정도?”
“그럼 이 정도면 될 거예요.”
점원은 보통 사이즈보다 살짝 작은 셔츠 하나를 포장해 주며 친절하게 말했다.
“사이즈 교환은 언제든 되니 걱 정 마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기억 속의 에르안이 입으면 좀 헐렁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동안 좀 건강해졌을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물론 공작성에 가는 내내 나는 디엘의 화를 풀어 주어야 했다.
“넌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밟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친구라고 믿었는데.”
“다시 친구로 돌아왔어.”
“하지만 또 언제 네가 ‘설마 얘가 내 친구로 보이세요?’라며 돌변할지 모르는 거잖아.”
“그럼 친구로 또 다시 돌변하면 되지.”
애초에 며칠 갈 것을 각오했던 나는 인내심 있게 달래 주었다.
티격태격하던 나와 디엘이 대화 를 멈춘 것은 공작성에 도착해서 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녀들이 옹성이며 다가왔다.
“아가씨, 에르안 님이 오셨어요.”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3일 뒤에나 온다고……”
“혼자 일찍 달려오셨어요.”
“어쩜.”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역시, 남부에서 집이 많이 그리우셨던 거야……”
웨데릭에게 매달리던 열세 살짜 리 외로운 꼬마를 떠올리니 마음 이 안 좋았다.
‘오죽 쓸쓸하고 힘들었으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홀로 달려왔겠어.’
5년 동안 연락이 안 될 걸 알면서 보내버린 당사자였던 나는 새삼 죄책감이 들어 한숨이 저절 로 나왔다.
“지금 마님과 함께 식당에서 식 사 중이세요.”
“아, 그래요?”
“지금쯤 디저트를 드시고 계실 것 같은데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바로 식 당으로 향하기로 했다.
나 역시 오랜만에 에르안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에르안도 내가 보고 싶지 않을 까? 그래도 어린 시절 그렇게 나를 잘 따랐는데.’
“리체, 바로 식당으로 가려고?”
“어.”
나는 디엘에게 싱긋 웃으며 말 했다.
“연구실에 짐 좀 가져다 놔 줘.”
“네, 명령대로 하겠습……”
“부탁이야, 친구야.”
만능의 언어로 디엘의 입을 다 물게 한 나는 혼자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구두가 높아서 빠른 속도는 내 지 못했지만, 복도를 달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미 다 컸겠지만 지금이라도 몸이 좀 좋아지라고 이것저것 잘 먹여야지……’
예전처럼 꼭 안아 줘도 될까, 머리를 쓰다듬어 줘도 될까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이 있는 복도로 들어설 때였다.
문이 닫혀 있지 않아 공작 부인과 에르안의 대화가 들렸다.
“안 됩니다.”
처음 들어 보는 낮고 차가운 목 소리였다.
물론 5년 동안 당연히 변성기를 거쳤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상 상했던 것보다 지나치게 낮았다.
낯설었지만, 어쨌든 식당에서 들려오고 있으니 에르안의 목소 리가 확실했다.
“절대로.”
뭐, 생각해 보면 옛날에도 성인 에르안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으니까.
“리체에게 세르이어스의 성을 준다니, 양녀라니 그게 무슨.........”
나는 복도의 끝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제가 상상했던 것들 중에 가장 끔찍한 일인데요.”
다행히 아직 나를 발견한 하녀들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이어지는 대화를 들었다.
“게다가…… 뭐라고요? 다른 귀 족과 혼약? 리체를요?”
“리체가 계속 이렇게 풍족하고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안 되니? 그 애도 이번 여름에 성년이야!”
공작 부인의 말투에 파르르한 분노가 섞였다.
“난 리체를 정말 딸처럼 생각한다고 몇 번을 말했다……. 리체 가 널 얼마나 아끼고 보살펴 줬 는데 배은망덕하게 그렇게 정색 할 건 뭐지?”
보지 않아도 두 사람 간에 팽팽하게 흐르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너 역시 어릴 때 리체와 오누이처럼 잘 지내지 않았니?”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챈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공작 부인이 양녀를 제안 해도 내가 기겁하며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말대로 저렇게까지 정색할 건 뭐란 말인 가. 화내지 않고, 그냥 곤란하다 고 한마디만 해도 충분할 텐데.
“리체와 오누이라뇨. 하…… 아니,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섬뜩했는 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을 알 것 같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리체를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너, 너…… 네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체 덕분에 이렇게 건강해진 네가…”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정적 속 에서 힘겹게 울렸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내가 그 동안 널 이렇게 파렴치한으로 키웠더냐!”
“..............”
“……뭐, 그래. 아예 키우지를 못했지만, 어쨌든……”
“양녀라니, 오누이라니. 그딴 소 리 하실 거면 하루라도 빨리 공작 위를 받겠습니다.”
에르안의 얼굴을 보러 온 거지 만, 식당에 내가 나타나면 안 될 분위기라는 건 알았다.
“어머니께서 그런 끔찍한 헛짓거리를 생각조차 못하시게 말입 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뒤를 돌아 천천히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서는 디엘이 자유 도시에 가져갔던 온갖 약초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
디엘은 예상보다 빨리 온 나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르안 님 아직 안 만났어?”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 서, 에르안을 위해 사 온 선물 상자를 책상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마님과 심각한 대화 중이셔서.”
“그래? 하지만 마님과 에르안 님은 널 엄청 좋아하시잖아. 상 관없지 않았을까?”
“그래도……”
디엘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평민이 낄 분위기는 아니었어.”
당연히 세르이어스의 성을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정색하며 분노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역시 5년 동안 에르안은 심리적으로 나와 멀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제국 땅을 밟자마자 사용인들 다 두고 혼자 달려을 정도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 지……’
하지만 그건 의사로서 당연한 처방이기도 했다.
아기가 아무리 엉엉 울어도 주사는 놓아야 하는 것이 의사의 책임이었다.
‘그래. 주치의와 고용인, 평민과 귀족. 사실 딱 그 사이인데 내가 너무 어린 시절에 정을 많이 줬나 보다.’
매일 손을 잡고 재워 줘서 내가 주제를 넘었던 것이다.
5년 동안 공작 부인이 정말 친 딸처럼 나를 아껴 줘서 분수를 몰랐다.
좋은 옷 입고 편히 산다고 귀족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늘 경계한다고 경계했는데.
‘감상에 빠져 할 일을 잊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친부모를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 에 잠시 경계를 허물었던 며칠 전을 생각하며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귀엽고 아기 같은 에르안은 없어. 내가 깍듯이 모셔야 할 고용주야.’
나는 잔뜩 만들어 놓은 건강 보조제를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 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세르이어스 가문의 양녀가 된다는 건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으니까.
공과 사를 지키는 건 잘할 수 있었다.
“리체.”
디엘은 나와 함께 약초를 정리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고 옷도 안 갈아입고 바 로 연구실로 온 거야?”
“너 정리하는 거 도와주려고.”
“안 도와줘도 되는데……. 우리가 친구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아…… 디엘.”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팔 을 잡은 채 매달렸다.
“상황 알잖아. 어쩔 수 없었다니까. 몇 번을 말해.”
제발 이 뒤끝이 내일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며 두 손으로 잡은 팔을 살짝 혼들었다.
“설마 내가 너를 그렇게 생각하겠어? 연기의 일환으로 생각해.”
디엘은 부루퉁한 표정을 풀지 않고 새침하게 내 흉내를 냈다.
“그럼 친구라도 될까 봐요?”
도도하게 눈을 내리깐 얼굴이 웃겨서,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와 볼이 썰룩이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아, 디엘.”
“걱정 마세요. 명령을 아주 잘 듣는 아이니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연기를 잘못하는데, 그때의 연기만 하필 잘 되었다.
“그 말을 할 때 너무 자연스럽던걸.”
능청스럽기까지 한 디엘의 재연 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알잖아. 내가……
그때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하녀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디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나는 디엘에게 하던 말을 이어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를, 어, 떻…… 게?”
들어온 상대를 바라본 디엘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디엘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워낙에 얼음장 같아서, 나 는 인사조차도 먼저 건네지 못했다.
[혹시나 너무 덩치가 커져서 보신 뒤에 그런 눈으로 날 노려보시면, 난 정말 기절할지도 몰라. ]
[그렇게 키가 크실 것 같지도 않아. 그러니 기절하지 마. ]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우고 디엘에게 중얼거렸다.
“기절하지 마, 디엘.”
그리고 그의 팔에 매달리고 있던 내 손을 재빨리 뗐다.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제발 부탁이야.”